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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만파식적에 관하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5,414 작성일2006.08.03

만파식적

일종의 가로피리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이라 고쳤다고 한다. 대금(笒)의 기원을 이 만파식적에 두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이전에 삼죽()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위의 것은 네이버 사전의 내용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만파식적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는 그 '우연한 기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현재 우리나라에는 만파식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이후에 만파식적이 어찌되었다는 기록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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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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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내용은 완전히 한 스토리인데.......  좀 길어서

 

제가 책에서 읽은 내용을 배껴서 쓰도록 하지요.  (팔 아프겠네 ㅠㅠ)

 

  부례랑은 신라 32대 효소왕 때 사람으로 당시 수많은 낭도들에세 존경을 받던 화랑이었다.  그를 따르는 낭도들은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 상이 더욱 그러하였다.

  

   639년 3월 부례랑은 많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란(강원도 통천 부근)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북명(원산만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국경을 경비하고 있던 말갈족들이 습격해와 부례랑을 납치해 가버렸다.  인솔자를 잃은 낭도들은 어찌할 줄을 몰라 여러가지로 의논해 보았으나 부례랑을 구출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각자 흩어져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안 상만은 부례랑을 버리고 그냥 돌아올 수가 없어 부례랑이 잡혀 간 뒤를 쫓아 적국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부터 부례랑도 안 상도 소식이 없었다.  부례랑이 잡혀 간 날이 3월 11일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효소왕은 크게 슬퍼하였다.  젊은이들은 바로 나라의 기둥인데 젊은이들을 지도할 훌륭한 화랑을 잃어버렸으니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 신문왕이, 동해에서 얻은 만파식적과 현금을 천존고에 넣어 두고 이 두가지 보물이 있는 한 나라에 흉한 일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어찌 이런 불행한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라의 보물을 보존하는 창고인 천곤지기 김정고를 불러들였다.

 임금은 황급히 달려온 김정고에게 천존고의 만파식적과 현금이 제데로 있는가 살펴보라고 명을 내렸다. 

  얼마 후에 김정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임금 앞에 나타났다.  겹겹으로 문을 닫고 자물쇠로 잠가 놓은 천존고 안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다섯 사람이 자지 않고 교대해 가며 지키고 있던 만파식적과 현금이 감쪽같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덕이 없어서 나라의 일꾼인 화랑을 잃고 또 나라의 보배인 신적(만파식적)과 현금을 모두 잃었는고.  참으로 돌아가신 부왕께 면목없는 일이로다."

  효소왕은 크게 탄식하고 창고를 지키고 있던 김정고 이하 5명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현금과 만파식적을 찾는 사람에게는 상으로 1년의 조세를 면제해 주겠노라고 전국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현금과 만파식적을 봤다는 사람도 없었고 부례랑과 안 상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부례랑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금강산 백률사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렸다.  부례랑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날 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처님 앞에 향을 피우고 부례랑과 안 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던 것이다.

 

 부례랑이 말갈족에게 잡혀 간 지 두 달도 더 지난 5월 15일에도 부례랑의 부모는 백률사 부처님께 기로를 드리고 있었다.  향 연기는 두 줄로 타올라 그윽한 향기를 내면서 미소 머금은 부처님 얼굴에 감도는데, 스님이 두드리는 목탐 소리는 고요히 법당을 울리며 퍼졌다. 

  이 때 법당 천장에서 '둥기당' 하고 악기 소리가 울리더니 나라의 보물인 현금과 만파식적이 하늘에서 내려와 탁자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부례랑의 부모는 눈을 의심히여 두 보물을 어루만지며 살펴보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겼습니까? 부례랑입니다."  하면서 그립고 그립던 부례랑이 건강한 모습으로 부처님 뒤에서 나타났다.

 또 그 뒤를 따라 안 상도 나타났다.

 부례랑의 부모는 꿈만 같아 부례랑과 안 상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우리는 너희들 안부를 몰라 부처님께 빌고만 있었다.  그래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느냐?"

  부례랑의 부모는 반가움에 못 이겨 부례랑에게 지난 날의 내력을 묻는 것이었다.

 

  "저는 말갈로 잡혀 간 후 그곳의 부자 대도구라의 종이 되어,  그 집에서 기르는 말들에게 풀 먹이는 일을 맡아 하였습니다.  날마다 대오라니라는 뜰에서 말에게 풀을 먹이면서 얼마나 고향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릅답니다.  오늘도 전과 같이 대오라니 뜰에서 말들을 돌보고 있는데,  용모가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만파식적과 현금을 들고 와서 '너는 지금 고향 생각을 하고 있지? ' 하고 묻기에, 저는 그 앞에 꿇어앉아서 '고국의 임금님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이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 '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리라. ' 하기에 스님의 뒤를 따라 어느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그 해변에서 나를 찾아 헤메고 다니는 안 상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만파식적을 두 개로 쪼개서 바다 위에 띄어놓고 안 상과 나에게 각각 그 위에 타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는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서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

 

 이야기를 마친 부례랑은 향 연기 속에서 미소짓고 서 있는 부처님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더니 감탄하였다. 

 "아? 그 스님 모습이 이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

  그리고 쪼개졌다던 만파식적이 흔적도 없이 제 모습으로 나란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모두 백률사 부처님의 위력에 감탄하였다.

 

   부례랑의 아버지 대현아찬이 이 사실을 곧 효소왕에게 아뢰자 대왕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대궐로 맞아 들였다.

   부례랑과 안 상이 만파식적과 현금을 왕에게 바치자 왕은 크게 만족하여,  부례랑의 벼슬을 대각간으로 올려주고 안 상에게는 대통이란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부례랑의 아버지에게는 신라 최고의 벼슬인 태대각간을 내리고,  어머니에게는 경정궁주라는 존칭을 내렸다.

   천존고를 지키고 있다 죄없이 옥에 갇힌 김정도 등 을 모두 놓아주고 사과의 뜻으로 계급을 오급 더 높여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계급을 올려 주고,  모든 백성들로부터는

3년 간 세금을 받지 않기로 하였으며 모든 죄인의 벌을 감해 주었다.

  백률사에는 금,  은 식기며 밭  1만경( 약 3천만평) 등 많은 상을 내렸으니, 나라 안에 만파식적과 현금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소왕은 이와 같이 국보와 국선(화랑)을 다시 찾은 데 대한 감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보답하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라에 불길한 일이 있을 때나 나타나는 혜성(살별)이 6월 12일경부터 동방에 나타나 왕에게 아뢰기를,  이번 일에 부처님과 온 국민에게는 성의를 보이면서 현금과 만파식적에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 하였다.

  효소왕은 비로소 뉘우치고 식적을  '만만파파식적' 이라 불렀더니,  그제서야 혜성이 사라지고 다시는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삼국유사>

 

 

하~~ 참 길게 썼는데 ^^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만파식적에 대하여 나와있는 것은 오직 삼국유사 밖에 없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도 이 이야기 이 후로는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요.  그래서 전설 아닙니까~~  

하지만 만파식적이 정말 있다면......  끝내 주겠죠.

 

200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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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신라 이야기 1 :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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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짓자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만든 피리'라고 실려있다.

 

신문왕이 동해에 나가 살펴보니 거북의 머리 모양을 한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대나무는 낮에는 둘로 갈라져 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임금이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게 했다.

 

이 피리를 불자 몰려왔던 적군이 물러가고 앓던 병이 나았다. 가뭄에는 비가 왔고, 장마 때는 날이 갰고, 바람이 불 때는 바람을 잠재웠다. 그래서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거밖에없어서 죄송합니다

 

200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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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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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기도피리로서 삼국유사에 의 하면

 

신라 제 31대 왕인 신문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세우고

 

추모하였으나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용을 시켜 동해중 한섬에 대나무를 보내었고

 

이 대나무가 낮이면 갈라져 둘이되었고

 

밤이면 하나가 되어 기이하게 여겨져

 

왕이 가보니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
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

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

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합니다.

2008.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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