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며칠 후, 위령제가 열렸다. 얼마 전부터 떠돌던 믿어지지 않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박문사는 엄청나게 붐볐다.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미나미 총독의 연설이 끝나고 이토 히로쿠니가 무대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라는 소개에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미나미 총독이 안준생을 불러 안중근의 아들이라 소개했다. 장내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미나미 총독은 둘을 무대 가운데로 인도했다. 마주보고 섰다. 이토 히로쿠니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준생은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악수를 받았다.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고 전했다.

 

(중략)

 

호부견자(虎父犬子)라더군요.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 하하.......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 자리에서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잡혀 죽어야 했나요? 영웅 아버지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사실 아버지는 재판도 받고 가시는 날까지 시끌벅적하기라도 했지만, 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개죽음 아니었을까요? 내 형은 7살 나이에 자기가 왜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독을 먹고 죽어버렸죠. 나도 그렇게 죽었어야 했단 말입니까? 아무도 기억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죽음을? 왜? 내가 안중근의 아들이어서?

 

-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준생' 편 中 발췌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는 조마리아 여사(안중근의 모친)의 후손인 조동성 씨와 이태진, 김성민씨가 쓴 책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체 문장에 주목해봐야 하는데, 안중근이란 위인이 가지는 무게감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안중근과 가족들의 내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 언급한 문장은 '준생' 편에 나오는 준생의 독백이다.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죽었어야 했단 말입니까? 아무도 기억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죽음을? 왜? 내가 안중근의 아들이어서?’

 

라는 문장이 내 가슴을 때렸다.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갔다. 그 끝에 죽음이 있었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선택을 했고 대가를 치른 거다.

 

그러나 안준생은 태어나 보니 안중근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은 안중근의 아들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7살 때 독살 당했고, 그는 평생을 변변한 직업 하나 없이 떠돌아야 했다. 1937년에는 임시정부가 그를 버리고(혹은 깜박 잊었을 수도, 상황이 절박했을 수도, 아니면 안준생의 자의적인 선택일수도 있겠지만) 중경으로 떠났다. 

 

일제 손아귀에 들어간 안준생. 그의 선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준생’이 독백이 있었던 날은 1939년 10월 16일이었다.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단상 위에 올라가 한 남자를 소개한다. 이토 분기치(伊藤文吉) 남작.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자 일본광업 사장이었다. (분기치는 이토 히로부미가 집안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엽색행각’은 유명했다)

 

prm1512260014-p1.jpg

안준생(좌)과 이토 분기치(우)

 

분기치는 자신의 아버지인 이토의 사망 30주기를 기리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아버지를 서울에서 기린다면? 당연히 박문사(博文寺)였다. 

 

분기치의 소개가 끝나자 미나미 지로는 다른 남자 한 명을 소개한다. 바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다. 

 

박문사를 가득 메운 군중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이토 분기치를 소개했을 때와는 다른 소란이었다. 미나미 총독은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사람을 단상 위 가운데로 이끈다.

 

먼저 손을 내민 건 이토 분기치였다. 안준생은 분기치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아버지를 대신 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함성과 탄성. 안중근의 아들이 이토의 아들에게 사죄를 했다.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保國)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

 

안준생이 박문사에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 사망 30주기를 맞이해 (어디까지나 일본 기준에서) 가해자의 아들이 피해자의 아들을 찾아와 사죄를 한다. 그것도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박문사에서.

 

너무도 드라마틱한 전개다. 일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흔히 볼 수 없다. 더구나 역사에 기록된 ‘사건(중립적으로 표현하자면)’이고,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꿔놓은 대사건의 일으킨 사람의 가족이다.

 

이렇게 길게 말꼬리를 잡아 끈 건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있었던 이벤트는 조선 총독부의 작품이다. 격화되는 전쟁 앞에서 내선일체를 외치던 일제로서는 안준생과 이토 분기치의 만남은 더없이 훌륭한 이벤트였다. 

 

'조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의 아들이 30년 뒤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는 모습'

 

그 자체로 한일합방의 정당성과 내선일체의 당위성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건 철저히 기획됐던 '이벤트'다. 안준생과 이토 분기치가 박문사 단상에서 처음 만났을까? 아니다. 이들은 이미 조선호텔에서 만나 박문사에서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이미 ‘합’을 다 짜놓고 박문사로 향했다. 

 

每日新報19391017_3.jpg

<매일신보> 1939년 10월 17일의 기사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기획한 이벤트는 기대했던 효과를 냈다. 

 

『아버지가 범한 죄 때문에 고투의 30년을 보냈던 안준생 군이 생애의 원망(願望 : 소원)이었던 이토 공에 사과를 토로한 지금, 홍대한 성은에 감읍하면서 은혜와 원수를 초월한 자식끼리 서로 손을 잡고 과거를 청산, 국가를 위한 봉사를 맹세했다.』


- 1939년 10월 17일 경성일보 기사 中 발췌

 

친일 언론이 들고 일어났고, 친일 부역자들이 맞장구를 쳤다. 친일 부역 언론의 기사가 맞는 걸까? 모든 시중의 여론이 경성일보의 그것처럼 움직였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순진한 판단이다. 조선총독부도 그걸 예상하진 않았다. 일제가 원했던 건 ‘체념’이었다. 

 

“안중근의 아들마저...”

“안중근 아들도 저럴진대 우리가 뭘 어쩌겠어?”

 

내선일체(內鮮一體)란 일본과 한국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한국이 일본에 굴복해서 기어들어가' 하나가 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선 굴복이 필요하고, 굴복의 전제조건은 ‘체념’이다. 

 

포기했을 때 패배가 시작된다. 독립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는 아무리 희망이 없더라도 싸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둘 무너지며 희망이 체념으로 변하면, 달아올랐던 독립에 대한 열망도 사라질 거다. 내선일체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 민족의 ‘체념’이었다. 

 

일제는 안중근의 핏줄에 대해 집요한 회유와 공작을 시도했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안중근의 사위가 되는 황일청(안현생의 남편)은 공작 1순위였다.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로 말하겠다.

 

“그들은 할 만큼 했다.”

 

태어나보니 안중근의 아들이었다. 안중근의 핏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독살을 당한 장남 문생을 생각해보자.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늘 불안에 떨며 만주와 연해주, 상해 등등을 떠돌아야 했다. 자그마치 30년이다. 이 기간 동안 안중근 일가의 삶은 생활이 아닌 생존이었다. 

 

물론 안중근의 아우들인 공근, 정근 형제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강요할 순 없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그 아버지가 목숨을 걸었다고, 아들에게까지 강요할 순 없다. 

 

안중근 일가는 할 만큼 했다. 

 

20190403161433842016.jpg

 

준생은 어머니가 있는 상해로 돌아왔다. 안중근의 아내였던 김아려 여사는 돌아온 아들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고생했다.”

 

이후 안준생과 일가는 짧은 영화(榮華)를 누린다. 일본은 돌아온 탕아를 반기듯 각별한 대우를 해줬다. 상해에 있는 고급 주택을 내줬다. 

 

김구는 이런 안준생을 보며 치를 떨었고, 죽이려고 했다. <백범일지>를 보면, 해방 후 김구가 중국 경찰에 ‘안준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대목이 있다. 중국 경찰은 이를 거절했다. 

 

목숨을 건진 안준생의 삶은 어떠했을까? 말로는 더 비참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모든 게 끝이 난 거 같았지만, 바닥 밑에는 또다른 바닥이 있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갈라져 전쟁을 일으킨 거다. 상해까지 밀고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 역시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후 홀로 귀국한다. (아마 친일부역자라는 오명을 자신의 가족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했던 거 같다) 안준생이 고국을 찾은 건 아마도 ‘끝’을 보려고 한 게 아닐까? 영웅의 자식에서 단죄의 대상이 된 자신의 처지를 고국에서 끊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끝은 허무하게 찾아왔다. 준생은 폐결핵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걸 확인한 손원일 제독이 부산 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선에 그를 입원시켰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타국의 배 위에서 죽었던 거다. 

 

영웅의 아들 안준생의 쓸쓸한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