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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중근의사유묵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이것은진품인가요?아닌가요?
현제동국대에보관중인것이있던데
그게진품인가요?
아버님께서50여년전에
많이도와주셨던분이..
감사의뜻으로..
주실게이것밖에없다며
주셨다는데..
여기저기검색해보니..
아무래도진품은아닌것같아서..
그래서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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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alta****
작성일2014.03.13 조회수 4,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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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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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석재의 新천장지구

     

    "안중근이토를 쏘지 않았다"

     서 나온 황당한 음모론,?

  • 유석재
    문화부 기자
    E-mail : karma@chosun.com
    서울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3학년 때 계몽사 ‘한국사 이야기’를 ..
    서울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3학년 때 계몽사 ‘한국사 이야기’를 읽고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
    IMF를 맞아 언론사 두 곳을 포함한 직장 세 곳을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
    사회부,
    경기취재본부,
    문화부,
    기획취재부,
    사회정책부,
    오피니언부를 거치며 학술과 문화재·교육 분야를 취재.
    2000년대 초 조선일보 기자클럽 ‘유석재의 천장지구’를 운영했고,
    2000년대 중반 ‘DVD 2.0’에서 AV칼럼니스트로 활동.
    2008년 조선일보에 ‘건국 60년 60대 사건’을 연재.
    2009~2011년 조선일보 ‘Why’ 섹션에 ‘유석재의 新역사속의Why’
    ‘유석재의 타임머신’ 연재. 문화부 기자로서 동북공정과 독도 등 역사 문제에 대해 추적했으며,
    ‘난중일기 빠진 32일치 찾아’ ‘독도를 자기 영토에서 제외한 日 법령 발견’ ‘일본, 임나일본부설 포기’
    ‘인혁당, 실체 있는 조직이었다’ 등의 특종 보도.
    독도아카데미 강사로 활동.
    고려대 사학과 / 동 대학원(석사) 졸업
    독도아카데미 강사 활동
입력 : 2013.12.03 05:30
 
<‘유석재의 新천장지구’는 오래된 고전(古典)의 책갈피 속에서
디지털이 지배하는 21세기의 삶에도 여전히 유효한 ‘물통속의 물 한방울’을 찾는 시리즈입니다.>

何故世態如是不公耶? 嗚乎! 强奪隣邦, 殘害人命者, 如此欣躍, 少無忌憚, 無故仁弱之人種, 反如是陷困耶?
(하고세태여시불공야? 오호! 강탈인방, 잔해인명자, 여차흔약, 소무기탄, 무고인약지인종, 반여시함곤야?)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데,
죄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를 하루 앞둔 2010년 3월2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안중근 특별전에서 한 시민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주완중 기자
‘진짜 저격자’는 안중근이 아니었다?
“그 얘기 들은 적 있나?
안중근(安重根)이 쏜 게 아니라는데?”
한 유명 대학의 법대 교수는 몇 년 전 사석에서 대단히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한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제3의 인물’이었다는 얘깁니다.
이토가 맞은 총탄은 역사 2층에 숨어 있던 한 저격수가 쏜 것인데 일본이 이를 숨기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는 얼마 전에 일본에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그저 해괴한 음모론일까?
그런 얘기가 왜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은폐되고 있는 것일까?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나중에 찾아 보니 이 이야기는 일본판 ‘위키피디아’
안중근 항목에도 버젓이 실려 있었습니다.
‘음모설’이란 소제목으로 말입니다.

'음모설'이란 소제목으로 안중근 의사의 '
인신공양설'을 소개한 일본 위키피디아의 '안중근' 항목.
인신어공(人身御供),
그러니까 ‘
인신공양’이란 말인데,
안중근 의사가 누군가 ‘
실제 거사를 일으킨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몸을 던져 저격자로 가장하고 희생됐다는 논리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저는 뤼순(旅順) 법정의 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을 등
지금까지의 자료를 근거로 그날의 상황을 복기해 봤습니다.

8연발 권총으로 모두 7발을 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 지니고 간 권총으로 모두 일곱 발을 쐈습니다.
권총은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8연발이었습니다.
웃지못할 일은 국내에 출간된 숱한 안중근 관련 서적에서 “
안중근 의사는 모두 여섯 발을 쐈다”고 돼 있다는 점입니다.
일부 관련 학자들에게 물어보니 “
여섯 발 아니냐?”
“여섯 발인지 일곱 발인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분명히 모를 수가 있느냐’
‘학자들이 신문사 수습기자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권총과 같은 모델인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이 총은 보통 ‘7연발’로 알려져 있습니다.
탄창에 탄환 일곱 발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약실 안에 한 발을 더 장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8연발’이었던 것입니다.

브라우닝 M1900 권총의 내부 구조.
 탄창에 탄환 7발을 넣을 수 있지만
 약실에 한 발을 더 끼울 수 있기 때문에 8연발이 된다.
안중근 의사는 이 총을 품고 하얼빈역으로 가기 전에 총에 여덟 발을 모두 채웠습니다.
여기서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여서
총탄에 일부러 십자(+)를 새겼다는 얘기가 오랫동안 통설처럼 자리잡았고,
최근에는 ‘
총탄이 명중했을 때 회전하면서 살을 파고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랬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 기록을 보면 ‘
총탄 완제품이 이미 그렇게 돼 있었다’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 검사가 안중근의 동지 우덕순(禹德淳)에게 “
총알의 십자 모양은 원래 그런 것이냐,
안중근이 일부러 만든 것이냐”고 여러 번 묻습니다.
그러자 우덕순은 “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흔히 파는 것이며,
블라디보스톡에서 구했다”고 답변합니다.

총탄에 십자 표시가 돼 있었던 것은 맞지만,
안 의사가 ‘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일본은 ‘
안중근이 이토 공을 잔인하게 살해하기 위해 일부러 총탄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진술을 끌어내려 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한일관계와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崔書勉·85)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지적입니다.
최 원장의 말은 조금 뒤에 다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월 26일 아침,
만 30세의 안중근 의사는 지금의 하얼빈역 북쪽 썬린가(森林街) 34호에 있던
동포 김성백(金成白)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저로 하여금 2000만 동포의 원수를 처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검은색 모직 신사복 위에 반코트를 걸치고 납작한 모자를 쓴
안 의사는 브라우닝 8연발 권총을 꺼내 손수건을 닦은 뒤 오른쪽 속주머니에 넣습니다.
1907년 조선통감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우리에게 알려진 사진은 대부분 이렇게 '
흰 수염의 노인'의 이미지다. /조선일보 DB
이토에게 쏜 네 발 중 한 발은 빗나가
오전 7시,
안중근은 마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합니다.
러시아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선 가운데 일본인 환영객 사이에 끼여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플랫폼이 잘 보이는 역 구내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켜 마셨습니다.
 
오전 9시,
초록색 특별귀빈열차가 서서히 하얼빈역으로 진입했습니다.
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그 열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플랫폼에 서 있던 일본인 환영단이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반자이(만세)!”
“반자이!”
러시아 의장대가 ‘받들어 총’으로 경례를 했고,
장중한 군악이 연주됐습니다.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가 열차로 올라가 이토를 맞았습니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가 찾아낸 젊은 시절
사무라이풍의 이토 히로부미.
이 사진이야말로 이토라는 인물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는 평이 있다.
9시 30분,
이토가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각국 사절과 인사를 나눈 이토는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기 시작합니다.

열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모자를 벗는 인물). /조선일보 DB
이토가 열차 쪽으로 되돌아올 때,
안중근은 찻집을 뛰쳐나와 플랫폼으로 나섭니다.
러시아 의장대 뒤로 바싹 붙어 선 안중근의 눈앞으로 이토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
이토가 안중근의 눈앞을 약간 지나쳤을 때,
두 사람의 거리는 10보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사이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이토에게 네 발을 쐈습니다.

이 네 발 중에서 세 발은 명중했지만,
안중근은 권총에 남아 있던 나머지 다섯 발을 다 쏘려 했습니다.
안중근은 옥중 집필한 자서전 ‘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에서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수염이 흰 조그만 노인을 이토라고 판단해 단총을 뽑아들고 4발을 쏜 뒤,
잘못 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젓해 보이는 다른 자에게 3발을 더 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플랫폼.
의거 현장임을 알리는 알림판은 전혀 없고 아무런 설명 없이 바닥에 타일 표시만 돼있다.
왼쪽 하단의 삼각형(▷)타일로 표시된 곳이 안중근 의사가 총을쏜 지점이고,
역무원이 서있는 곳 바로 앞 마름모(◇) 타일로 표시해 놓은 지점이
이토 히로부미의 피격 장소다.
두 지점의 거리는 약 6m다. /안용현 기자
총알8탄 중에서 모두7탄이 발사된 것입니다.
이토에게 쏜 4발 중에서 빗나간1발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토 바로 옆에 있던 일본의 주(駐)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습니다.

이어서 쏜 세 발은
①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의 왼쪽 허리를 관통해 배에 박혔고
②만철(滿鐵)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의 왼쪽 다리를 맞췄으며
③나머지 한 발은 옷감 털이 십자 홈에 낀 채 플랫폼에서 발견됐습니다.
검찰관은 이 탄환이 만철 총재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의 외투와 바지를 뚫고→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의 바지를 관통해서 플랫폼에 떨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사형 판결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압수한 탄피 일곱 개로 미뤄 볼 때 피고가 발사한 탄환의 수는 일곱 발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Jasal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마지막 한 발은 어떻게 됐을까요.
권총 총신이 화약 연기로 검게 그을린 가운데 총구 안에 장전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혹시 자결하려고 한 발을 남겨놓은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 부분이고,
법정에서도 실제로 그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Jasal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얼빈역 의거 직후 체포돼 끌려가는 안중근 의사. /KBS화면 캡처
그렇다면 마지막 제8탄을 남긴 이유는
주변의 러시아 병사들로부터 제압당했기 때문에 미처 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제7발이 유일하게 누구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플랫폼으로 떨어진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7발을 쏠 때 이미 제압당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공판 기록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자료에서 명백히 드러난 저격 사건의 전말입니다.

‘무로다 옹의 이야기’라는 괴서(怪書) 한 권
자,
그런데.
안중근이 아닌 ‘
제3자’가 쏜 총에 이토가 맞았다고요?
이게 도대체 무슨 얘깁니까?
2009년 10월,
안중근 의거 100주년이 될 무렵 저는 이 문제를 문의하기 위해 서울 신문로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며칠 전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곤란한데…
지금 도서관에서 연구중이라서 말이야.”

2010년 5월 19일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의 제1차 회의의 참석자들.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는 인물이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최순호 기자
단언컨대,
제가 학술 담당 기자를 한 지 10년이 됐지만,
“지금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기 때문에 통화를 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이 분 밖에는 없었습니다.

최서면.
사실은 이 분 자체가 연구대상입니다.
해방 공간 연희전문대 시절 백범 김구 밑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장덕수 암살 사건에 연루돼
194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6·25 전쟁 도중 석방된 뒤 1957년 도일합니다.
일본의 유력 정관계 인사와 인맥을 맺고 한·일 외교사의 이면에서 막후 활동을 합니다.
1950년대 후반 청년 정치 지망생 김대중씨를 장면 부통령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고 알려져 있고, 제3공화국 때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외교적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한·일 근대사 연구에 파고들어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고,
1978년에는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는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북관대첩비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우리 정부가 돌려받았다가2006년 북송함).

최 원장을 만나자마자 그 얘기를 물어봤습니다.
“제3자 저격설…
그게 어떻게 된 얘깁니까?
공판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던데요.”

그는 “
허허…”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그래도 내가 그 얘기를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잘 찾아왔군.”

“그게 언제 어디서 나온 얘깁니까?”

“진원지는 1942년에 나온 책 한 권입니다.
” 그는 서가를 뒤지더니 책 한 권을 꺼냈습니다.
책 표지에는 ‘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室田義文翁譚)’란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발행처는 조요메이지(常陽明治) 기념회 도쿄(東京)지부.
“무로다…
요시아야라고요?”
무로다 요시아야.
안중근 의거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이었다.
무로다 요시아야.
안중근 의거 때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쏜 일곱 번째 탄환이 입고 있던 바지를
아슬아슬하게 관통하는 바람에 화를 면한 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
그가 1942년까지 살아서 그 증언을 한 겁니까?”

“아니죠.
무로다는 1847년에 태어나서 1938년에 죽었습니다.
무로다가 직접 쓴 책이 아니라,
그의 사후(死後)에 생전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기 때문에 공신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책에 무슨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겁니까?”

프랑스제 기마총에서 발사된 탄환?
그것은 이토 저격의 상황에 대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말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토가 맞은 탄환은 안중근 의사의 브라우닝 권총이 아니라,
프랑스제 기마총(騎馬銃)에서 발사됐다는 얘깁니다.
기마총이란 권총보다는 길고 소총보다는 짧은 카빈총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이토의 몸에 박힌 총탄 세 발이 모두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방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무로다가 그렸다는 ‘
이토 피격 진술도’도 남아있습니다.

무로다 요사아야가 그렸다는 '이토 피격 진술도'.
“이 그림을 보면 총탄이 위에서 아래로 뚫고 지나간 것처럼 돼 있지 않습니까?”

“제1탄의 경우에는 어깨로 들어와 가슴 젖꼭지 아래 머물렀다는 얘긴데…
이 그림대로라면,
이것은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쏜 위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무로다가 했다는 그 책의 진술은,
결국 안중근 의사가 아닌 하얼빈역 2층 식당에 숨어있던 정체 모를 ‘
진범’이 비스듬히 이토를 내리쐈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로다 옹의 이야기’란 책에서는 “
그 식당은 격자 구조로 돼 있어 아래로 쏘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는
자못 그럴듯해 보이는 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본다면 대략 이런 개념입니다.

무로다의 주장을 그림으로 표현한 '제3자 저격설' 개념도.
물음표와 점선으로 그린 부분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무로다는 총탄을 볼 수 없었다
“이토를 옆에서 수행했던 무로다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얘기라고 받아들여졌을텐데요.”

여기서 최 원장은 잘라 말했습니다.
“천만에요.
전혀 근거 없는 날조입니다.”

왜?
무로다는 이토의 몸에 맞은 총탄이 과연 무엇인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차 안으로 옮겨진 이토가 사망하자 러시아측은 이토의 부검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측은 손사래를 쳤습니다.
“이토 공(公)의 몸에 어떻게 감히 칼을 댈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차에 이토의 시신을 실은 채 그대로 하얼빈을 떠났습니다.

열차가 일본 조차지인 관동주(關東州) 다롄(大連)에 도착한 뒤 수행 의사,
다롄병원장,
관동군 군의관이 모여 긴급 회의를 했습니다.
이토의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습니다.
“탄환을 꺼내자면 수술을 해야 하니…
그대로 덮어 두자!”
결국 이토 몸 속의 탄환은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가 쏜 탄환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한 발 남아 있습니다.

이토 옆에 있다가 총탄을 맞은 세 사람 중의 한 사람,
왼쪽 다리를 부상당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는 자신의 다리를 맞춘
총탄을 법정에 제출했다가 돌려받습니다.
그의 사후,
유족은 이 총탄을 도쿄 헌정기념관에 기증합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총탄인지를 보면,
‘제3자 저격설’의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권총에서 나온 총탄인지,
카빈총 총탄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본 헌정기념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탄환.
카빈총이 아닌 권총 탄환이었습니다.

최 원장이 말을 이었습니다.
“일본 르포작가 한 명이 무로다 책을 보고 총알 감식을 의뢰해서 그 결과를 책으로 펴내기도 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리 입을 놀려도 권총알이 카빈총알로 둔갑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주치의가 작성한 사망진단서의 발견
“하지만…
무로다가 그렸다는 그 피격 진술도는…”

“무로다는 이토가 죽는 순간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토는 총을 맞고 곧바로 열차로 옮겨져 30분 만에 사망합니다.
무로다는 이토가 쓰러진 순간 부축해서 열차로 옮길 때까지만 수행했습니다.
이토의 상처를 제대로 본 사람은 주치의인 고야마 젠(小山善)이었습니다.
고야마는 솜으로 이토의 출혈을 막았고,
이토의 시신과 함께 다롄까지 갔습니다.
더구나,
바로 이 문서를 보세요.”

그것은 최서면 원장이 인터뷰 직전 일본 외무성에서 발굴한 새로운 자료였습니다.
‘이토 공작 만주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 별책 제1권 메이지(明治) 사십이(四十二)’.
“이 문건에 이토의 사망진단서가 나옵니다.
바로 주치의인 고야마가 작성한 것이죠.”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
의사 고야마 젠이 작성한
이토의 사망진단서에 수록된
그림.
총탄이 수평으로 관통하고 있다.

주치의가 작성한 사망진단서의 그림에는,
①제1탄은 오른쪽 팔뚝 위쪽을 관통해 오른쪽 갈빗대 부분을 거쳐 심장 아래
②제2탄은 오른쪽 팔꿈치→흉막→왼쪽 늑골 아래
③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좌측 복근에 박혔음을 명시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 발 모두 ‘수평으로 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
비스듬히 쏜 총탄에 맞았다’는 것은,
이토의 사망 현장에도 없었고,
총알은 물론 이토가 총을 맞은 몸도 보지 못했으며,
담당 의사도 아니었던 무로다가 했다는 말을,
무로다가 죽은 지 4년 뒤에 등장한,
저자도 누군지 모르는 책에서 쓴 얘기였던 것입니다.
<STYLE>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STYLE>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안중근 기념관에 전시된 의거 당시의 모형.
이렇게 '수평으로 권총을 쏜' 것이 모든 증거에 부합된다. /유석재 기자
바카야로 유언’도 날조였다!
그런데 그 괴서(怪書),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중대한 왜곡을 합니다.

“유 기자,
이토가 죽을 때 뭐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거…
‘바카야로’(바보)라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사실이 아니었나요?”

“그 얘기도 바로 이 책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토가 총에 맞고 죽기 직전 “
범인은 누군가?”라고 묻자
수행원이 “
조선인입니다”라고 대답하자 “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내뱉고 숨을 거뒀다는 얘기는 상당히 많은 국내 전기에서조차
정설처럼 쓰여 있는 얘깁니다.
사실 이 말의 속뜻은 ‘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려고 한 것인데 나를 죽이다니’
또는 ‘
내가 살아있어야 조선이 아주 멸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이제 너희들은 망했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얘깁니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은 “
을사늑약 이후 한일강제병합까지 5년이란 시간이 지체된 것은 만주의 이권을 둘러싼
일본·러시아·미국의 각축전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대한제국은 내정 관할권과 군대를 상실한 상태였고,
이토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가 미국과 손잡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09년 10월에 대한제국은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가 그런 말을 한 것도 거짓말이라니?
우선,
앞에서 나온 것처럼 이토는 열차 안에서 죽었는데 무로다는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무로다가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천만에요.
이토를 저격한 사람이 한인이라는 사실은 이토의 시신을 실은 열차가 출발한 뒤에야 밝혀졌습니다.
” 이토는 죽는 순간까지도 저격자의 국적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최 원장은 1984년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로부터 “
할아버지는 총격 직후 사망해 유언은 한 마디도 없었다”는 확인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근거 없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무로다 옹의 이야기’라는 책은 이렇듯 황망한 이야기들을 싣고 있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토의 ‘제3자 저격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쓴 엽기적인 소설이 전후(戰後) 일본에서 3종이나 나왔고,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무렵 또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감히 그랬을 리가 없다”
이제 남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왜 이런 황당무계한 음모론을 들고 나왔던 것일까요?

생각을 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음모론은,
그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고 싶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1977년 이후에도 생존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사실 ‘
엘비스가 그렇게 일찍 죽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믿고 싶어합니다.
1969년의 달 착륙이 조작됐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실 ‘
미국의 우주과학기술이 그렇게 일찍 발전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믿고 싶어합니다.

NASA가 '달 착륙 음모론'을 반박하기 위해 공개한 달 표면 사진.
아폴로 17호에서 내린 우주인들이 남긴
달 표면 탐사차량(LRV)의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NASA 사진
그러면,
‘이토 히로부미 공을 안중근이 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 일본인들의 심리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최서면 원장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한국인처럼 유약하고 활기 없는 민족이 어떻게 감히 이토 공을 쏠 수 있었겠느냐는 거죠.
민족적인 멸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토를 쏜 자는 러시아의 비밀조직원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아무 근거가 없는 상상일 뿐이죠.”

그러니까 일본인들의 속내는,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에 대해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총살”을 했던 안중근 의사의 당당한 거사는,
일본인의 입장에선 대단히 충격적이고 굴욕적인 일이었으며,
자신들이 저질렀던 침략과 수탈의 과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당혹스럽고 수치스런 계기가 됐다는 실토가 되는 것입니다.

“빼앗고 해치는 자가 왜 날뛰어야 하는가”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何故世態如是不公耶? 嗚乎! 强奪隣邦, 殘害人命者, 如此欣躍, 少無忌憚, 無故仁弱之人種, 反如是陷困耶?
(하고세태여시불공야? 오호! 강탈인방, 잔해인명자, 여차흔약, 소무기탄, 무고인약지인종, 반여시함곤야?)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데,
죄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1909년 10월 26일 의거 직후 체포돼 촬영된 안중근 의사의 사진.
당당하고도 의연한 표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DB
이것은 하얼빈역 찻집에 앉아 저격의 시간을 신중하게 기다리고 있던 안 의사가,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오고 군악소리가 크게 일어나는 그 순간에
머릿속에서 치솟아 오른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안 의사는 그리고 나서 곧바로 밖으로 박차고 나가 총을 쏩니다.
이 인물이, 러시아의 비밀조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저격자 행세를 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안 의사의 이 절규는10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아주 특이한 현 일본 정권의 일부 정치인에게만 해당된다고 굳게 믿고 싶습니다만,
일본 관방장관이 “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망언을 마구 내뱉는 배경에는,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쳤던 과오에 대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그들의 근본적인 ‘수준’이 드러납니다.
장 자크 루소는 “
과실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정녕 ‘
보통국가’가 되려면,
지금의 일본 위정자들은 자위대 파견 따위의 일에 힘쓸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분명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적인 모습부터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유석재의 新천장지구]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안중근 의사 日人 위장 이토 사살?

 NYT 저격 동영상 삽화 깜짝

 

  • 뉴시스

 

입력 : 2014.03.07 14:08

수정 : 2014.03.07 14:13

 

 

 

“저격 장면 촬영 동영상 재판 활용”…

 1910년 NYT 특집 보도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이 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사살할 당시

 일본인으로 위장 잠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와 함께 저격 순간을 촬영한 동영상 자료가

안중근 의사의 재판에 채택된 사실이 당시 보도를 통해 확인됐다.

 

뉴욕 타임스는 1910년 8월14일자에 깜짝 놀랄 특집기사를 실었다.

 

‘스릴 넘치는 순간을 포착한 희귀한 사진들(Unusal Snapshots Taken at Thrilling Moments)’의

제목으로 한 면 전체를 채운 것이었다.

 

프랑스 잠수함 조난,

러시아 광산 폭발 등 20세기 초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포착한 것으로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순간 등 8대 사건이 사진과 함께 게재됐다.

 

그중에서도 신문의 정중앙에 위치해 ‘세기의 사건’으로 대접받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 순간은 유일하게 삽화로 소개됐다.

 

그런데 이 삽화엔 특이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이토를 사살하는 안중근 의사의 복장이 일본 기모노 차림이었고

이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사 내용을 보지 않는다면 영화 촬영장을 묘사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뉴욕 타임스는 삽화 설명문에 ‘

이토 백작을 저격하는 장면은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고

 재판에서 상영된 후 일본 정부가 압수했다’고 표기했다.

 

이에 앞서 뉴욕 타임스와 샌프란시스코 콜,

로스앤젤레스헤럴드 등 미국의 주요 미디어들은

1909년 12월9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발 기사로 일제히 동영상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는 “

오늘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입항한 일본의 증기여객선 가가마루호가 가져온

소식에 따르면 하얼빈에서 이토 백작이 피격될 때 러시아 촬영기사가 저격 순간을 촬영했다”면서

“이 동영상은 한국인 저격자의 재판 때 활용된다”고 보도했다.

 

타임스는 “일본 관리들은 비극의 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500피트(약 10분 분량)의 동영상 필름을 입수,

재판 때 활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또다른 필름 한 세트도 일본에서 공개될 예정”이라고 덧붙여

촬영된 필름이 두 세트임을 시사했다.

 

이 동영상은 이듬해 2월 일본에서 일반에 공개 상영됐고 이후 미국에서도 상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12월25일 미니애폴리스의

‘더 벨맨’ 지는 “

사망한 이토 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백작이 한국 통감으로 임명됐다”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로 권력을 번갈아 행사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

러시아 촬영기사가 촬영한 이토의 피격 장면이 내년 재판 때 활용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 “동영상 저격 등 모든 장면 촬영”

뉴욕 타임스는 1910년 8월14일 특집 기사에서 “

이토가 코콥포프를 만날 때 이례적으로 동영상 촬영이 된 것은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메라 필름은 빠르게 돌아가며 열차에서 내린

이토 일행이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향해가는 장면을 담았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계속 돌아갔고 모든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장면들이 이어졌다.

 

” 뉴욕 타임스는 이어 “

이토 백작의 피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실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부서졌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러시아 촬영기사가 이토 도착 직전부터 저격 순간,

안중근 의사 등이 체포되고 현장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호송되기까지의 전 장면이 촬영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날 게재된 애니메이션은 동영상을 확인하고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저격 상황의 그림은 이토의 관복과 수행원의 위치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성 두 명이 환영의 인사를 하는듯한 포즈도 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안중근 의사의 일본옷 차림이다.

이는 현장의 삼엄한 경비를 고려해 일본인으로 위장했을 개연성을 말해준다.

 

뉴욕 타임스가 저격 직후 송고한 기사에 따르면

플랫폼엔 이토를 환영하려는 일본인들이 운집했다고 돼 있다.

 

만일 안중근 의사가 현재 남아 있는 자료사진처럼 허름한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러시아 경찰이 수상쩍게 봤을 가능성이 크다.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를 처음 발굴한 재미 언론인 문기성씨는 “

뉴욕 타임스가 동영상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삽화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없다.

 

당시 장면들은 사진 촬영된 것도 없고 우연히 찍힌 이 동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일본인 위장이 사실이라면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안중근 의사 저격 동영상 1910년 미국서도 상영 역사에 남을 세기의 동영상은

그러나 이후 종적을 감췄고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로부터 85년이 지난 1995년 일본 NHK 방송이 방영한 다큐물에서

안중근 저격 동영상의 일부가 방영됐다.

이토가 타고온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과 이토 일행이 환영객의 영접 속에 플랫폼에서 걸어오는 장면,

 

안중근 의사 등이 포박돼 호송되는 흐릿한 장면 등 30초 분량이었다.

그러나 저격 순간이 촬영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KBS 역사스페셜팀은 동영상 원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NHK 다큐물이 1941년 아사히신문이 제작한

‘약진의 흔적’이라는 영화 필름을 활용한 것임을 알게 됐다.

 

동영상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저격 일주일만인

1909년 11월3일 경성신문의 보도였고 일본 정부가 동영상을 현재 가치로 2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

1만5000원을 주고 구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이듬해

2월1일부터 6일까지 도쿄 국기관에서 공개 상영되는 일도 있었다.

 

저격 동영상이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미국에서도 상영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지만 

이 동영상이 사본인지,

원본을 임대한 후 다시 돌려줬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만일 사본이라면 미국에서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로선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가 안중근 의사가 감행한 ‘

세기의 저격’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현존하는 최고의 자료인 셈이다.

 

 다음은 1910년 8월14일 뉴욕 타임스 특집 기사 중 이토 처단 부분.

'지난해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진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한국 통감인 이토 백작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로 돼 있었다.

이토 일행을 일본 환영객들이 플랫폼까지 나와 맞이 하기 위해 공식적인 경호의 벽이 완화된 상태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례적으로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다.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내 촬영토록 한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카메라 필름은 이토 일행이 열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건너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곟속 돌아갔고 모든 상세한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모습이 이어졌다.

 

현장을 촬영한 필름이 현상됐을 때 내용은 물론,

반응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유럽의 관료 집단은 이것이 공개되면 비슷한 폭력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한 태도는 최근 미국 회사가 코네티컷의 폭발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을 유럽의 딜러들에 판매하려고 했을 때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한 남성은 그것을 러시아로 가져가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폭력이나 범죄의 장면을 보여주는 동영상에 대한 편견은

국가검열위원회(National Board of Censors)의 영향에 따라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토 백작의 저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

실제 상황”이다.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파괴됐다.

 

동영상은 소방차용말들이 멀리서 다가오고

 그중 하나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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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영웅’ 안중근 의사 의거 105주년

 

조선닷컴 인포그래픽스팀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 바란다."

 

이는 조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외치고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또한,

안 의사는 "

국권이 회복되거든 나를 고국 땅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바람을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유해는 아직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순국104주년을 맞았다.


    •  
  • 입력 : 2012.03.23 16:28 

  • 수정 : 2013.07.03 09:44

  •  

  •  

    안중근

     
    안중근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부
    1910년 3월 26일
    일본 제국 료준
    포로(사형)
    조선 대한제국
    응칠(아명), 토마스(세례명)
    한학 수학
    교육자, 군인, 독립운동가, 사상가
    천주교
    김아려
    안태훈, 조마리아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태어난 곳조선 황해도 해주부
    죽은 곳일본 제국 료준
    복무대한제국
    복무 기간1907년 ~ 1909년
    최종 계급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군사령관
    근무의병
    서훈 내역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년)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사상가, 독립운동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다. 본관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구한 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청나라 길림성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토마스이다. 본관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거부가 되어 재산을 축적하였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다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억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하였다.

    가계 배경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로서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安起玉)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 후반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安毅)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9] 또한 심산 김창숙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으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한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음에 틀림없다.

    또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또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고,

    안인필(安仁弼)이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출처 필요]

    초기 활동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소년기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여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데 참여하였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도마, 다묵)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 뒤 잠시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복권형식의 채표의 추첨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난리가 생긴 것이다.

    채표의 추첨날에 벌어진 군중들의 항의소동을 겨우 진정]시켰다.

    이후 사업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그는 채표 사업을 곧 그만두었다.

    청인 난타 사건

    1904년 아버지 안태훈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하였다.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하였다.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계몽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온다.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닭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간다.

    의병 활동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

    그뒤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8년에는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2차례 진입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1908년 6월 안중근은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출정하여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저격과 최후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 부분의 본문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입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7]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하였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사용된 권총과 같은 모델. 벨기에 FN M1900 권총.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되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차이쟈거우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차이쟈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18]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만주 철도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유언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

    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사후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 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저서 및 유묵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유묵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이 부분의 본문은 안중근 의사 유묵입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연보

    사상과 신념

    이토 히로부미 사살의 영향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1927년부터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은 중국과 북한에서 64식 권총으로 생산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합방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 합방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도쿄에서 한일 합방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동양평화론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는데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상이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 즉, 안중근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 고려대학교 사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6월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
    •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부정적 평가

    윤치호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을 더욱 촉진시켰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안인수, 진해 현감 역임
    • 아버지 : 안태훈(泰勳), 진사
    •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 부인  : 김아려(金亞麗)
    •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 남동생 : 안정근,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 남동생 : 안공근,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 큰아들 :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병으로 사망.
    • 작은아들 : 안준생(俊生),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 둘째며느리 : 정옥녀
    • 딸: 안현생(1902 - 1960), 1953년 4월 ~ 1956년 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 조카 : 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의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 조카 : 안춘생,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 손녀 : 안현생의 딸 황은주, 황은실과 안준생의 딸 안연호(2011년 2월 사망), 안선호(2003년 사망)가 있다.
    • 손자 : 유일한 손자로, 안웅호(雄浩)는 안준생의 아들이다. 
    • 4촌  : 안홍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 증손자 : 토니 안(안보영)

    기타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기념 사업

    • 1958년 -“애국열사 안중근”은 북한에서 창작, 공연되었다.
    • 1963년 -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으로 윤치영이 취임하였다.
    • 1974년 - 안중근 기념 동상이 작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에 설치되었다.
    • 1979년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조선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이다.
    • 1979년 - 명동 천주교회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가 집전되었다.
    • 1986년 -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중국 뤼순 감옥을 방문하여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다.
    • 1990년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를 발간하였다.
    • 1999년 -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공원 조성 제안을 부결하였다.
    • 2000년 -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 2000년 - 하얼빈 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이 열렸다.
    • 2001년 -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안중근”이 독일에서 초연되었다.
    • 2002년 - 오페라 “안중근 손가락”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
    • 2002년 - 안중근 의사 국제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 2003년 -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 2004년 - 안중근의 삶을 그린 《도마 안중근》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연출가는 서세원이다.
    • 2006년 - 가짜 안중근 휘호가 8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35]
    •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2008년 건조된 한국 해군의 1800톤급인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되었다.[36][37] 안중근 잠수함은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었다. 안중근함 진수식에는 김태영 대한민국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관계자와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 2009년 -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6월부터 국내 공연을 시작으로 11월까지 하얼빈, 일본 등지에서 최수종이 안중근 역을 맡은 연극 '대한국인 안중근'의 막이 올랐다.
    • 2010년 - 중국 정부가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40]
      • 3월 26일 - 서울 서울광장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열렸다.
      • 7월 27일 배우 송일국이 1인 2역을 맡은 안중근의 삶과 처음으로 그의 아들 안준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나는 너다' (2010년 7월 27일 ~ 2010년 8월 22일)가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41]
      • 9월 30일 러시아 정부가 안중근과 관련된 외교 문서를 대한민국 정부에 처음 전달하였다.[42]
      • 12월 4일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이 1년 만에 다시 막이 오를 예정이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안중근 사형 이후의 축하연 기록을 찾아냈다.[43]

    기타

    관련 영화

    문화에 나온 안중근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

    주석

    1.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2. 안중근의사 기념관
    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7쪽
    4.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 8, 173~174페이지
    5.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1쪽
    6. 안종영 편, 순흥안씨 족보 (신문관, 1918)
    7.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2쪽
    8.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3쪽
    9.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국가보훈처, 1999) 450, 463페이지
    10. 웅진위인전기《안중근》/웅진출판.
    11.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54쪽
    12.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56쪽
    13. 황해도 래거안, 보고 제 38호, 1903년 7월 22일자
    14. daum
    15. 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2
    16. 풀어준 일본군 포로들이 이들의 경흥 작전을 누설한 것이다.
    17. 열 걸음 앞 이토에 3발 명중… 러시아어(語)로 "한국 만세!" 3번 외쳐”, 《조선일보》.
    18. 당시 그는 이토 일행이 모두 비슷한 옷을 입어 이토를 알아보지 못해 거사를 실패할 뻔했지만, 갑자기 이토가 멈춰서 뒤돌아 군중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틈을 타 저격을 성공할 수 있었다.
    19.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1876년 급사하였는데, 공식적으로는 자연사로 되어있지만 막부정권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설을 취한 것이다.
    20.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실패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1. YouTube - Broadcast Yourself
    22. 펀글게시판
    23.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 (대한민국 문화재청)
    24. 허윤희, 안중근 의사는 애국 정신 상징 중국 혁명 과정에 지속적 영향 조선일보
    25. 배영대,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관점서도 선구적 사상” , 중앙일보
    26. 가톨릭 신문 2008년 4월 13일자.
    27. 안중근 평전
    28. [안중근 의사 의거 99년] "그는 100년 전부터 동북아 평화도시를 꿈꿨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9.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 역사비평사 | 2001) 133페이지
    30. "그는 100년 전부터 동북아 평화도시를 꿈꿨다", 한겨레신문
    31. “고국에 돌아와도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다”, 시사IN
    32. Q : 안중근 의사 후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나? 조선일보
    33. '안중근 의사 4촌 동생' 안홍근 선생 건국훈장
    34. 이위재, "안중근의 후손이란 것에 긍지·책임감 느껴", 조선일보
    35. '가짜'논란 안중근 휘호, 8천만원에 낙찰 (조선일보) 2008.06.21자
    36. 바다의 왕자 '안중근 잠수함' (조선일보) 2008.06.04자
    37. 214급 잠수함 '안중근함' 진수 (조선일보) 2008.06.04자
    38. 노재현 기자. “안중근 의사 동상, 국회에 임시 전시”, 《연합뉴스》, 2009년 9월 4일 작성. 2009년 9월 4일 확인.
    39. 한동현 기자.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제1회 세계인 장기대회 하얼빈서 개최”, 《흑룡강신문》, 2009년 10월 12일 작성. 2009년 11월 14일 확인.
    40. 박종국 기자. “中, 안중근 추모행사 첫 공식 승인(종합)”, 《연합뉴스》, 2010년 3월 25일 작성. 2010년 3월 28일 확인.
    41. 나는 너다 국립극장
    42. 김귀근 김남권 기자. “러, '안중근 외교문건' 한국에 처음 전달(종합2보)”, 《연합뉴스》, 2010년 9월 30일 작성. 2010년 10월 2일 확인.
    43. 김귀근 기자. “日관리들, 안중근의사 사형집행후 축하연”, 《연합뉴스》.
    44. 이광효 기자. “이명박 대통령, “안중근 의사 유해 모셔오는 데 최선””, 《투데이코리아》, 2010년 3월 26일 작성. 2010년 3월 26일 확인.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母 편지 보고 너도나도 '뭉클'

 

 

입력시간 | 2014.02.14 10:52 |

 

 

정재호 기자 kemp@

 

 

[이데일리 e뉴스 정재호 기자]

 

2월14일은 여성이 좋아하는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발렌타인데이로 널리 인식돼 있지만

역사가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날로 다가온다.

경기도교육청은 “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우리 아이들이 바르게 큰다”며 “

2월14일 발렌타인데이는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서른살 청년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 받던 날이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2월14일을 맞아 발렌타인데이의 의미보다 100여년 전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가 보다 주목받고 있다.

사진=경기도교육청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을 명중시킨 후에

만세를 불러 현장에서 체포됐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으로 옮겨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한 달 뒤인 3월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이때

안중근의 나이는 불과 31살이었고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또한 40대였다.

안중근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에 짧고 단호한 편지를 남겼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사는 편지에서 “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운을 뗐다.

이어서 “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고 적었다.

호랑이 관련 속담에

‘범이 범 새끼를 낳고

용이 용 새끼를 낳는다(훌륭한 부모가 훌륭한 자식을 낳는다는 뜻)’라는 것이 있다.

어머니로서 아들을

저 먼 타국에서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안중근 의사 못지않게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었다.

 

깊은 비탄을 애써 감추고 오히려 아들을 채찍질하는 올곧음에 절로

뭉클함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이토 저격 당시 상황 상세 묘사한

싱가포르 신문 발견돼…

새로운 사실 드러나

 

 

조선닷컴

 

입력 : 2014.03.25 08:47 

수정 : 2014.03.25 09:28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가 다가오는 가운데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저격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저격 속보를 전했고
11월10일엔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고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은 1909년 11월18일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2014.03.25. <사진=싱가포르 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를 하루 앞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저격 전 30분간
러시아 재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눈 등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됐다.

25일 뉴시스는 1909년 11월 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The Singapore Free Press and Mercantile Advertiser)를 인용해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을 전했다.

당초 이토는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걸어가다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10월 26일 장춘에서 기차를 타고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 안에 들어가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과 30분간 대화했다.

이토는 대화를 마친 뒤 열차 앞에서 기다리던 러시아와 중국 영사 등의
영접과 군인들을 사열을 받았고 양 옆에는 코콥초프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가 서 있었다.
 
일본 남만주철도 사장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是公)와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등 수행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토가 일본인 환영단 앞에 도착했을 때
회색 양복 차림을 하고 사냥 모자(shooting cap)를 쓴 23세의 한국인이 튀어나왔다.
 
그는 7연발 리볼버 권총으로 불과 5피트(약 1.5m) 앞에서
이토의 가슴과 복부를 겨냥해 3발을 쏘았다.

곁에 있던 나카무라 사장은 쓰러지는 이토를 잡았고 이토는
“내가 당했어”라고 신음을 토했다.
 
차츰 안색이 창백해진 이토는 급히 열차안으로 후송됐고 그곳에서 “
누가 쐈나?
모리(비서관)도 맞았나?”하고
물었다고 전했다.
 
이토는 30분 뒤인 10시쯤 숨졌다.
결정적 사인은 오른쪽 폐를 관통한 총알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가 다가오는 가운데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저격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저격 속보를 전했고
11월10일엔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고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은 1909년 10월27일 스트레이츠 타임스.
 
 2014.03.25. <사진=싱가포르 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보도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쏜 뒤 세발을 더 발사해
옆에 있던 가와카미 총영사의 오른 팔을 맞췄고
남만주철도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이사의
오른쪽 발을 모리 비서관의 오른 팔을 맞춘 것으로 밝혀졌다.

당일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기사는 “
저격자는 현장에서 붙잡힌 후 전날 오후 7시에 겐산과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하얼빈에 들어왔으며 ‘
이곳에 온 목적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살해한 이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며 “
그는 체포직후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으며
두려움의 빛이 전혀 없었고 더 이상의 말을 하기를 거부했다”고
당시 안중근 의사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뉴시스에 따르면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외에도 당시 싱가포르 영자신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관한 속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저격 다음날인 10월 27일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이토 저격 사실을 전했고 11월 10일엔 “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으며 저격 직후 ‘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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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

 

오늘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입니다.
아래는 사형선고 받은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쓴 조마리아 여사 편지 전문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새벽편지 정리 -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했을 당시 나이가31세.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께
천국에서 만나자는 가슴아린 답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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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