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부커상 사상 처음으로 후보 오른 만화가 "불안장애와 싸우며 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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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국내 출간된 만화책 '사브리나' 작가 닉 드르나소
"문학이란 딱지는 인위적인 구별… 세계적 호평 잊고 차기작 준비"


"내 만화가 무엇으로 분류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만화책 '사브리나'가 영국 최고 권위 문학상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을 때, 즉각 사건으로 여겨졌다. 2018년 만화가 후보에 오른 건 맨부커 50년 역사상 처음이었다. 지난달 국내 출간을 맞아 이메일로 만난 미국 만화가 닉 드르나소(31)는 "문학이라는 '딱지'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별"이라며 "어떻게 불리든 서점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독자에게는 낯선 장르가 아닐 것"이라고 했다. "만화 말고는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옵션이 없다."

'사브리나'의 만화가 닉 드르나소는 "그리기 전에 모든 내용을 글로 먼저 정리한다"고 했다. 오른쪽은 만화 속 사라진 사브리나의 비보(悲報)를 접하고 고꾸라진 유약한 남자친구 테디. /ⓒKevin Penczak·아르테

어느 날 평범한 여성 사브리나가 납치·살해된다. 이 소식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음모론으로 퍼지고, 남겨진 이들이 겪는 고통을 다룬다. 이 단출한 줄거리에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축제 '새로운 재능상' 등의 호평이 쏟아진 이유는 연출 방식 때문이다. 속임수처럼 주인공 사브리나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잔혹한 스토리와 달리 폭력적인 장면은 전무하며, 심지어 색감은 밝은 파스텔톤, 등장인물은 동그랗고 귀여운 축에 속한다. "장난감이나 어린 시절과 관련된 부드러운 색을 좋아한다. 내 어두운 이야기와 서로 보완·대비되길 원한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이 만화에 대해 "사람을 천천히 미치게 만드는 전염병"이라 평했다.

촘촘히 배열된 칸, 정적인 동작과 무표정에서 독자는 고도의 강박을 감지하게 된다. 만화는 "당시 겪은 불안 장애"에서 왔다. 2014년 여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할 정도로 관계가 깊어졌다. 처음 누리는 행복은 망상을 불렀고, 여자친구가 납치돼 다신 못 볼지 모른다는 강박으로 나아갔다. "나는 지나치게 불안한 인간이었다. 때로 밖에 나가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그렇기에 고립된 관점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브리나가 사라지자 극도의 무기력에 빠져 집에 틀어박히는 남자친구 테디에게 작가의 성향이 반영돼 있다. "마음을 추스르려 콜로라도 공군기지에서 일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테디가 공군 친구 캘빈의 집에서 신세 지는 큰 얼개는 이 여정에서 나왔다. 만화 속 한국 여성 '진선'도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며 배우자를 만난 동료들에 대해 친구가 해준 얘기에서 떠올린 것이다." 만화는 곧 실사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괴담과 음모론의 온상이 돼버린 대안 매체가 서사의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 다만 그는 "인터넷을 악당으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온라인으로 음반을 사고 친구를 사귄다. 한국의 경우 소셜미디어가 어떤 식으로 정신적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싶다." 열여덟 살에 시작해 이제 겨우 두 권의 만화책을 냈으나 세계적 관심이 쏟아진다. "이른 칭찬이 확실히 큰 압력으로 작용하지만 고맙게도 이런 부담을 무시할 수 있었다." 차기작이 절반쯤 완성됐다. "학교 강의실을 배경으로 11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정상혁 기자 ti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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