'최국희' 감독의 [국가부도의 날 (Default)]을
스타라이브톡으로 이틀 먼저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고통스러운 현대사 가운데
현재 우리의 삶을 바꾼 분기점이 됐던 시기였던
1997년 11월의 시점으로 돌아가
혼란스럽고도 치열했던 시대상을 담은 이 영화는
기획의 단계에서부터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죠.
엄청난 경제 위기가 곧 닥칠 것을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고
정부는 뒤늦게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한
비공개 대책팀을 구성합니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기의 시그널을 포착하고
과감히 사표를 던진 금융맨 ‘윤정학(유아인)'은
국가부도의 위기에 투자하는 역베팅을 결심,
투자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구요.
작은 공장의 사장이자 가장인 ‘갑수(허준호)'는
대형 백화점과의 어음 거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소박한 행복을 꿈꿉니다.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대책팀 내부에서 위기대응 방식을 두고
시현과 ‘재정국 차관(조우진)'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IMF 총재(뱅상 카셀)'가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면서 긴장은 극에 달합니다.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
그리고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한 가장,
1997년 11월,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 영화를 보면서 거의 모든 관객들은
두 영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초래한
미국발(發) 세계적 금융, 신용위기를 묘사한,
'아담 멕케이' 감독의 [빅 쇼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준환' 감독의 [1987]이겠죠.
최근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는 소재,
다수의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는 구조에 있어
이 영화에게 영감을 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장악하는 능력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두 영화들에게 한참을 미치지 못하네요.
[빅 쇼트]가 관객들의 추앙을 받는 이유를
한 가지로 말해보라면,
어마어마한 리듬감입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전문적인 경제용어가 곳곳에 이용됨에도
서사를 한 손에 틀어쥐고 질주하는 리듬감.
[1987]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리듬감이 극에 긴장감을 주입하는 동력이었죠.
하지만 이 영화는 기라성같은 배우들,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소재를 갖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긴장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의 분산이
장르의 혼합으로 변질되면서
서사의 통일성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한시현과 재정국 차관이 주도하는 한 축은
건조하고 차가운 사회비판적 색체를,
윤정학이 이끄는 한 축은 블랙코미디적 색체를,
갑수를 중심으로 하는 나머지 한 축은 신파적 색체를
각각 띠는데, 그 색깔이 온전히 섞이지 못하면서
극 전체에 불균질한 느낌을 줍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잡탕밥 같습니다.
인물들의 캐릭터 구축에 있어서도
문제는 제법 큽니다.
[1987]은 '박처장(김윤석)'이라는 인물에게
악의 요소를 집중시키면서도
그의 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본성을 놓치지 않았죠.
이 영화에서는 재정국 차관이 그 롤을 맡는데,
과연 그가 모든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가 설득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영화에 등장하는 경제관료들은
한결같이 무능하고 무지하게만 묘사됩니다.
가장 심각한 건 윤정학이란 인물입니다.
[베테랑]의 '조태오'의 외모와 말투를 빌렸지만
[빅쇼트]의 '마이클(크리스찬 베일)',
'자레드(라이언 고슬링)', '벤(브래드 피트)'의
행동과 반응들을 짬뽕한 듯한...
선과 악의 이중성을 지녔다기 보다는
선과 악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듯 보이네요.
심지어 한 대사는 노골적인 표절로 들리구요.
영화의 후반부, 한시현과 갑수가 연결되는 고리는
정말로 끊어냈어야 마땅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탓할 게 없습니다.
캐릭터 설정이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데,
배우로서의 역량을 완벽히 발휘한다는 게
가능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특히, 김혜수, 조우진, 뱅상 카셀, 세 배우에게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까지 드네요.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주는 긴장감이
당시 TV 뉴스, 자료화면의 그것보다 떨어졌다면
심각성은 결코 작지 않을 겁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21년 후의 현재로 돌아와
지금의 우리를 겨냥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마저 조금 이상합니다.
'아무도 믿지말고 끝없이 의심하자.'
IMF 금융위기의 교훈이 과연 그것일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칭찬받아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IMF에 대한 구제금융 신청과 협상의 과정에서
우리의 경제주권이 얼마나 심각하게 침해됐고
그 협상의 여파가 지금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상흔을 남겼는 지에 대한
정확한 고찰은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해고의 일상화와 비정규직 양산의 문제의 근원을
파헤친 점은 훌륭했구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에 대한 묘사는
뼈를 때립니다.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도 충분히 일깨웠습니다.
무엇보다...
소재의 고갈을 비난하며
비슷한 결의 영화들만을 안일하게 쏟아내는
현재의 영화계 흐름 속에서,
회상하기 조차 싫지만
당연히 우리가 다루어야 할 우리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용기와 의욕에 비해
결과물이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할 지라도
누군가가 먼저 과감하게 시도했기에
그 시도 위에 다른 발전이 더해지겠죠.
몇 명의 악인들을 징계함으로써
순간의 도덕적 우월감과 카타르시스를 얻기 보단,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의 문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야기하는 파국을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게 하는 관점의 전환이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점도
희망적 요소입니다.
'국가부도의 날'이란 직설적 제목 하에
아쉬움과 희망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바쁘고 정신없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개인의 신용, 시스템의 신용, 국가의 신용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투자자들을 상대로 '여신(與信)'을 설명하는
윤정학의 대사에서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속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신용은
끊임없이 과잉유동성을 주입함으로써 시장을 교란시키며
신용의 확대재생산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결국 빚에 의해서 지탱되다가 붕괴된다."
110년 전, 그녀의 예언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책임은
이제 우리들 각자의 몫인 동시에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의 몫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돌아가셨답니다.
어제 불펜에서 봤어요.
님 생각나더라구요.
한 시대가 또 저무네요..
혁명전야2018-11-27 16:35IP: 211.246.*.10flythew// 아니 이게 웬 청천날벼락? 전혀 몰랐습니다. 혁명전야, 순응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마지막 황제, 몽상가... 한 시대의 거장이 떠나셨군요. 제게 닉을 주시고는... ㅠㅠ Rest in Peace...
일단 스포 빼고 다 읽었습니다
영화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좋았는지 써주신 부분...정말 감동받았습니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할지라도 누군가가 먼지 과감히 시도했기에 그 위에 더 발전이 될수 있다라는 이 부분 읽고...넘나 공감했네요
이 영화를 통해서 저 역시도 한단계 더 뛰어넘는 이런 류의 영화가 나오길 기대하게끔 하네요
마지막으로 자본 축적론의 한 구절...와..정말 뼈를 때릴 정도네요
책이 있을거 같기도 한데 이 인물과 책 함 검색해봐야겠습니다
빅쇼트는 아직도 못봤는데...
이번 기회에 무조건 봐야 될거 같습니다!!
항상 좋은 리뷰 넘나 감사드립니다!!
안녕요정2018-11-27 20:51IP: 122.47.*.143flythew// 아~~전 이소식을 오늘 알았네요..
마지막 황제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밖에 보진 못했지만 마지막 황제는 예전 참 잼나게 봤던 격이나네요
하..imf...두번째 터징 포인트..ㅜㅜ
암튼 남은 시간 굿밤되셔요
혁명전야//이..닉넴이 베르나르도 감독의 영화였군요
전 지난 국정농단때 촛불혁명때의 일들에 모티브를 얻으셔서 혁명전야라고 지금까지 생각해왔습니다!!ㅋㅋㅋ
혁명전야2018-11-27 21:16IP: 39.7.*.94안녕요정// 넘넘넘 오랜만이죠. 죄송합니다. 쫌 아프기도 했고 정신도 없기도 했구요.ㅠㅠ 다시 이제 부지런히 글 올리겠습니다.^^ 요정님 당연히 보실 영화 목록에 들어있을 거라 믿습니다. 이 영화를 보신 후에 빅쇼트 보시는 게 나을 거에요. 저도 flythew님 덕에 오늘 알게 됐답니다. 촛불혁명과는 암 상관없는... 영화제목이었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몽상가들 촬영 당시 여배우 학대 문제로 논란에 오르긴 했지만, 분명 거장이었죠.ㅠㅠ
안녕요정2018-11-27 23:10IP: 122.47.*.143혁명전야//아뇨아뇨..죄송하다뇨!!
아픈거는 다 나았을거라 믿습니다!! 절대 어데 아프면 안돼요
건강이 최고니깐요!!!!
ㅋㅋㅋㅋ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혁명전야가 영화 제목이라는걸로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가 다 잘되길 진심 바랍니다!!
남은시간 정말 굿밤되셔요!!!
에스피오네2018-11-28 07:47IP: 223.62.*.90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을
아주 좋아합니다. 논란거리는 있지만 거장임에는 틀림없죠.
공감가는 부분이 많네요
최근 불펜에 올라온 글 중에 가장 영양가(?)있는 글이네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합니다 ^^
혁명전야2018-11-28 17:57IP: 39.7.*.212[리플수정]포수강민호, 동대문구장 // 로사 룩셈부르크의 이론 전반을 지지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사회주의의 필연적 득세를 예언했으니, 말도 안되죠. 다만, 그녀의 말 중에 지금의 우리가 경청할 부분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겠죠.
혁명전야2018-11-28 17:59IP: 39.7.*.212먹고싶어요// 지난 세대는 그들대로 새로운 세대는 그들 나름으로 보아야 할 가치는 충분한 영화입니다. 본문 중에 썼듯 이런 류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영화가 조금은 다른 진로를 밟아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달빛청년2018-12-02 22:44IP: 112.158.*.216전공이나 직업과는 관련이 없지만 평소 관심 분야가 경제쪽이고 보유하는 책의 1/3이 경제 관련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국가 부도의 날 충분히 재밌게 봤네요. 단지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혁명전야님 리뷰대로 긴장감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아인 캐릭터도 좀 아쉬웠구요. 그래도 개인적으로 글로만 봤던 그때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니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혁명전야님의 리뷰도 늘 좋구요. 특히 "몇 명의 악인들을 징계함으로써 순간의 도덕적 우월감과 카타르시스를 얻기 보단,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의 문제,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야기하는 파국을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게 하는 관점의 전환이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점도 희망적 요소입니다." 이 부분 리뷰가 저에게는 많이 와닿고 좋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혁명전야2018-12-03 03:55IP: 39.7.*.131달빛청년// 이 곳에서도 왓챠에서도 많은 분들이 제 글 읽어주셨더라구요. 아무도 부여하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쓴 글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느끼는 요즘입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12월의 첫 주, 활기차고 보람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