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만파식적의 유래 (칠행시)

 

 

만파식적의 유래 칠행시로 하는 게 있는데요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신문왕, 문무왕에 대한것도 좀 알려주세요

 

6-1 말듣쓰 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것입니당

내 프로필 이미지
  • 질문수7
  • 채택률100.0%
  • 마감률100.0%
닉네임jung****
작성일2006.04.24 조회수 4,466
질문자지식인 채택
1번째 답변
왕초
채택답변수 1만+받은감사수 505
절대신 열심답변자
프로필 사진

2019 생활 분야 지식인

음식점, 맛집 1위, 음식 1위, 올림픽 1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프로필 더보기

"만파식적에 관한 유래"

 

"대"금에 관한 자세한 문헌이 없어 확실한 발생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금의 기원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가 삼국유사 권 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 32 잡지 제 1 악조(樂條)에 기록되어 있는 바, 다음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기로 한다.


제삼십일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正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 칠월 칠일에 왕위를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역사(役事)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金堂)의 계하(階下)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게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 사 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 이듬해 임오(壬午) 오월 초하루 - 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 에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 었다


"동해 안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 - 혹은 춘일이라고 쓴다 - 에게 점치게 하니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지금 삼한을 진호 하시고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어 주시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칠일에 이견대에 가시어,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산 생긴 형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 어떤 이는 산도 또한 대나무처럼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가시어 유숙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두컴컴해지더니 칠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십육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에 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 왕에게 바치었다. (왕은 용을)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으셨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 같은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 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십칠일에 기림사 서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드시었다. 태자 이공 - 효소대왕 -이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모든 눈금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눈금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서 그것을 보이겠습니다."


이에 왼편 둘째 눈금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못을 용연 이라 한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693)에 부례랑이 살아 돌아왔던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파식적이라 이름했다. 자세한 일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이상의 만파식적 설화를 대금의 기원으로 둘 수도 있겠느나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가로부는 저(橫笛)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모든 악기를 조율(調律) 하는데 표준으로 삼아왔다.


설화에 등장하는 만파식적은 악기로서 단군신화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거듭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이 결핍과 일본의 침입이라는 문제거리를 타결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을 등장시킨 이러한 신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통일신라건국신화가 구체적 모습을 갖추면서 형성될 수 있었으나, 그 의미가 왕권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고 사회조직의 원리와 이념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아서, 신화의 기능이 약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파식적설화를 잇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과 관련하여 비록 그 신물(神物)은 오늘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국보가 신라시대의 대표적 미술품으로 조형되어서 오늘에 전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해 두겠다.


그것은 특히 신라 종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오늘 전래하는 신라 종은 국내에 2구(口)가 있어 그 하나는 성덕대왕신종, 속칭 에밀레종이요, 다른 하나는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에서 전하는 종이다. 이들 2구는 모두 똑같이 종 최정부(最頂部)에 종을 달아매는 용뉴(龍뉴)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특이해서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다르다.


이들 중·일의 종에서는 똑같이 두 마리의 용머리를 앞뒤에 조각하고 몸을 곡선으로 했을 뿐인데, 신라 종이나 그 후의 고려 종은 거의 예외없이 하나의 용머리와 굴곡된 몸과 그 죄우에 달린 다리로써 용을 표현했다. 그리고 따로 높은 원통을 세워서 용이 마치 이 원통을 짊어지고 두 발로 애써 전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다른 곳에 없고 오직 신라 종에서만 볼 수가 있는 이 둥근 통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이 바로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이라고 생각하며, 한 마리의 용은 그 설화에 보이는 동해룡이라고 생각한다. 귀중한 신적(神笛)이기에 동해룡이 그것을 등에 짊어지고 온갖 힘을 다해 두 발로 움직이려는 동작의 순간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원통은 대(竹)로 만든 만파식적을 상징하기에,


첫째, 그 기본형이 원형이다.


둘째, 대를 모범으로 삼았기에 마디가 있다.


셋째, 대이기에 내공(內空)이어서 종신(鐘身)에 이르기까지 관통되어 있다. 이 같은 특징은 신라 종 꼭지에 세워진 원통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주종공장(鑄鐘工匠)은 신라 종의 정상부에 이 같은 동해상의 설화를 조형화하여 신라의 역사와 조형에 알맞은 독특한 양식을 창출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기왕에는 음통, 음관 등으로 불러 마치 종소리와 관련시켜서 설명하려 했는데, 필자는 그보다는 신라의 공인들이 자기 나라 종 위에다 나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이라는 국보를 올려놓음으로써 신통력을 지닌 신라 국보의 존재를 높이 받들고 신라 종만의 특색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자 한다.」


<신라의동해구>(황수영,열화당 교양 한국문화사-8)

 

신라 문무왕 일본을 발전 시키다.


7, 8세기의 한일 고대 교류사에 관한 일본 역사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


"신라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은 681년 7월 1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은 이에 앞서 동해 대왕암 근처 바닷가를 떠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가 일본의 제 42대 문무왕(697∼707 재위)이다."


일본 사학계의 '매서운 칼잡이'로 최근 주목을 받는 여류 학자 '고바야시 야스코' 여사가 그의 저서 <왜왕들의 7세기... 천황제의 시작과 수수께끼의 왜왕들>(현대사조사)에서 제기한 폭탄 선언이다.

일본 문무왕은 수수께끼의 명군(名君 - 뛰어난 임금)이다.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신들의 이야기와 제41대 지통여왕까지의 기록)나 속일본기(續日本記·제42대 문무왕과 50대 환무왕 등 8세기의 왕에 관한 기록)를 통틀어 그의 태어난 해에 관한 서술은 어디에도 없다. 문무왕은 생일없는 임금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몇살에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옛 문헌 등에 문무는 15세에 즉위했고 25세에 요절한 임금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 10년의 치적은 참으로 눈부시다. 즉위 하자마자 법률을 만들어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고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도, 량 즉 길이와 부피를 재는 잣대나 됫박 등을 만들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고 돈을 찍어 내는 관청을 처음 두었고, 처음으로 의관을 만드는 관청을 두었고 처음으로 대학을 열어 학문을 장려했고, 화공사를 처음 두어 미술 공예를 장려했고 공자를 제사 지내는 의식도 처음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처음....' 일색의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험준한 산길을 닦아 국도도 열었고, 백성에게 두루 의약품을 나누어 주는가 하면 세금도 탕감해 주는 등 어진 행정을 폈고, 각지에 말 사육장을 마련했으며, 배를 만드는 한편 항구도 수리 하는 등 국방도 다졌고 , 즉위하자마자 신라와의 국교를 원활히 했다.

"매우 박학하며 누구보다도 활쏘기에 능했다"며 <속일본기>는 문무를 마냥 칭송했다. 안으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폈고 밖으로 선린 외교도 활발히 한 그야말로 문무에 달통한 명군이었다. 15세에 즉위하고 25세에 죽은 임금치고는 실로 엄청난 치적이다. 이 노련한 행정력에 알맞게 그의 시호도 매우 노인답다.

즉, '아마노마무네토요오호지'(天之眞宗豊祖父)이다. (퍼온이주: 天之眞宗豊祖父 - 대강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 하늘의 진짜 할아버지") 그런데 1220년께 자원이 편찬한 일본 최초의 사론서인 <우관초>에 따르면 문무가 돌아갔을 때 나이는 25세 혹은 78세로 되어 있다.

두세 살 정도의 차이라면 몰라도 25세 혹은 78세라니... 필시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닐까?

대왕암은 문무왕을 위해 신문왕이 완성한 감은사 바로 동쪽에 위치한다. 이 대왕암은 문무왕이 수중릉이라 일컬어 왔다. 마치 분지처럼 푹 팬 깊은 곳에 바다물이 넘나들어 괴었고, 커다란 넙적바위 하나가 가운데 있다. 흡사 고인돌 모양이다.

이 곳을 수중릉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넙적바위 밑에 문무왕을 화장한 재 또는 유물을 담은 석관이나 석호를 안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후 몇몇 학자들의 추적에 따르면 바위 아래는 석관도 석호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일 뿐이요, 관을 안치했을 만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수중릉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고바야시 여사도 대왕암은 능이라기보다는 문무왕이 일본으로 피신한 출항기념지로 본다. 당나라 세력에 항거하여 싸우다 끝내 아들 신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는 죽은 것 처럼 꾸며 일본으로 망명했으리라 추정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일본서기> 그리고 당나라 문헌 등을 면밀히 비교해 검토하면 이런 결론이 추출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무왕이 신라에서 죽은 지 16년 후 일본에서 다시 문무왕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고대서) <만엽집>에는 일본 문무왕이 읊은 노래가 실려 있다.

 

권1의 74번.

생생한 신라말, 즉 경상도 사투리가 이 노래의 최대의 특징이다. 또한, 일본의 문무왕은 편지를 자주 썼다. 주로 신라 성덕왕(신문왕의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첫번째 편지는 703년(신문왕의 큰아들)이 죽었을 때 보낸 것으로 애틋함이 흥건하다. 두번째는 '이른 봄 추위에 별고 없이 지내느냐'며 선물을 보낸다는 정겨운 사연이다. 세번째는 그가 죽기 1년전인 706년 11월에 보낸 편지다.

신라 문무왕이 아들 신문왕에게 보낸 유언장을 방불케 한다. '국기를 튼튼히 하며 나라 안이 안락토록하고 풍속을 순화하게 할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어버이가 자손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다. 당시의 일본 왕이 강대한 통일 신라 왕에게 보낸 서한치고는 앞뒤가 영 맞지 않는다. 신라는 문무왕 시대에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고 당의 간섭을 물리치며 국기를 다졌다.

일본도 문무왕 시대에 독립 국가로서의 갖가지 면모를 갖추어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 일본 조정의 제반의식도 이때 비로소 제정됐다. 정월 초하룻날 대극전에서 베푸는 하례 행사에 금동제 세다리 까마귀의 눈부신 당(幢)과 해, 달,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모양의 그림을 그린 갖가지 기치를 처음으로 세우게 한 것도 문무왕이다.

'금동의 삼족오(세발 까마귀)'는 가야 세력의 상징이고 '당(幢)'은 기치(깃발)를 지칭한 낱말인 동시에 신라 군제(軍制 - 군사 제도)의 (부대)단위 명이기도 하다.

 

같은시대를 산 두 사람의 명군(名君).

신라와 일본의 두 문무왕에 관한 비교연구는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과제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2번째 답변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프로필 더보기

ㅋㅋ 님 초딍이시넹  ^^  걍 모른다고 하거나 부모님께 여쭤 보세요.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시길^^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3번째 답변
sksd****
채택답변수 1
시민
프로필 사진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프로필 더보기

뭘까요...유래는...걍쌤한테 저이 집 컴 맛이가서....라고..

출처ㅋㅋ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4번째 답변
suny****
채택답변수 1
시민
프로필 사진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프로필 더보기

일종의 기도피리로서 삼국유사에 의 하면

 

신라 제 31대 왕인 신문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세우고

 

추모하였으나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용을 시켜 동해중 한섬에 대나무를 보내었고

 

이 대나무가 낮이면 갈라져 둘이되었고

 

밤이면 하나가 되어 기이하게 여겨져

 

왕이 가보니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
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

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

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합니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5번째 답변
탈퇴한 사용자의 답변입니다.
프로필 사진
 

만파식적의 유래

요약

고전(古典)에 전하는 신라의 신적(神笛)으로 왕이 이 피리를 부니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 해결되었다고 전해진다.


설명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 원명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신라의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후에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만든 피리라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설화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682년(신문왕 2) 5월 초에 해관(海官)이 와서 동해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왕래한다 하여 임금이 곧 이견대(利見臺)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산을 살펴보니, 그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이면 하나로 합쳐졌다. 이에 배를 타고 들어가서 그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이 들면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개며, 바람이 불 때는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그리하여 이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삼았다고 한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2개 더보기 현재 페이지5/전체 페이지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