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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어떻게 최고의 감독이 됐나 ... 4가지 이유

[시네마&]앨프리드 히치콕, 스티븐 스필버그, 그리고 다음은 봉준호.

작년 10월 30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봉준호를 분석하며 쓴 기사의 제목이다. 세계 영화사에서 히치콕과 스필버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봉준호의 위치는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사상 최초로 한 인물이 영화 한 편으로 오스카 트로피 4개를 가져가며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영화 예술의 탄생지인 프랑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영화를 산업으로 이끈 할리우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 석권은 명실상부 봉준호가 지금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임을 증명한다.

봉준호는 어떻게 세계가 인정하는 '괴물'이 될 수 있었을까? 네 가지 관점에서 정리했다.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아주 이상한 할리우드 키드

봉준호 감독이 만든 7편의 영화를 함축할 수 있는 키워드는 '익숙한 기이함'일 것이다. 익숙해 보이는데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플란다스의 개'(2000)는 강아지 살인범에 관한 풍자 코미디인데 온갖 찌질한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살인의 추억'(2003)은 연쇄살인범에 관한 익숙한 스릴러 같은데 멋져야 할 형사들은 끝까지 헤매고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괴물'(2006)은 할리우드에 흔한 괴수영화처럼 보이지만 괴물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동정심이 간다. '마더'(2009)는 아들을 변호하는 엄마의 모성애를 그리고 있지만 국민 엄마 김혜자를 거의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설국열차'(2013)와 '옥자'(2017)는 송강호와 캡틴 아메리카, 충무로 신인 안서현과 틸다 스윈턴 등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앙상블 캐스팅의 절정을 보여준다. '기생충'은 가난한 가족이 부잣집에 침투하는 익숙한 코미디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장르를 호러와 스릴러로 비틀어버린다.

봉 감독은 수시로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변태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남들이 한 건 안 한 감독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로 봉 감독이 만든 영화 7편이 모두 그렇다. 비슷한 영화를 찾기 힘들고 있더라도 봉 감독이 먼저 했다. 그래서 작년 칸 영화제 당시 한 미국 기자는 봉준호 영화에 대해 "봉준호가 곧 새로운 장르"라고 말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봉준호 감독이 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안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화를 만드는 봉 감독의 창의성 근원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그는 최근 런던 영국영화협회(BFI)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너무 좋아했는데 세균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던 어머니가 극장은 더럽다며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던 흑백TV로 할리우드 고전영화들을 봤죠."

꼬마 봉준호가 영화를 접한 창구는 지금은 사라진 주한미군을 위한 채널 AFKN이었고 여기서 나중에 명작임을 알게 된 할리우드 영화들을 만났다. 앨프리드 히치콕, 샘 페킨파, 브라이언 드 팔마, 마틴 스코세이지 등의 걸작을 이때 처음 봤고 그의 자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 와서는 자신을 괴롭히는 선생님을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 상상하던 소심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노트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거나 만화를 그리는 것은 매우 좋아했다.

그는 1988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선 영화 동아리 '노란 문'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여기서 그는 세계 유수의 걸작 영화들을 불법 복제한 비디오테이프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더듬더듬 영어를 번역해 한글 자막도 직접 넣었다. 나쁜 화질에 번역도 엉망인 영화가 그에겐 최고의 교재였던 셈이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는 더 커진다. 봉 감독은 BFI 인터뷰에서 이때 "수시로 커트되고 화질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로 세계 명작들을 접하면서 머릿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해보는 방식으로 영화를 이해하려 한 것이 지금 돌이켜보면 창의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봉 감독이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은 캠퍼스 안팎에서 수시로 데모가 벌어지던 시기다.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자유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폭발했다. 그동안 금지돼 있던 세계 각국 영화들이 1990년대 내내 공식적 루트와 비공식적 루트를 가리지 않고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봉 감독 역시 이 거대한 문화혁명의 한복판에서 다양한 세계 문화를 흡수할 수 있었다.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봉준호 감독. 물론 동시대를 살아왔다고 모두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꼼꼼하게 포착하는 안테나가 있어야 시대의 공기를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말은 봉 감독이 평론가 데이비드 톰슨이 쓴 스코세이지에 관한 책(한국 번역서 제목은 '비열한 거리')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번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으로 유명해진 말이지만 사실 그는 이전에도 이 말을 자주 해왔다.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그가 살던 아파트에서 자주 보던 경비원 할아버지를 보며 구상한 작품이고, '괴물'은 고등학교 때 우연히 잠실대교 다리를 기어 올라가는 생명체를 본 기억에 주한미군이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한 맥팔랜드 사건을 버무린 작품이며, '마더'는 대학교 1학년 때 오대산에 갔다가 입구에 정차한 관광버스에서 아주머니들이 내리지 않고 춤을 추고 있던 모습을 기억에 담고 있다가 만든 영화다. '기생충'은 그가 대학 시절 당시 여자친구의 추천으로 부잣집에서 수학 과목 과외를 하던 기억을 떠올려 초고를 썼다.

어린 시절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란 할리우드 키드는 문화적 다양성이 폭발하던 시기에 청춘을 보내며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을 관찰해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다이내믹한 한국 사회라는 하나의 점과 할리우드 장르영화라는 하나의 점, 그리고 두 세계 속에서 살아온 봉준호의 일상이라는 또 하나의 점, 이렇게 세 개의 점이 연결돼 '봉준호 장르'라는 익숙하면서도 매우 이상한 세계가 만들어졌다.

지난 9일(현지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기생충팀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최고의 재능을 뽑아내는 리더십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없다. 규모가 커질수록 수많은 인력이 함께 작업한다. 적재적소에 꼭 맞는 인물을 투입해 일하게 만드는 건 감독의 능력이자 프로듀서의 능력이다. 봉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프로듀서로도 참여하고 있다.

배우 송강호와의 첫 만남은 이제 너무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한다. 송강호가 '모텔 선인장'(1997) 오디션에 지원했을 때 봉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겸 조감독이었다. '기생충'의 공동작가 한진원 작가가 '옥자'에서 한 역할과 비슷했다. 봉 감독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송강호에게 "이번엔 기회가 없지만 다음에 꼭 같이 하고 싶다"는 장문의 음성 녹음을 남겼다.

송강호는 봉 감독의 이 따뜻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송강호는 이후 '쉬리'(1999)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봉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 흥행 실패한 뒤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흔쾌히 수락했다. 두 사람 다 잘 안 풀리던 무명 시절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흔쾌히 지지해준 것이 훗날 영화 4편을 함께 한 '호-호 콤비'의 전설로 이어진 것이다.

2002년 9월 10일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영화 '살인의 추억'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배우 김상경, 제작자 차승재(왼쪽부터). 봉 감독은 카리스마로 현장을 지휘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사람들을 조곤조곤 끊임없이 설득해 결국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낸다. 영화 '마더' 촬영 현장에서 김혜자는 한국영화 사상 가장 이상한 엄마 역할을 맡아서 유독 감정을 소모하는 연기가 많았는데 봉 감독은 그가 감정을 쏟아낼 때마다 그를 다독이면서도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16번 테이크와 지금 32번 테이크 중 하나를 고를게요."

2009년 서울 압구정 CGV에서 열린 영화'마더' 제작보고회의 봉준호 감독과 배우 김혜자. 봉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스토리보드만 봐도 한눈에 어떤 장면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꼼꼼하게 스토리보드를 그린다. 시나리오는 지문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이처럼 그가 '봉테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디테일하게 준비하는 이유는 스태프와 배우들 간 명확한 의사 소통을 위해서다. 감독인 자신의 비전을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배우 최우식과 박소담은 한 인터뷰에서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봤을 때 워낙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어 처음엔 감독 요구를 맞출 수 있을까 부담이 되었지만 나중엔 연기하기 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봉 감독은 최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감독 토론회에서 스토리보드를 꼼꼼하게 그리는 이유에 대해 "완벽한 스토리보드가 나와 있지 않으면 현장에서 불안해서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완성된 장면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다. 그는 미리 준비한 촬영분 외에 만약을 대비한 여분의 장면을 찍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충분한 사전 준비를 했기 때문에 준비한 장면을 공들여 찍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습관 덕분에 그는 자신의 깐깐함을 만족시키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면서도 스태프들의 근로시간을 지켜줄 수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 그린 영화'기생충' 콘티. / CJ ENM 제공 봉 감독은 재능을 가진 인재를 발견해 칭찬하면서 그들에게 최고의 재능을 이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당장 그가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다른 사람을 칭송하는 데 수상 소감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것만 봐도 그가 살아온 방식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장에서 봉 감독은 막내 스태프의 이름을 불러줄 정도로 모든 사람을 챙긴다. 함께 일한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시나리오 작가 시절부터 인연을 쌓은 정승혜 프로듀서가 2009년 암으로 별세했을 때 칸에 있던 봉 감독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끌고 곧장 장례식장으로 간 일화는 유명하다.

'기생충'은 배우 1명이 이끌어가는 영화가 아니기에 배우 10명의 앙상블이 매우 중요했다. 봉 감독은 캐스팅에 무척 공을 들였다. 음험한 가정부 역할의 이정은, 투포환 선수 출신 엄마 역할의 장혜진, 지하 벙커에서 사는 남자 박명훈 등은 그들이 아닌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 힘든 캐스팅이다.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봉 감독은 대학로 연극 무대를 돌아다니고 단편영화들을 섭렵했다. 무명 배우였던 이들로부터 봉 감독은 최고의 재능을 이끌어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그린 자화상. / 아카데미 인스타그램 캡쳐 ◆불안과 공포를 이겨낸 창작력

봉 감독은 카페에 홀로 앉아 시나리오를 쓴다. 하루에 카페 4곳을 돌아다니면서 시나리오를 쓴다고 한다. 대부분 작가들이 토로하듯 글을 쓰는 과정은 외로움과 맞닥뜨리는 시간이다. 자기 내면 속으로 깊게 침잠할수록 더 좋은 글이 나온다. 이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야만 비로소 영광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다.

'기생충'으로 봉 감독은 미국 작가조합, 영국 아카데미, 오스카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 때마다 그는 글쓰기가 얼마나 외로운 작업이었는지를 강조했는데 아마도 고통스러웠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봉 감독은 2015년 베를린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궁극의 공포란 과연 내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드는 때일 겁니다.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잔혹한 순간과 맞닥뜨리는 것이죠. 하지만 궁극의 공포란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것이므로 그냥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옴니버스 영화 '도쿄' (2008) 촬영 현장의 봉준호 감독. 영화는 공동 작업이어서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 감독이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 이들의 밥그릇이 날아간다. 막중한 책임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해 불면증을 호소하는 감독들도 많다. 봉 감독 역시 다르지 않다. 유명해졌다고 대충 할 수 없는 것이 창작의 세계다. 보는 눈이 더 많아졌고 더 엄격해졌으므로 스스로에게 더 까다로워져야 한다. 까다로워지려면 자신을 학대할 만큼 몰두해야 한다. 실패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 오면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직업이 바로 영화감독이다. 오죽하면 스페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신작 '페인 앤 글로리'에서 40년간 감독 생활을 하느라 온갖 병을 달고 살았다며 고통을 호소했을까. 봉 감독 역시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잔병이 많다"고 밝힌 적 있다.

영화 '괴물'은 봉 감독이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지만 제작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는 촬영 직전 뉴질랜드 업체와의 계약이 틀어지면서 자살 결심까지 한 적도 있다. 촬영 일정은 잡혔는데 제작을 담보할 수 없게 되면서 자신이 사기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나 스탠리 큐브릭 등 거장 감독들도 자신을 학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영화는 혼자 보기 위해서 찍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것이므로 그저 묵묵히 견디며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야만 합니다."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팀이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마친 뒤 인근 한국 식당에서 뒷풀이를 하고 있다. / 소반 인스타그램 캡처 ◆급부상한 한국 영화산업과 시의적절한 조우

준비된 천재는 그가 활약할 수 있는 시대를 만날 때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다. 봉준호가 태어나 활약한 시기는 마침 한국영화 부흥기와 시점이 맞아떨어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는 낙후된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접속'(1997), '쉬리'(1999), '올드보이'(2003) 등 성공작을 잇달아 만들어내며 한국사회에서 영화는 하나의 산업으로 꽃을 피웠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영화계에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감독 혼자 고군분투하던 영화에 체계적 프로듀서 시스템이 도입됐고, 극장주가 주무르던 '영화판'을 대기업 자본이 접수하면서 제작, 배급, 투자, 마케팅 등 영역이 명확해졌다. 투자 자본이 다양화하면서 제작 규모가 커졌고, 주먹구구식이던 입장권 집계에 통합전산망이 도입되며 수익 배분이 투명해졌다. 시내 중심가 단관 위주 극장이 동네의 멀티플렉스로 바뀌며 영화 관람이 일상화됐다. 검열이 폐지되며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자 능력 있는 인재들이 영화계로 몰려들었다. 영상원 등 교육기관이 늘어났고, 국제영화제가 탄생했고, 칸·베니스 등 국제영화제에서 수상이 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를 지원하는 문화부 소속 공공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 영상 자료를 축적하는 시네마테크 영상자료원도 이때 생겼다.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제인 폰다에게 트로피를 건네받기 전 환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영국 영화 매거진 스크린 데일리는 오스카 작품상을 계기로 아시아 영화 산업을 분석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앞으로 아시아에서 다시 한 번 오스카 작품상을 받는다면 그곳은 또다시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어떤 아시아 국가의 영화 산업도 한국만큼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크린 데일리에 따르면 일본영화는 창의성이 부족하고, 중국에는 표현의 자유가 없고, 대만과 홍콩영화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기생충'은 이번 아카데미에서 봉 감독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상, 각본상 부문뿐만 아니라 편집상, 미술상 후보와 주제가상 예비후보에도 올랐는데 이는 한국영화 시스템 전반에 대한 인정으로 볼 수 있다.

과거 대만의 이안 감독과 홍콩의 오우삼 감독이 주목받은 적 있지만 이들이 성취는 대만과 홍콩영화 산업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이들의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개인적 성취에 그쳤다는 한계가 있다.

이번에 '밤쉘'로 오스카 분장상을 수상한 일본계 미국인 쓰지 가즈히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때 일본영화계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는 일본영화계에 염증을 느껴 미국행을 택했다"고 시상식 직후 인터뷰에서 일본 기자들을 상대로 말해 일본영화계에 되레 찬물을 끼얹었다.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 수상작으로 호명되자 봉준호 감독이 이미경 CJ 부회장과 포옹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봉 감독에게도 수차례 위기가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시절부터 데뷔작이 처참하게 흥행 실패한 뒤까지 그는 집에 쌀이 떨어질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은 적 있다. '괴물'과 '설국열차'도 규모가 커지자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난항을 겪었다. 그때마다 그를 살린 것은 재능이 보이는 그를 믿고 밀어준 한국영화 산업을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투자자를 못 구해 빙빙 돌던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는 프로듀서 차승재, 톱스타 송강호, 이미경 CJ 부회장이 가세하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이후 CJ는 봉준호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한국영화 산업은 모험적인 도전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봉준호라는 걸출한 인재를 키워냈다. 봉준호가 재능의 꽃을 피울 수 있던 배경에는 때마침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한 한국영화 산업이 있었다.

[양유창 기자 sanity@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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