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관광재단과 함께하는 서울이야기 (4) 소설 속 서울
해방촌 108계단 오르며 힘겨운 '빈민의 삶' 어루만지다
격동의 근대사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한 서울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를 배경으로 근현대 작가들은 변화하는 서울의 풍경 속에서 시대를 반영한 작품을 많이 썼다. 서울을 무대로 굴곡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 속 풍경을 따라 여행을 떠나보자.
박태원의 <천변풍경> 속 청계천
천변풍경 여행은 박태원 생가터인 중구에 있는 현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에서 시작한다. 건물 앞을 흐르는 청계천은 예전에 빨래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간간이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소설 속 청계천 빨래터는 동네 아낙네들이 풀어내는 수다로 이웃들의 사는 이야기가 낱낱이 그려지는 공간이다.
이발소 소년이 묘사한 종로구 관철동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미관터가 나온다. 우미관은 종각 근처에 있던 영화관으로 1910년도에는 ‘고등연예관’이었다가 1915년 우미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단성사, 조선극장과 더불어 사랑받았던 우미관은 당시 2층 벽돌 건물에 1000여 명이 관람할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됐다. 하지만 항상 그 배가 넘는 관람객이 들어차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이름난 명소였다. 지금은 종로2가 패스트푸드 점포 앞에 ‘우미관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시골에서 올라와 청계천변 한약국에서 일하게 된 어리고 순진했던 열네 살 소년 창수가 서울에 온 지 반년도 채 안 돼 도회에 감화된다. 그중에서도 우미관에서 영화를 본 것이 감명 깊었던 듯 소설에 자세하게 묘사된다.
“참, 나, 어젯밤에 야시에 갔다가 그길루 우미관엘 들어갔지. 야, 아주 신나더라. 후도 깁손(Hoot Gibson, 미국 할리우드 서부영화 인기 배우)이 악한들을 막 집어치는데…. 어떻든 활극은 지일이야 지일.”
청계천변을 따라 걷다 보면 고층빌딩 앞에 베를린광장이 나온다. 아담한 광장에 서 있는 콘크리트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세운 베를린 장벽 일부다. 1989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철거한 장벽을 베를린시 마르찬 휴양공원에 전시해 놨는데, 그 일부를 청계천을 복원할 때 서울시가 기증받았다. 작은 광장에는 장벽과 함께 베를린시의 상징인 곰 상과 100여 년 전에 만든 독일 전통 가로등을 옮겨와 벤치와 함께 설치했다.
베를린광장을 지나면 천변풍경에 자주 등장하는 수표교가 나온다. 1441년(세종 23),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청계천 수위를 측정해 홍수에 대비했다.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다가 이후 수표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범선의 <오발탄> 속 해방촌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은 전쟁 중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와 해방촌에 정착한 한 가족의 삶을 다뤘다. 소설에서 해방촌의 모습은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들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곳이었다.
<오발탄> 속 해방촌 여행은 보성여자중·고에서 출발한다. 보성여중·고는 1907년 평안북도 선천에 미국인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수교 보성여학교’로 설립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1950년 서울로 이전해 보성여자중·고로 다시 개교했으며, 1955년 월남한 선천 사람들이 학교를 해방촌으로 이전했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해방촌 성당은 6·25전쟁이 끝나고 해방촌으로 이주한 사람 중에 천주교 신자가 늘자 천주교 본당 설립이 추진돼 1955년 완공됐다. 성당에서 조금 더 걷다 보면 교회가 나온다. 해방예배당은 해방촌에서 가장 높이 솟은 고풍스러운 건물로 1950년대에 설립됐다. 교회를 지나 해방촌오거리로 나오면 소설 속 풍경처럼 오거리로 이어진 비탈 골목에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다. 지금도 산동네 같은 풍경이지만 소설 속 모습은 신산하기 그지없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시장을 나와 미로 같은 골목에 들어서니 하늘까지 오를 듯 끝이 보이지 않는 108계단이 있다. 아득한 계단을 어떻게 올라갈까 하는 고민도 잠시, 계단 한가운데에 승강기가 운행되고 있었다. 108계단 경사형 승강기는 서울시 주택가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층이 나뉘어 계단 중간쯤에서 내릴 수도 있다.
빨강, 파랑, 흰색 삼색등이 돌아가는 이발소가 눈에 많이 띄는 동네, 좁은 골목 전봇대 전깃줄이 엉켜 하늘을 가르는 동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네, 해방촌에서 내려다본 노을 젖은 서울은 아름다웠다.
글·사진=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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