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서 장영실 역 맡아 한석규와 호흡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배우 최민식(58)을 만날 때마다 한결같이 드는 생각은 영화 '해피엔드'의 서민기, '파이란'의 강재, '올드보이'의 오대수, '명량'의 이순신,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 '대호'의 천만덕이 과연 이 한 명의 배우에게서 탄생한 인물들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다. 매영화에서 전혀 색다른 캐릭터를 맡아 소시민의 우유부단함부터 불같은 뜨거움과 날 선 냉철함, 뒤통수가 오그라드는 공포, 느물느물한 처세까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의 끝을 관객들에게 전해준 그지만 실제 마주한 공간에서는 장난기 넘치는 이웃집 맘씨 좋은 삼촌 그 자체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서는 강도도 다르고 온도 차도 느껴지지만 인간의 온기가 느껴져서 좋은데, 실제의 그도 마찬가지다.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의 주인공에게서 으레 느껴질 법한 자만심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천문')로 배우 한석규(56)와 '쉬리'이후 20년 만에 호흡을 이룬 최민식을 만났다. 허진호 감독이 연출을 맡은 '천문'에서 최민식은 노비 출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역을 연기했다. 세종을 하늘 같이 우러르며 같은 꿈을 꾸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던 천진무구했던 장영실을 연기한 그인 만큼 인터뷰 현장에서 그의 마음 속 언저리에 자리한 개구쟁이 소년의 마음이 삐죽 솟아나온다. 영화 속 캐릭터들처럼 마주한 최민식에게서 훈훈한 온기가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 한석규와 20년 만의 호흡이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 한석규가 재수를 안 하고 바로 동국대 연극학과에 들어왔으니 만 19세 때 처음 만났다. 졸업도 같이 했고 군대 3년을 포함해 작품도 같이 많이 했다. 그 친구와는 정말 열심히 했다. 그건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거짓도 없다. 우리는 정말 미팅할 시간도 없이 연극을 열심히 했다. 그 때는 저도 맛이 간 얼굴이 아니고 괜찮았다. 왜 시간이 별로 없었냐면 학생극이 그렇다. 무대조명도 세트도 우리가 다 만든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 그리고 석규 바로 아래 학번이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는 김상중이다. 그런데 석규와는 작품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시간들이 이번 작품에도 도움이 됐다. 다른 사람과 열 마디 해야 할 걸 석규와는 두세 마디만 말해도 안다. 워낙 많은 희곡과 시나리오를 토론해 왔으니까.

- '천문'에 함께 하기로 결정할 무렵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궁금하다.

▲ 시나리오를 받고 나서 석규에게 '너 어떻게 봤냐'고 물으니 "좋아요, 형. 할 게 많아요. 많이 비어있어요"하더라. 그래서 "대답 좀 빨리빨리 하라"고 다그쳤다.(웃음) 그동안 세종과 장영실의 역사적 배경과 업적 등은 책과 방송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나. 우리는 그 업적을 두 사람이 이루기까지 관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야 차별화된 작품이 나오리라 봤다. 석규와 호흡해 좋았던 건 예열 과정이 필요 없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디테일로 들어갔다. 그런 장점이 있었다. 마치 탁구를 칠 때 서브를 넣거나 리시브를 넣고 또 어떨 땐 스핀을 넣고 하는 식으로 랠리를 펼쳤다. 랠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파트너였다.

- 가장 신이 나서 촬영한 장면이 있다면.

▲ 극 후반 옥사에 있다가 이천 장군(허준호)이 끄집어내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자리에 전하가 있잖나. 나중에 둘이 부둥켜안고 우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고 세종도 켜켜이 쌓여온 장영실에 대한 마음으로 눈시울을 훔친다. 나는 장영실로 살면서 세종에 대한 연민과 전하를 향한 마음이 있으니까 탁 먼저 터지는 거다. 그러면 석규도 운다. "전하, 그 어려운 길을 홀로 가시려 하십니까"라고 하면 "이 사람아, 자네 같은 벗이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하고 받지 않나. 그게 바로 호흡이다. 연주하듯 서로의 장단을 오롯이 받아내는 것. 그럴 때 쾌감이 느껴진다.

- 두 사람이 현장에서 분위기 메이커였다던데.

▲ 소위 말해 두 사람 다 곧 환갑인데 창피하다 할 정도로 장난치고 놀았다. 그렇게 편하게 하면서도 둘이 만나서 작품 이야기 할 때는 집중력 있게 하고 그랬다. 대본 놓고 한창 시나리오 회의를 하다 보면 술자리도 이어지고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하면 애드리브도 나오고 파생돼 나오는 것들도 자유롭게 받아주고 했다.

- '천문'을 택한 첫 번째 이유는 역시 한석규인가.

▲ 물론이다. '천문'이 아니고 현대물이어도 했을 거다. 석규와 함께 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허진호 감독과는 술자리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한 번 같이 하자'고 여러 번 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시나리오를 주더라. 한석규와 같이 해 달라 하더라. 시나리오를 보니 역시 '허테일'이더라. "요거 살짝 괜찮겠는데" 싶었다.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 집중하는게 보였고 그래서 나와 석규를 같이 불렀구나 싶었다. 제안 당시 '누가 세종을 하고 누가 장영실을 할지는 두 분이 알아서 정하라'고 하더라.

- 세종 역을 해본 적이 없으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한데.

▲ 석규한테 '넌 뭐하고 싶냐' 그랬다. 딱 3일 후에 한석규가 "세종할래요, 형"이라더라. 자식이 또 왕을 하겠다고 하더라.(웃음) 그래서 '아이고 내 팔자야, 노비에서 벗어나질 않는구나' 했다. 하지만 저는 장영실 역할이 좋았다. 문헌에 이 분에 대해 기록된 게 없다. 그러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가 상상한 대로 그려보자고 했다. 왕이라서 좋고 노비라서 안 좋은 게 아니라 자유롭게 만들 여백이 많으니 좋았다. 만약 내가 세종을 했다면 정남순(김태우 역)은 죽었을 거다. 목이 날아갔겠지.(웃음) 내가 세종을 했다면 많이 달랐겠지.

- 장영실을 어떻게 해석했나. 레퍼런스로 삼은 인물이 있나.

▲ 유명한 로봇 과학자 데니스 홍이 TV에서 강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정말 아이 같았다. 자기가 만든 로봇을 가지고 와서 강연을 하는데 로봇이 우리 세대에게는 장난감처럼 비치잖나. 그런데 로봇으로 AI를 설명하고 현실 생활과 연관성을 설명을 하는데 정말 로봇에 미쳐 있더라. 수백 년 전 장영실도 저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실록에도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아기 같은 인물이라고 나와 있다. 세종대왕이 내관처럼 항상 가까이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도 있다. 천하디 천한 계급의 사람과 가장 지위가 높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간의대와 물시계를 만드는 이야기만 했을까. 우리 영화에서처럼 그 시대 재미있을 법한 놀이도 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펼쳐 나갔다.

- 왕의 처소 미닫이 문 창호지에 먹으로 색을 칠하고 구멍을 뚫어 별을 만드는 장면도 두 배우의 아이디어라던데.

▲ 실제라면 그런 게 가능하겠나. 다만 두 사람 모두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열린 마음의 군주, 신분과 관계없이 신하를 품어 안을 수 있는 아량을 가진 세종을 그리고 싶었다. 장영실 입장에서는 자기를 인정해주고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해주는 왕을 존경하고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세종이 근정전 앞에 영실을 불러 둘이 누워서 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석규 아이디어였다. '내가 네 옆에 버릇없이 누웠다가 참수 당하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했지만 그렇게 형식을 타파하고 권위를 타파하려고 한 분이 세종이니 상상을 가미하게 된 거다.

- 사극 창작에는 '역사 논란'이 불거질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어려움은 없었나.

▲ 명나라를 향한 사대주의에 빠진 대신들 부분은 사실 비어 있는 공간을 열어두고 봐주시면 좋겠다. 합리적 상상은 해볼 수 있지 않나. 그런 면에서 창작하는 재미는 있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런 지점이 역사극을 하고 싶은 이유다. 사실은 사실대로 묘사해야 하지만 빈 공간은 우리가 만들 수 있지 않나.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100% 실화일수 없다. 가공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극 중 황희 정승이 '글은 사대부의 밥'이라며 한글만 포기하면 영실이 곤장을 낮춰주겠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안여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을 가미한 거다.

- 허진호 감독과 호흡한 소감은 어떤가.

▲ 허진호 감독은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천상 한량이었을 거다.(웃음) 글 읽다가 주막집 다니고 하지 않았을까.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보면 섬세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그러니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도 그리 따뜻하게 그릴 수 있었겠지.

- 세종을 바라보는 영실의 시선에서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가 연상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절절한 감정이 느껴지던데.

▲ 장영실 입장에서 볼 때 천민인 노비 신분에서 면천 시켜주고 벼슬까지 받아 왕 옆에서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을 한없이 좋아하는 건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 항상 영실과 모든 걸 상의하고 만드신 왕이 한글에 빠지시고 영실은 강등돼 한직으로 밀려나 있지 않나. 그 때는 애기 같이 삐져 있기도 하다. 사실 궁 안에서 세종과 진지하고 거칠게 토론하는 장면도 있고 좀 더 티격태격하고 더 파격적인 궁궐에서의 생활이 있었으면 하기도 했다. 제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장면도 생각을 해봤다.

실제로는 장영실이 세종보다 7살이 많았다더라. 한석규가 후배인 것과 별개로 장영실이 세종을 생각할 때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너무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황희가 자, 모음 모형을 들이대며 '네가 만든 게 맞냐'며 목을 죄어올 때 '대신들이 세종을 더 압박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됐을 거고 이천 장군이 세종과 단둘이 만나게 해줬을 때 두 사람만의 역사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런 마음이 눈빛으로 표현된 것 같다.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왜 실록에 기록 한 줄 안남은지 몰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어떤 연유로 사라진지 모르겠지만 행복했던 사람이겠구나 생각해 본다.

- 주변 지인들 중에 세종과 장영실 같이 깊은 교감을 이루는 사람이 있나.

▲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학교 은사님이신 안민수 교수님이 그런 분이다. 동랑 유치진 선생님의 사위시기도 하다.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 4년 내내 그 분의 사랑과 가르침을 이슬 받아먹듯 받아먹었다. 선생님께 혼도 많이 나고 그 분께 배운 게 하나의 밑천이 돼 지금도 한눈 안 팔고 지금 이 길을 가고 있다. '올드보이' 상영할 때도 모셨고 '파이란' 때는 사모님과 함께 오셔서 영화를 보셨다. 그 때 기자들도 많은 자리에서 '민식이, 이리 와봐'하시더니 '이런 행사에서 옷이 그게 뭐냐'고 혼을 내셨다. 영화는 재미있게 보셨는지 어떤지 못여쭤봤다. "이런 자리에는 깔끔하고 근사하게 입고 와라"고 말씀하시고 혼만 내고 가셨다.

또 한 번은 '야, 박찬욱 감독하고 밥자리 한번 만들어라'고 하셔서 선생님이 와인을 좋아하시니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레스토랑에서 유지태, 강혜정, 박찬욱 감독과 함께 ?다. 그날 박찬욱 감독과 셰익스피어 비극이 어떻고 희랍 비극이 어떻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시더라. 영화를 잘 보신 거다. 저를 향한 애정이 있으시기에 시사회나 이런 곳에 많이 와주셨다. 지금도 많이 생각난다. 정말 돌아가시는 날까지 제자들에게 사랑을 주시고 품을 열어주셨다. 그 품이 없어지니 바람 부는 벌판에 발가벗고 내팽개쳐진 느낌이다.

- 30여년이 넘도록 오로지 배우라는 한 우물을 파왔다. 최민식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밥벌이다. 먹고 사는 일차원적 수단이 이것 밖에 없어. 다른 것을 할 줄 아는 게 없다.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가 관객이라지만 저는 대중들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제 스스로 제 행위에 뻑이 가서 이 일에 미쳐서 한다. 저는 그냥 화자다. 다만 관객들이 소통해주시면 너무 감사하다. 내가 천문의 장영실을 이렇게 표현했고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질문을 던진다. 내 이야기에 백퍼센트 동의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대중에게 잘 보이려고 한 적은 없다. 역사적 팩트를 영화화했건, 가공의 이야기이건 모든 이야기 속에서 살아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항상 배운다. 내가 죽어야만 연기라는 일이 끝나겠지만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내 스스로를 향한 하나의 몸짓이고 행위이다. 이기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거다. 재미없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고 작품이란 건 밑도 끝도 없다. 신구 선배님처럼 40~50년 연기하신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건 죽어야만 끝나는 작업이다. 그냥 딱 보니 사람과 인간에 대한 공부다. 어떨 때는 공부를 다 한 것 같은데 모르는 게 보이고 또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또 어떨 때는 '이게 뭐지' 할 때도 많다.

- 배우로서 가장 만족하는 순간과 힘든 순간은 언제인가.

▲ 보통 극장에 가면 관객들 뒤에서 영화를 본다. 그 ? 관객들만의 호흡이나 느낌이 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 가고 있을 때 만족감을 느낀다. 관객들이 휴대폰을 안보시고 중년 남자 관객 중 눈물 훔치는 분이 계신다면 '잘 보셨구나'하는 느낌이 온다. 그럴 때 말초적으로 보람을 느낀다. 힘든 것 무엇인가 하면 항상 비어 있어야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게 항상 관철되기를 바라면 안된다. 남의 것을 담아야 될 그릇을 비워놔야한다. 서로 타협점을 찾아서 만든 완성품을 볼 때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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