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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만파식적에 대하여

제가 학교 숙제루 문화제 조사(국어)를 해야 되는뎀

 

 

 

만파식적을 하려 하는데여

 

 

만파식적두 문화제 인가여??

 

 

아니면 다른것줌 갈켜주세여

 

 

되도록 빨랑

 

 

(딴거 갈켜주실땐 그 문화재 이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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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5.04.01 조회수 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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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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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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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萬波息笛]





요약
고전(古典)에 전하는 신라의 신적(神笛).







본문
일종의 가로피리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擧動)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한다. 대금(大)의 기원을 이 만파식적에 두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이전에 삼죽(三竹)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만파식적에 관한 유래"







"대"금에 관한 자세한 문헌이 없어 확실한 발생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금의 기원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가 삼국유사 권 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 32 잡지 제 1 악조(樂條)에 기록되어 있는 바, 다음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기로 한다.





제삼십일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正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 칠월 칠일에 왕위를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역사(役事)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金堂)의 계하(階下)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게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 사 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 이듬해 임오(壬午) 오월 초하루 - 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 에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 었다.



"동해 안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 - 혹은 춘일이라고 쓴다 - 에게 점치게 하니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지금 삼한을 진호 하시고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어 주시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칠일에 이견대에 가시어,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산 생긴 형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 어떤 이는 산도 또한 대나무처럼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가시어 유숙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두컴컴해지더니 칠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십육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에 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 왕에게 바치었다. (왕은 용을)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으셨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 같은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 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십칠일에 기림사 서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드시었다. 태자 이공 - 효소대왕 -이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모든 눈금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눈금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서 그것을 보이겠습니다."



이에 왼편 둘째 눈금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못을 용연 이라 한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693)에 부례랑이 살아 돌아왔던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파식적이라 이름했다. 자세한 일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이상의 만파식적 설화를 대금의 기원으로 둘 수도 있겠느나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가로부는 저(橫笛)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모든 악기를 조율(調律) 하는데 표준으로 삼아왔다.



설화에 등장하는 만파식적은 악기로서 단군신화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거듭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이 결핍과 일본의 침입이라는 문제거리를 타결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을 등장시킨 이러한 신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통일신라의 건국신화가 구체적 모습을 갖추면서 형성될 수 있었으나, 그 의미가 왕권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고 사회조직의 원리와 이념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아서, 신화의 기능이 약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파식적설화를 잇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과 관련하여 비록 그 신물(神物)은 오늘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국보가 신라시대의 대표적 미술품으로 조형되어서 오늘에 전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해 두겠다.



그것은 특히 신라 종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오늘 전래하는 신라 종은 국내에 2구(口)가 있어 그 하나는 성덕대왕신종, 속칭 에밀레종이요, 다른 하나는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에서 전하는 종이다. 이들 2구는 모두 똑같이 종 최정부(最頂部)에 종을 달아매는 용뉴(龍뉴)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특이해서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다르다.



이들 중·일의 종에서는 똑같이 두 마리의 용머리를 앞뒤에 조각하고 몸을 곡선으로 했을 뿐인데, 신라 종이나 그 후의 고려 종은 거의 예외없이 하나의 용머리와 굴곡된 몸과 그 죄우에 달린 다리로써 용을 표현했다. 그리고 따로 높은 원통을 세워서 용이 마치 이 원통을 짊어지고 두 발로 애써 전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다른 곳에 없고 오직 신라 종에서만 볼 수가 있는 이 둥근 통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이 바로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이라고 생각하며, 한 마리의 용은 그 설화에 보이는 동해룡이라고 생각한다. 귀중한 신적(神笛)이기에 동해룡이 그것을 등에 짊어지고 온갖 힘을 다해 두 발로 움직이려는 동작의 순간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원통은 대(竹)로 만든 만파식적을 상징하기에,



첫째, 그 기본형이 원형이다.



둘째, 대를 모범으로 삼았기에 마디가 있다.



셋째, 대이기에 내공(內空)이어서 종신(鐘身)에 이르기까지 관통되어 있다. 이 같은 특징은 신라 종 꼭지에 세워진 원통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주종공장(鑄鐘工匠)은 신라 종의 정상부에 이 같은 동해상의 설화를 조형화하여 신라의 역사와 조형에 알맞은 독특한 양식을 창출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기왕에는 음통, 음관 등으로 불러 마치 종소리와 관련시켜서 설명하려 했는데, 필자는 그보다는 신라의 공인들이 자기 나라 종 위에다 나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이라는 국보를 올려놓음으로써 신통력을 지닌 신라 국보의 존재를 높이 받들고 신라 종만의 특색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자 한다.」
출처[도서] <신라의동해구>(황수영,열화당 교양 한국문화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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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w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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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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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겠어요... 대단한피리죠..
만파식적
31대 신문대왕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동해가에 세웠다.

그 이듬해 5월 동쪽 바다에서 조그마한 산이 나타나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에게 점을 치게 했다. 일관이 말하기를 선왕(문무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계시며 또 김유신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대신이 되어, 이 두 성인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지려고 하오니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가시면 반드시 값비싼 큰 보물을 얻을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기뻐하여 해번으로 나가자 과연 산이 있었다. 급히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산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는 한 그루 대나무가 서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이면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

그때 왕은 감은사에 머물렀다. 그 다음날 5월 8일 오시에 대나무가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가 심해져 8일동안 어두웠다가 그 달 16일에야 바람도 개고 물결도 평탄해졌다. 왕이 배로 그 산에 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바쳤다. 왕은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묻자 용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비유컨대 한쪽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나무도 합쳐야만 소리가 나니 성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대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대왕의 아버님께서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비싼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굉장히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서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배를 타고 바다에서 나왔다. 이때 갑자기 산과 용도 모두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받은 옥대의 여러 장식들은 진짜 용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태자가 떼어서 물에 담그어 본즉, 곧 그것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적병이 물러가며 질병이 낫고 또 가뭄때는 비가 내리며, 장마때에는 비가 그치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가라앉게 되는 이상한 힘이 그 속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 피리의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가의 보물로서 소중히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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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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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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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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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신라 제31대 신문왕 때 선왕인 문무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일본의 침입을 막고자 동해의 해룡이 되었다. 동해에 작은섬이 나타나 떠다니는데 일관이 점을 쳐보니 큰 보물을 얻을 것이라 함에 섬을 조사해 보니 머리는 거북이 같고 그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곤 했다. 이상히 여겨 왕이 지켜본즉 다음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치며 어둠이 7일 동안이나 계속된 후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 졌다. 왕이 배를 타고 섬에 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바치면서 이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천하가 화평할 것이라고 일러주어 왕이 대나무를 베어서 뭍에 오르자 용과 산이 사라져 버렸다.
 왕은 피리를 만들어 월서의 천존고에 모셨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났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폭풍우가 칠 때 불면 풍우가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지므로 만 가지 파란을 잠잠하게 한다고 하여 만파식적이라고 이름하여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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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기도피리로서 삼국유사에 의 하면

 

신라 제 31대 왕인 신문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세우고

 

추모하였으나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용을 시켜 동해중 한섬에 대나무를 보내었고

 

이 대나무가 낮이면 갈라져 둘이되었고

 

밤이면 하나가 되어 기이하게 여겨져

 

왕이 가보니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
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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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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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의 신문왕때에 신문왕의 아버지인 문무왕의 업적을 기르기 위해서 동해변에 한 절을 지었다. 후에 동해에 갑자기 섬에 대나무가 생기더니 갑자기 그게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신문왕이 그곳에 가니까 용이 나타나서 신문왕이 그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었다. 그것이 만파식적이다. 그래서 그 피리를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근심이 해결되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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