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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에 대해

만파식적의 유래와 역사적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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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ssee****
작성일2008.04.18 조회수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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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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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설화에 전하는 일종의 가로피리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擧動)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이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한다. 대금(大笒)의 기원을 이 만파식적에 두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이전에 삼죽(三竹)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흩어져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했던 호국사상이 담겨져있다.

 여기까지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온 만파식적에 관한 설명이구요

신문왕때는 김흠돌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세력들의 쟁탈전 등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당연히 중앙 정국은 혼란해 질 수밖에 없었죠. 당시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한 신문왕의 바람이 만파식적에 반영 됐다고도 할 수 있죠. 물론 위의 설명대로 호국사상적 성향이 더 강하겠지만 이런 성향도 있다는걸 알아 두시면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여기 나오는 이들의 업적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문무왕은 무열왕(김춘추)의 아들로서 삼국통일을 이룩한 왕이죠. 그리고 감은사는 문무왕때 준공되어 신문왕때 완성 된 절입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서 통일 신라의 각종 제도를 정비했고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했죠 (녹읍은 후에 경덕왕때 부활 했습니다)

 

 김유신이야 너무 다들 잘 아셔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알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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