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한국영화의 산실’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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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소유한 유일한 극장 / 1919년 ‘의리적 구토’ 첫 상연 / 겨울여자·장군의 아들·서편제… / 韓 영화 역사 온몸으로 오롯이

일제강점기 서울은 청계천을 경계로 조선인이 사는 북촌과 일본인 거주지 남촌으로 나뉘어 있었고, 극장가 역시 이에 따라 구분되어 형성됐다. 조선인 극장들은 전통 상권인 종로통에, 일본인 극장들은 충무로 본정(本町)의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첫 영화상설관은 1910년 황금정 2정목(을지로)에 들어선 경성고등연예관이다. 600석 규모였다. 이후 다이쇼칸, 고가네칸, 유라쿠칸이 세워졌다. 북촌에는 우미관(1912)이 영화상설관으로 처음 등장했다. 1907년 복합연희장으로 설립된 단성사가 1918년 영화관으로 재개관했고, 1922년 조선극장이 문을 열면서 3대 각축전을 벌인다.
김신성 문화체육부장
단성사는 조선인이 소유한 유일한 극장이었다. 경성의 실업가 지면근·주수영·박태일이 ‘힘을 모아 뜻을 이루자’는 이념으로 설립한 것이 ‘단성사(團成社)’다. 1914년 수용 인원 1000명의 대형극장으로 신축했으나 1년 만에 화재로 소실된 후 1917년 고가네유엔(黃金遊園)의 소유자 다무라 기지로가 인수했다. 조선인 흥행사 박승필은 다무라로부터 운영권을 넘겨받아 이듬해 12월 단성사를 다시 열고 일인들 틈바구니에서도 ‘흥행계의 용장’으로 불리며 조선영화계를 구축해 나간다.

단성사는 마침내 1919년 10월27일 ‘최초의 한국영화’로 평가받는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처음 상연했다. 이날을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잡는다. 이어 순수 조선 자본과 제작진만으로 만든 ‘장화홍련전’(1924)을 선보였다. 그리고 나운규의 민족영화 ‘아리랑’을 개봉하면서 단성사는 ‘한국영화의 산실’로 자리매김한다. 1926년 10월1일 조선총독부 낙성식이 열리던 날, 단성사는 ‘아리랑’을 내걸었다. 일제가 식민통치의 본산을 만들고 잔치를 벌일 때 단성사에 모인 조선인들은 나운규의 영화를 보면서 망국한을 달랬다. ‘아리랑’은 지금도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줄 만한 명작이다. 신파물이 전부였던 당시 농촌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아리랑’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특히 주인공이 일본 순사 앞잡이를 죽이는 환상과 현실의 교차 장면은 압권이다.

그러나 단성사는 이후로도 일제의 견제와 경영난 속에 소유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가 대륙극장으로 이름이 바뀌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 이름을 되찾고 6·25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단성사는 주로 외화를 상영하면서 명맥을 이어오다 1977년 ‘겨울여자’의 대흥행을 통해 한국영화 명문 개봉관의 위상을 회복한다. 이후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맞았다. 추석특선으로 개봉한 ‘겨울여자’는 이화(장미희)의 순수하면서도 퇴폐적인, 애틋하면서도 파격적인 캐릭터가 군사정권 억압하의 사회상과 대비되어 호응을 얻었다. 단성사에서만 58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대기록은 13년 후 ‘장군의 아들’(68만)에 가서야 깨졌다. ‘서편제’는 6개월 동안 장사진을 친 관객들 덕에 개봉관 한 곳에서만 100만명을 돌파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단성사를 대표하는 영화로 남았다. 긴 상영기간 탓에 간판 색이 바래 한 번 더 제작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리면서 단관 개봉관을 찾는 관객이 급속히 줄어들자, 단성사는 2005년 늦게라도 복합상영관으로 탈바꿈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경영 악화와 부도가 반복되면서 리모델링 공사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채 방치되는 아픔을 맛본다. 2015년 영안모자 계열의 자일개발이 건물을 인수한 뒤 영화 포스터와 시나리오, 스틸사진, 관련 장비 등 8만2400여점의 전시품을 모아 ‘단성사영화역사관’을 조성해, 한국영화 100주년 ‘영화의 날’에 맞춰 역사교육현장으로 재개관했다. 금싸라기 땅에 박물관을 마련한 셈이니 고마운 일이다. 비록 영화 상영은 멈춘 상태이지만 한국영화 역사를 온몸으로 품고 있는 만큼 단성사가 한국영화의 새 100년도 당당하게 살아내며 그 자리를 지켜가기 바란다.

김신성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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