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정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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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약포(藥圃) 정탁(鄭琢)은 선조 때 문신으로 천성이 강직해 바른말을 잘했다. 교서관(제사 때 쓰는 향과 축문 등을 관장하는 관서)에서 숙직을 하는데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가 불공을 드린다며 향을 가져오라고 했다. 정탁은 향은 나라 제사에 쓰는 물건이므로 개인이 불공을 드리는 데 내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사간원 정언(정6품)으로 있을 때는 선조가 종묘에서 궁으로 돌아오면서 주위 경치를 감상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자 “일체의 잡희(雜戱·잡스러운 장난이나 놀이)는 마음을 음탕하게 해 저절로 게으른 마음이 들게 한다”며 간한다. 정탁의 가장 큰 업적은 이순신 장군을 살려낸 일이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지 5년 만에 다시 쳐들어온 1597년 충무공은 출정 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한산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돼 국문(중죄인 신문)을 당한다. 선조는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모두가 선조의 서슬에 놀라 입도 벙긋하지 못할 때 72세의 노대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문 신구차(伸救箚·죄가 없음을 밝혀 목숨을 구하는 상소)를 올린다. “사리를 살펴줄 겨를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1,298자에 달하는 진심 어린 호소는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고 충무공은 살아났다.

정탁이 임진왜란 기간 한중일의 정치·군사 공조와 갈등을 기록한 ‘임진기록’이 국내 최초로 완역돼 발간됐다. 여기에는 명나라의 금토패문(禁討牌文·일본과의 전투 중지를 명한 문서 )을 반박한 충무공의 장계(지방에 있는 신하가 왕에게 중요한 일을 보고한 문서)가 실려 있다. 충무공은 “일본 장수들이 갑옷을 풀고 돌아가려고 하니 조선군이 왜군과 싸우면 처벌할 것”이라는 금토패문 내용에 격노해 “왜는 간사스러워 믿을 수 없다”며 교전을 주장한다. 정탁은 이순신을 구했고 이순신은 나라를 구했다. 이순신 같은 인물, 정탁 같은 인물이 있어 지금 세상을 바라본다면 국민에게 어떤 직언을 할까.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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