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만파식적
kwon**** 조회수 2,960 작성일2008.04.11
만파식적에대하여알려주세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7 개 답변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adad****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만파식적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기한 피리로서 그 피리를 지니기만 해도 적이 스스로 물러가고 나라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만파식적은 죽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의 한 아들인 김유신공이 신라를 지킬 보물로 내려준 것이며 동해변에 있는 조그만 산에 심어져 있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로 동해의 바다용이 직접 당시 신라왕인 신문왕에게 바친 신기한 피리로 전한다. 이러한 만파식적의 설화는 바로 통일을 이룩한 왕과 그 통일의 과업을 계승해가야 하는 후계자의 왕위 교체시기에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왕족은 물론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갈망했던 당시의 시대적 요구가 그대로 표출되어 창작된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좁게 만파식적 설화는,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이 자신의 정치적 힘의 결핍과 외부 세력의 침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神物)이 필요했고, 만파식적을 그 신물로서 고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즉위 초기에 발생한 김흠돌의 반란과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을 만파식적의 설화 속에 담아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파식적 설화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받았다는 해로부터 몇 십년이 지난 해에 다시 등장한다. 그 내용은 부례랑이라고 하는 국선이 국경지대에 나갔다가 말갈족들에게 납치되는데, 같이 있던 화랑들 중 안상이란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달아난 사건이 일어난 때와 그 시기를 같이하여 만파식적이 분실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화랑들이 그 이전의 용맹한 화랑정신을 잃고 있으며, 그것 못지않게 나라 안팎으로 긴장이 이완되고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부례랑과 안상이 신라로 돌아오고 만파식적을 다시 찾는다는 것으로 그 끝이 맺어지고 있다. 7세기 말은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고구려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압박이 더욱 거세어지던 시기로서 신라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이 때 만파식적은 다시 평화를 보장해주고 신라의 안위를 책임지는 상징물로서 다시 한 번 더 널리 그 의미가 부각된 것으로 보이며 만파식적 설화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이러한 시대상황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파식적 설화는 그 이후에도 간혹 나타나는데 특히 8세기 후반에 만파식적에 관한 기록이 자주 소개된다. 이 때의 내용은 만파식적의 위력으로 일본이 감히 신라를 침공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일본이 만파식적을 비싼 돈을 주고 사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이 설화 역시 8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면서 만파식적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신라를 침공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만파식적은 평화와 안정의 상징물로서 당시 널리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제작되어 배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파식적 설화는 단순히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당시 신라가 겪고 풀어야만 했던 국정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을 풀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고뇌가 담겨 있는 상징물이라 볼 수 있다

2008.04.11.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소민
우주신 열심답변자 eXpert
디자이너 #몸짱디자이너 폰트 8위, 한문 10위, 포토샵 23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용으로부터 영험스러운 대를 얻어 피리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려 있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신문왕 2년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부산(浮山)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져서, 만파식적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뒤 효소왕 때 이적(異蹟)이 거듭 일어나,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감은사지가 있던 내에서 종소리 또는 물 끓는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하는데, 이로 보아 만파식적의 소리로 왜적을 물리쳤다는 등의 이적은 이러한 지형적 특수성과 기상 변화에 기인해서 나는 소리로 일어났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만파식적은 악기로서 단군신화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거듭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결핍과 일본의 침입이라는 문젯거리를 타결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을 등장시킨 이러한 신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통일신라의 건국신화가 구체적 모습을 갖추면서 형성될 수 있었으나, 그 의미가 왕권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고 사회 조직의 원리와 이념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아서, 신화의 기능이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4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thh****
중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요약
고전()에 전하는 신라의 신적()으로 왕이 이 피리를 부니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 해결되었다고 전해진다.
본문

만파식적설화에 전하는 일종의 가로피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이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이라 고쳤다고 한다. 대금(笒)의 기원을 이 만파식적에 두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이전에 삼죽()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흩어져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했던 호국사상이 담겨져있다.

2008.04.12.

  •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9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fhak****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내용: 삼국유사)부례랑은 신라 32대 효소왕 때 사람으로 당시 수많은 낭도들에세 존경을 받던 화랑이었다.  그를 따르는 낭도들은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 상이 더욱 그러하였다.

  

   639년 3월 부례랑은 많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란(강원도 통천 부근)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북명(원산만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국경을 경비하고 있던 말갈족들이 습격해와 부례랑을 납치해 가버렸다.  인솔자를 잃은 낭도들은 어찌할 줄을 몰라 여러가지로 의논해 보았으나 부례랑을 구출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각자 흩어져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안 상만은 부례랑을 버리고 그냥 돌아올 수가 없어 부례랑이 잡혀 간 뒤를 쫓아 적국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부터 부례랑도 안 상도 소식이 없었다.  부례랑이 잡혀 간 날이 3월 11일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효소왕은 크게 슬퍼하였다.  젊은이들은 바로 나라의 기둥인데 젊은이들을 지도할 훌륭한 화랑을 잃어버렸으니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 신문왕이, 동해에서 얻은 만파식적과 현금을 천존고에 넣어 두고 이 두가지 보물이 있는 한 나라에 흉한 일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어찌 이런 불행한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라의 보물을 보존하는 창고인 천곤지기 김정고를 불러들였다.

 임금은 황급히 달려온 김정고에게 천존고의 만파식적과 현금이 제데로 있는가 살펴보라고 명을 내렸다. 

  얼마 후에 김정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임금 앞에 나타났다.  겹겹으로 문을 닫고 자물쇠로 잠가 놓은 천존고 안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다섯 사람이 자지 않고 교대해 가며 지키고 있던 만파식적과 현금이 감쪽같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덕이 없어서 나라의 일꾼인 화랑을 잃고 또 나라의 보배인 신적(만파식적)과 현금을 모두 잃었는고.  참으로 돌아가신 부왕께 면목없는 일이로다."

  효소왕은 크게 탄식하고 창고를 지키고 있던 김정고 이하 5명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현금과 만파식적을 찾는 사람에게는 상으로 1년의 조세를 면제해 주겠노라고 전국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현금과 만파식적을 봤다는 사람도 없었고 부례랑과 안 상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부례랑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금강산 백률사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렸다.  부례랑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날 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처님 앞에 향을 피우고 부례랑과 안 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던 것이다.

 

 부례랑이 말갈족에게 잡혀 간 지 두 달도 더 지난 5월 15일에도 부례랑의 부모는 백률사 부처님께 기로를 드리고 있었다.  향 연기는 두 줄로 타올라 그윽한 향기를 내면서 미소 머금은 부처님 얼굴에 감도는데, 스님이 두드리는 목탐 소리는 고요히 법당을 울리며 퍼졌다. 

  이 때 법당 천장에서 '둥기당' 하고 악기 소리가 울리더니 나라의 보물인 현금과 만파식적이 하늘에서 내려와 탁자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부례랑의 부모는 눈을 의심히여 두 보물을 어루만지며 살펴보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겼습니까? 부례랑입니다."  하면서 그립고 그립던 부례랑이 건강한 모습으로 부처님 뒤에서 나타났다.

 또 그 뒤를 따라 안 상도 나타났다.

 부례랑의 부모는 꿈만 같아 부례랑과 안 상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우리는 너희들 안부를 몰라 부처님께 빌고만 있었다.  그래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느냐?"

  부례랑의 부모는 반가움에 못 이겨 부례랑에게 지난 날의 내력을 묻는 것이었다.

 

  "저는 말갈로 잡혀 간 후 그곳의 부자 대도구라의 종이 되어,  그 집에서 기르는 말들에게 풀 먹이는 일을 맡아 하였습니다.  날마다 대오라니라는 뜰에서 말에게 풀을 먹이면서 얼마나 고향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릅답니다.  오늘도 전과 같이 대오라니 뜰에서 말들을 돌보고 있는데,  용모가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만파식적과 현금을 들고 와서 '너는 지금 고향 생각을 하고 있지? ' 하고 묻기에, 저는 그 앞에 꿇어앉아서 '고국의 임금님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이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 '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리라. ' 하기에 스님의 뒤를 따라 어느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그 해변에서 나를 찾아 헤메고 다니는 안 상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만파식적을 두 개로 쪼개서 바다 위에 띄어놓고 안 상과 나에게 각각 그 위에 타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는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서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

 

 이야기를 마친 부례랑은 향 연기 속에서 미소짓고 서 있는 부처님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더니 감탄하였다. 

 "아? 그 스님 모습이 이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

  그리고 쪼개졌다던 만파식적이 흔적도 없이 제 모습으로 나란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모두 백률사 부처님의 위력에 감탄하였다.

 

   부례랑의 아버지 대현아찬이 이 사실을 곧 효소왕에게 아뢰자 대왕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대궐로 맞아 들였다.

   부례랑과 안 상이 만파식적과 현금을 왕에게 바치자 왕은 크게 만족하여,  부례랑의 벼슬을 대각간으로 올려주고 안 상에게는 대통이란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부례랑의 아버지에게는 신라 최고의 벼슬인 태대각간을 내리고,  어머니에게는 경정궁주라는 존칭을 내렸다.

   천존고를 지키고 있다 죄없이 옥에 갇힌 김정도 등 을 모두 놓아주고 사과의 뜻으로 계급을 오급 더 높여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계급을 올려 주고,  모든 백성들로부터는

3년 간 세금을 받지 않기로 하였으며 모든 죄인의 벌을 감해 주었다.

  백률사에는 금,  은 식기며 밭  1만경( 약 3천만평) 등 많은 상을 내렸으니, 나라 안에 만파식적과 현금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소왕은 이와 같이 국보와 국선(화랑)을 다시 찾은 데 대한 감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보답하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라에 불길한 일이 있을 때나 나타나는 혜성(살별)이 6월 12일경부터 동방에 나타나 왕에게 아뢰기를,  이번 일에 부처님과 온 국민에게는 성의를 보이면서 현금과 만파식적에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 하였다.

  효소왕은 비로소 뉘우치고 식적을  '만만파파식적' 이라 불렀더니,  그제서야 혜성이 사라지고 다시는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요약: 1)일만(만) - 여러가지라는 뜻.

물결(파) - 물결이 일렁이는 것.

쉴(식) - 그치게 하다라는 뜻.

피리(적) - 말 그대로 부는 피리에요.

 

뜻을 말한다면 여러가지로 이는 물결을 그치게 하는 피리라는 것으로 여기서는 물결은 고통이나 근심을 나타내는 것. 많은 근심을 평안히 하는 피리라는 뜻입니다.

2): 모든 근심을 잠재우는 피리 라는 뜻으로  이 피리를 불면 전쟁이 그치고 나라가 평안해 졌다는 신라의 전설이 있습니다.

3) 백과사전의 내용: 일종의 가로피리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擧動)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한다. 대금(大笒)의 기원을 이 만파식적에 두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이전에 삼죽(三竹)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2008.05.21.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자갈치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그냥 불면 오던적군이 물러나고, 전염병이 사라지며, 가뭄이나 장마도 해결하고

 

바람을 잠재우고 물결을 잔잔하게 만드는 피립니다

2008.04.11.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