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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만파식적, 원종애노의난 질문 ( 둘중하나만이라도 )

1. 만파식적이란 무엇인지 전반적인 지식좀 알려주세요

2. 원종애노의난 이 무엇인지 전반적인 지식좀 알려주세요


3. 만파식적과 원종애노의난이 왕의관점에선 단순한 반란이될수있는데

백성의관점은 어떨지 알려주세요


4. 만파식적은  왜만들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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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10.06 조회수 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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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율 68%최근답변 2018.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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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파식적 같은 경우는 통일 신라 시대 때, 신문왕이 아버지였던 문무왕을 추모하며 절을 지었는데 
그 때 하늘에서는 김유신 장군이, 바다에서는 문무왕이 합심해 대나무 하나를 보내왔는데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든 것이 바로 만파식적이라고 합니다. ( 물론 설화라 실제로 존재하진 않습니다. )
피리를 불면 자연재해가 스스로 가라앉고, 적들도 모두 도망가고, 병도 낫게 됩니다. 

2.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신라시대 귀족과 왕족의 사치 덕에 백성이 살 수 없게 되자 일어난 반란입니다. 

3. 만파식적 같은 경우는 통일신라 그 당시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래 4번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원종과 애노의 난은 전적으로 왕족과 귀족의 사치에 의해 분노한 농민들이 일어난 봉기입니다. 
   당연히 백성들은 찬성하는 눈치였겠죠. ( 이런 뭣같은 나라 빨리 망해라 이런 느낌일 겁니다 )
  
4. 만파식적은 통일신라 당시 새로 신라로 들어온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이 신라에 잘 섞여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설화입니다. 만파식적과 신라왕의 위대함 ( 만파식적 제조 ) 로 유민들이 신라를 믿게 되면서
민심이 통합되는 것을 꾀한 것이지요.
출처네이버와 내 머리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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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he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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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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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파식적은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다.
죽어서 바다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고.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2. 신라 후대로 가면서 정치·사회적인 모순이 심화되어 갔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잦은 정쟁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관이나 귀족 및 사원의 토지 점유율이 확대되고 일반 농민들은 점차 토지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도 조세 부담이 피지배층인 일반 농민에게 그대로 전가되자 이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농민 봉기가 바로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3. 이 난은 중앙 정부와 지방 토호 세력에 저항하며 일어난 신라 하대의 농민 봉기로서는 선구자적 의의를 지니며, 이후 지방 세력의 형성과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라 고대국가를 붕괴시키는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중앙정부도 막지 못했다는 것은 그 정부가 무능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그만큼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4.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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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리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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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파식적은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죽어서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2. 원종애노의 난은 신라 사벌주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개설
신라는 중대의 전성기를 지나 하대로 접어들면서 정치·사회적인 모순이 심화되어 갔다.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잦은 정쟁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관(官)이나 귀족 및 사원의 토지 겸병 확대로 일반 농민들은 점차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갔다.

국가 경제의 기반인 농민층이 분해된 반면, 사치와 향락의 풍조로 중앙 정부의 재정 수요는 점점 늘어만 갔다. 진성여왕 대에는 이러한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었음에도 근본적인 개혁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889년 지방의 주·군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중앙 정부는 사자를 파견해 오히려 조세를 독촉하였다.이러한 조세 부담은 피지배층인 일반 농민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가 바로 사벌주를 근거로 해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경과
중앙 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고자 나마(奈麻) 영기(令奇)를 파견했으나 오히려 농민군의 세력에 눌려 공격조차 못하였으며,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전사하였다.

이 일로 영기는 처형되었으며, 10세 정도인 우련의 아들이 촌주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 때 반란군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른 반란군의 무리나 지방 세력에 의해 흡수, 통합되었거나 또는 거세된 것으로 보인다.


3. 원종애노의 난 : 백성의 관점

이 난은 중앙 정부와 지방 토호 세력에 저항하며 일어난 신라 하대의 농민 봉기로서는 선구자적 의의를 지니며, 이후 지방 세력의 형성과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라 고대국가를 붕괴시키는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지식iN 교육기부 참여로 작성된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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