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인터뷰] '라오스의 박항서'된 이만수의 인생 2막 성공기,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아내"

임은빈 입력 : 2020.02.05 07:11 ㅣ 수정 : 2020.02.05 09:20

[심층 인터뷰] 이만수의 인생 2막 성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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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해 '라오스의 박항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만수 감독이 지난달 31일 인천 송도의 한 호텔에서 뉴스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임은빈 기자]

현역시절 트리플 크라운 달성한 이만수 감독, 은퇴 후 라오스에서 한국의 가치 높여

 

선교사 제인내 대표의 제안에 고민, 아내의 응원에 라오스행 선택

 

이 감독,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서 '인생 2막'의 감동 상세히 밝혀

 

[뉴스투데이=임은빈 기자] 야구에서 타자가 단일 시즌에 타율, 홈런, 타점을 모두 포함하여 3개 이상의 타이틀을 차지할 때 트리플 크라운으로 인정된다. 타율, 홈런, 타점 외 다른 공식 기록(최다안타, 출루율, 장타율, 도루, 득점)은 인정하지 않는다.

 

트리플 크라운은 150년 역사를 갖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14차례, 일본에서는 10차례만 달성됐을 만큼 어렵다. 38년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단 3차례밖에 없었다.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1984년, 삼성) 1차례, 이대호 롯데자이언츠 선수(2006년·2010년, 롯데) 2차례 달성한 바 있다. 이 감독은 포수출신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현역시절 3차례 홈런왕을 차지한 이만수 감독은 2014년 10월 SK와이번스 감독직을 내려놓으며 40년 넘게 몸담은 야구계를 떠났다. 야구에 대한 향수로 힘들던 어느 날, 라오스에서 사업하는 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SK와이번스 감독 시절 중고 야구용품을 후원해줬던 사람이다. 그 지인은 라오스에서 선교사로 활동을 하면서 현지 야구단 라오J브라더스를 운영하고 있던 제인내 대표였다.

제인내 대표는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와서 학생을 대상으로 야구를 가르쳐줄 수 없겠느냐?”고 청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라오스가 웬 말이냐 싶었으나 아내의 응원 덕분에 라오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야구 감독’, ‘야구 전도사’로 옷을 갈아입은 것. 규칙도 모르고, 장비도 없고, 야구장도 없는 곳에서 야구를 가르친다.

이만수 감독은 2016년 7월 라오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야구 활성화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불모지에 심은 ‘야구 씨앗’ 덕분에 100여 명의 라오스 아이들이 야구를 놀이 삼아 즐긴다. 초등학교 야구부 3팀이 창단됐다. '라오스의 박항서'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만수 감독은 지난달 31일 인천 송도에서 뉴스투데이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라오스에서 펼친 '인생 2막'의 성공 스토리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스토리에는 화두가 있었다. 시인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노래한 적 있다. "이 감독이 얻어낸 인생 2막의 성공을 키운 건 팔할이 아내"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였다. 다음은 이 감독과의 일문일답.

 

"SK와이번스 감독 시절, 라오스에 중고야구용품 보내"

 

"SK와이번스 유니폼 입은 라오스 친구들 사진 보고 벅찬 감동 느껴"

 

Q. 인생 2막을 라오스에서 보내시는데 성공했다고 보는가요?

 

A. "제가 라오스에 들어간지가 벌써 6년째 되었습니다. 성공했냐? 물어보면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성공하고는 거리가 멀고 라오스는 야구 불모지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다보닌까 아직까지 해야 될 일이 많이 있어요. 거의 야구장은 다 지어져가지고 선수들이 야구장에서 훈련은 하지만 그전에는 지난 5년 동안은 축구장을 빌려가지고 야구 훈련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야구장을 짓다 보닌까 주위환경도 그렇고 해나가야 될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라오스는 아직까지 진행형입니다."

 

▲ 라오스 야구협회 캄파이 회장과 함께. [사진=이만수 감독]

Q. 라오스라는 외국에 처음 갔을 때 어려움과 극복방법은?

A. 라오스라는 나라가 처음에는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왜냐하면 듣도 보지도 못한 이름이라. 2013년도에 SK와이번스 감독 2년차일 때 11월달에 제인내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시간이 되면 라오스로 건너와서 재능기부 좀 해달라고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프로야구 감독을 하던 시절이라 시간이 없고 해서 거절을 했는데 직설적으로 거절을 하게되면 낙심 할 것 같아서 둘러서 “제가 시간이 되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순수하게 100% 그대로 받아들여가지고 일주일에 2~3번씩 전화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로서 했던 말도 있고 해서 2014년 초에 당시 SK와이번스 감독 시절 구단 매니저에게 부탁을 해서 못 입는 유니폼부터 해서 운동화, 가방, 야구방망이, 모자, 헬멧 다 수거해서 사람 키 만한 박스 5개를 컨테이너에 실어가지고 라오스로 보냈습니다.

 

배를 통해 보내야 되기 때문에 2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2달 후에 라오스 현지에서 SK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라오스 친구들의 사진을 보내왔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개인적으로 도구도 사서 보내주고 1000만원의 후원금도 보내주고 하면서 계속 운동을 할 수 있게끔 지원해주면서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 라오스 야구센터에서 선수들과 함께. [사진=이만수 감독]

2014년 10월말에 SK와이번스에서 3년을 채우고 퇴임을 하게 되었는데 좋게 말하면 퇴임이고 안 좋은 말로 하면 짤렸습니다. 더 연장을 못 하니까. 그런데 우리나라가 프로야구 팬들이 많고 IT강국이다 보니까 감독 하면서 악플이 너무 많이 들어오는 겁니다.

 

상처받은 시절에 '라오스 재능기부' 약속 일깨워준 아내

 

빵과 물을 약속하고 선발한 40명이 라오스 최초의 국가대표 야구선수

그래서 아내하고 아들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아내를 위해서 동유럽에 보름동안 비행기표하고 호텔을 예약해놓고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깜짝 이벤트를 하기 위해 준비해뒀는데 아내가 갑자기 "당신 왜 약속을 안 지켜요?"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약속?"이냐고 물어보니 "당신 프로야구 감독할 때 감독끝나면 라오스라는데 가서 재능기부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냐?"라고 묻는 겁니다. 늘 언론에다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왜 라오스안가고 이렇게 지금 괴로워하고 있냐?" 그래서 동유럽행 비행기표하고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열흘만에 라오스를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라오스에 갔을 때 제가 어렸을 때보다 더 못 사는 모습을 보고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수도 비엔티안에는 건물도 제대로 없고 지붕도 쓰레트로 되어 있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첫 날 야구를 한다고 모인 선수가 11명 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 5명은 맨발로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직접 학교에다 플랭카드를 걸고 모집을 했습니다. 라오스는 석회질이 많아 물을 제대로 못 마시는데 빵하고 물을 준다고 하니 무려 500명이 왔습니다. 그래서 테스트를 해서 운동장 5바퀴, 3바퀴, 100M 달리기, 50M 달리기 마지막으로 캐치볼을 통해 추려냈습니다. 최종 남은 선수가 40명이 되었습니다. 그 40명이 라오스 최초의 국가대표 야구선수들입니다.

 

▲ 라오스 여자 야구선수들. [사진=이만수 감독]

힘겹게 세운 '헐크파운데이션'의 교훈, "진심은 통한다"

제가 1년동안 라오스에서 생활하면서 라오스 친구들이 학교가고 먹고 자는게 안되어서 자비로 봉사를 하다보니 아내한테도 미안하고 해서 2016년 5월에 '헐크파운데이션'이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구고등학교 권영진 감독을 비롯해, 코이카 단체를 통해 박종철 감독을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 한국을 나와서 전국을 다니면서 기부금을 받으러 다녔는데 야구 유니폼을 벗고 처음 사회생활을 할 때 인데 제일 처음 배웠던 게 '거절'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현역시절 유니폼 입을 때만 해도 하늘에 별까지 따다줄 것처럼 했던 사람들이 유니폼을 딱 벗으니까 진짜 냉정해지더라고요. 직장다니던 사람들도 직장생활 끝나면 모든 게 다 잘될 줄 아는데 착각입니다. 직장생활 할 때가 제일 좋은 때 인 것 입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보이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니냐?"하는 따가운 시선들도 있었지만 한 달, 두 달, 세 달, 다섯 달 하닌까 진정성을 알고 그때부터 만원, 십만원, 백만원, 천만원 기부금을 보내주는 겁니다. 이런 부분들이 마중물이 되어 재단도 설립하게 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아내의 조언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돼

 

라오스 어린 친구들이 끌어안을 때 가장 행복

Q. 아내 분의 도움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는지요?

A. 2014년 10월 말에 감독생활 끝나니까 집하고 차하고 다 구단에 반납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 기죽기 말라고 차를 저도 모르게 BMW5시리즈를 주문해 놓은 겁니다. 저는 부담없이 소나타 하나만 있어도 괜찮았는데 말이죠. 그런데 BMW5시리즈를 타고 전국에 재능기부 하러 다닌다고 1년에 6만km씩 타고 다니다 보니 2년 반 지나고 트랜스 픽션이 고장이 났어요. 수리비가 소나타 한 대 맞 먹는 1300만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 아내는 "당신이 50년 동안 야구 때문에 받은 사랑이 정말 많다"고 하며, "50년 동안 받기만 했으닌까 이제는 나눠주세요"라고 하며 마음 껏 재능기부 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고 있습니다. 아내의 헌신이 없었으면 지금의 이만수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거에요. 사람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월급을 받다가 안 하면 아내가 불안해 하고 그럴 수 있는데 제 아내는 저에게 그런 말을 한 번도 한적이 없습니다.

 

Q. 인생에서 아내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정리해주신다면.

A. 제 아내가 늘 이야기 하는 것이 "이제 나이도 들고 하닌까 이제는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무작정 야구만 하는게 아니라 정말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 입니다. 그 의미있는 삶이 바로 라오스입니다.

 

진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내의 이 한마디가 제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아내의 이 한마디가 없었으면 저는 제 인생에서 터닝포인트를 못 찾았을 거에요. 지금도 야구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위만 맴 돌았을거에요. 그런데 아내의 한마디가 진짜 야구의 불모지인 라오스로 건너가서 제 인생이 바뀐 것 입니다.

 

누군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였냐?"고 물으면 저는 야구 50년 하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 현장에서 떠나 라오스 친구들을 도와준 지난 5년이 제일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오스 어린 친구들이 저를 딱 끌어안으면서 '아짱(선생님이라는 뜻)'이라고 부를 때에는 세상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라가는 기분입니다. 정말 행복한 순간입니다.

 

현역시절 어린 아들과의 소통 부족 깨닫고 충격받아

 

인종차별받던 미국 시절에 오히려 단단한 가족애 회복

Q. 자녀관계는 어떤가? 자녀들은 아버지의 인생 2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A. 현역시절 때 저는 진짜 가정남인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주위에 있는 선배나 지도자들이 이만수하면은 집, 교회, 야구장 3박자가 갖춰져 있는 사람이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 서른중반 쯤 되었을 때 선수로서는 고참시절인데 첫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때 "아빠랑 이야기 하자"고 하닌까 저한테 다가오지를 않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내한테 "여보 쟤 왜 그래?"하고 물어보니, 아내가 "당신 쟤 지금 고민 있는거 아세요?", "큰 애 학교 성적은 어떻고 친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라고 묻는데 제대로 한번 안아준 적도 없는 거에요. 그제서야 "나는 늘 가정남이고 좋은 아빠인줄 알았는데" 아내가 그렇게 말할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현역시절 한 38살 때쯤 '아버지 학교'에 공부하러 갔어요. 현역시절에 아버지 학교에 왜 갔냐하면 야구만 할 줄 알지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등록을 해놨더라고요. 아버지학교도 가고 부부세미나도 다녀왔습니다. 아들하고 관계가 언제 회복되었느냐 하면 미국에서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들어가서 1999년도 2년차때 시카고화이트삭스 트리플A 타격코치로 일하는데 당시 같은 소속 팀에 게리우드라는 타격코치가 있었는데 하루가 멀다시피 저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겁니다. 한국에서 홈런왕이었다고 하는데 이력서도 화려하고 해서 자기 밥그릇 뺏길가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늘냄새, 김치냄새 난다고 하고 너무 인종차별을 심하게 당해서 미국에 혼자 있기가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미국으로 오게했습니다.

 

당시 1999년도에 저희 팀인 시카고화이트삭스 트리플A 팀이 우승을 하게 되어서 저는 같은 팀의 메이저리그 코치로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가족들이 1년만 있다가 한국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제가 메이저리그 정식 코치가 되고 나니 미국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것 입니다.

 

시카고에서 생활하면서 우리 가족 전부 당시에는 영어도 못 하고 하니 가족들이 똘똘 뭉치게 되었고 그렇게 딱 3년을 지내고 나니 그동안 서먹서먹 했던 아이들과의 관계도 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미국가서 고생은 많이 했지만 그 고생이 우리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했어요. 시카고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데 주택 뒷 마당에 가서 아이들하고 뛰어 놀고 레슬링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하면서 굉장히 가까워졌습니다. 시카고에서의 시간이 아빠로서 제 인생을 많이 바꿔놨어요.

 

"아들들에게도 사랑을 나누는 봉사를 강조"

아들들이 처음에는 라오스에 가는 것을 반대했어요. 재능기부 하는 거 잠깐만 하고 오시라고 하면서 "아빠 건강도 챙기고 하셔야지요"하면서 처음에는 반대를 했는데, 제가 가족회의를 열고 "아빠가 이제 라오스로 가서 50년 동안 받은 사랑을 나눠줘야 된다. 그게 이 세상 살아가는데 기본이다."라고 하며 설득을 했습니다.

 

제가 현장에 감독직으로 가거나 라오스를 떠나게 되면 라오스는 누가 맡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들한테 말로 이렇게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 자식들이 잘 따라오지를 않습니다. 부모로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겠다는 마음에 사회봉사도 하고 라오스에 가서 선교도 하고 하는 것은 의미있는 삶의 실천인 셈입니다. 저는 자식들한테 "아빠죽고 나면 너희들이 아빠 뒤를 이어 봉사해라. 봉사는 돈으로 하는게 아니다"고 조언을 해주고는 합니다.

"인생 2막은 60부터 80까지 20년 간 라오스 프로젝트"

라오스에 야구장 4개 짓고 세계대회 개최하는 게 목표

 

Q. 인생을 야구 한경기에 비유했을때 현재 몇 회쯤 왔다고 보시는지요?

A. 인생 2막은 연장전입니다. 선수시절을 6회까지 본다면 나머지 지도자 생활은 7~9회입니다. 현장에 나와서 라오스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생 2막은 연장전 10회에 들어선 것입니다.

 

Q. 인생 2막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A. 제 인생에서 10년을 주기로 한 3번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처음 10년은 야구시작 할 때 10년을 내다보고 꿈을 키웠고요. 제가 중학교 1학년때 처음 야구 시작해서 당시 10년 뒤에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어야 겠다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3년만에 다 이루어졌어요.

 

두 번째 10년은 삼성라이온즈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나와서 미국에 갔었을 때 앞으로 10년 안에 5년은 마이너리그 코치를 하고 6년째 부터 나머지 5년은 메이저리그 코치 하겠다 이게 제 두번째 10년의 목표이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2년 만에 메이저리그 코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미국에서 10년을 채우고 왔어요.

 

세 번째 10년목표는 10년 만에 한국에 오면서 미국에서 배웠던 선진야구를 한국 후배들한테 도입시켜 가르쳐줘야 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당시 까지만해도 저처럼 철저하게 배우면서 선진야구를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으닌까. 그런데 SK감독직까지 9년을 했더라고요. 1년을 못 채웠지만 아직까지 진행형입니다. 이 3번이 30년입니다.

 

마지막 20은 제 인생 마지막 20년 프로젝트인데요. 제가 이제 60이닌까 20년이 지나면 80세에 접어듭니다. 80세까지 라오스에 야구장을 4개 짓고 거기서 시게임(라오스,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끼리만 펼치는 종합 체육대회) 야구대회를 하나 열고, 아시아대회를 한번 열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라오스에서 세계대회를 여는 것이 제 마지막 20년 프로젝트 입니다. 그래서 벌써 야구장 한 곳은 완공을 했습니다.

 

▲ 라오스에 완공한 첫번째 야구장. [사진=이만수 감독]

라오스 정부 상대로 스포츠 부국론 설명하고 야구장 부지 받아

 

대구은행 김태오 회장의 3억원 기부가 마중물 역할

라오스는 인구는 700만 밖에 안 되는데, 땅넓이는 우리나라 남북 합쳐서 1.2배입니다. 그런데 그 넓은 땅덩어리에 야구장이 없으니 축구장에서만 연습을 하닌까 아이들은 야구규칙도 잘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라오스 정부에 찾아가서 장관들을 앉혀놓고 야구장이 왜 필요하며, 스포츠를 통해 나라가 어떻게 부강해지는지 등을 서류를 50장 넘게 준비해가서 영어와 라오스 언어로 설명을 해줬어요.

 

야구도면도 다 준비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해주닌까 라오스 장관이 땅을 7만평 준다고 하는 거에요. 야구장을 지을려면 2만평만 있으면 충분한데 말이죠.

2만천평을 확보한 뒤 야구장 한 개당 4천평이면 지을 수 있는데 미국캠프처럼 한 가운데 기둥을 세워 4개를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라오스에 가면 멋진 스타디움이 있는데 바로 옆에 노른자자리에 야구장 부지가 있습니다.

 

야구장 한 개를 지으려면 7억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한데 다행히 첫 야구장은 대구은행 김태오 회장께서 라오스에 봉사하러 오셨다가 3억을 흔쾌히 기부해주셔서 그 3억 원이 마중물이 되어 첫 번째 야구장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역경은 나의 힘, 더 큰 시련을 이겨갈 원동력 돼

Q. 보통사람 독자들을 위해 인생 2막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하고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에 대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A. 저는 야구만 50년 했어요. 50년 동안 야구만 하다보닌까 야구 현장에서 떠나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젊었을 때 어려움이 제 인생에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가 삼성라이온즈에서 16년 동안 생활하면서 40살에 방출당했어요. 당시에는 진짜 쓰라린 마음, 괴로움, 멸시감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데 그때 방황도 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도망 가다시피 했는데 그때 경험이 저한테는 많은 힘이 됐어요. 우리가 파도가 한번 밀려오면 배들이 무서워해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그 파도가 한번 밀려올 때 사람은 면역력이 생기는 겁니다. 면역력이 생기면 다음에 더 큰 파도가 밀려오더라도 그거에 대처할 능력이 생겨요. 그래서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과 역경이 올 때, 그 상황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인생 살아가는데 바이러스를 잡아먹을 수 있는 면역력이 생겨 두려움이 없습니다.

 

▲ [사진=임은빈 기자]

처음에 라오스에 갈때에도 눈 앞이 캄캄하고 앞이 안보였지만 가서 도전해보고 부딪쳐보니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도전의식이 생겼습니다.

 

"영원한 직업은 없다, 현역 때 다음을 준비하라"

 

"야구관련 직업도 22가지, 그라운드 키퍼는 고연봉"

이만수 감독: "야구로 할 수 있는 직업이 몇 가지 인 줄 아세요?"

기자: "감독, 코치, 선수, 해설...정도 되지 않을까요?"

이만수 감독: "야구로 할 수 있는 직업이 22가지 입니다."

미국에서 그라운드 키퍼(클리닝 타임때 잔디를 관리하는 사람)는 코치보다 월급이 많아요. 제가 시카고화이트삭스에 있을 때 그라운드 키퍼가 3대째이었어요. 할아버지 시절부터 대를 이어오면서 그라운드 상태나 잔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공부를 많이 해야 관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독자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항상 준비해 있어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선수시절때 영원히 선수생활 하는 줄 알았어요.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래에 무엇을 할지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야구도 22가지나 되는 일을 할 수 있는데 다른 분야의 직업을 가지신 분들은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했으니 할 일이 더 많지 않겠어요? 항상 공부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필립 질레트가 한국에 야구 보급, 라오스의 필립 질레트 되는 게 마지막 과제

Q. 인생 3막을 염두에 두고 있으신지요? 그 여부와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신다면.

A. 저는 라오스에 주춧돌만 놓고 갈 뿐이다.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은 뒤에 있는 후배들이 이루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1904년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YMCA를 통해서 처음 야구를 보급했을 때 대한민국이 100년 뒤에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세계정상에 올라설 지 상상은 했겠어요?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아니었으면 저는 야구선수가 될 수도 없었을 거에요. 마찬가지로 저도 라오스에 가서 야구를 알리고 전파하는 것은 지금 아이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흘러 라오스의 필립 질레트 선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 인생 마지막 도전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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