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문학사의 재정립을 위하여
2019년 올해는 3?1절 10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시의 역사는 대한제국의 건국, 일제 강점기, 8?15광복, 미군정 실시, 한국전쟁, 반공을 내세운 제1공화국의 독재,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제3공화국 시대의 경제개발, 유신독재, 신군부독재, 5?18광주민주화운동, 소련 연방 해체, 문민정부의 탄생 등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을 헤쳐 나오면서 전개되었다.
한국 현대시의 전개 과정을 참신한 시각에서 담아냈던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수정증보판이 나왔다. 초판이 나온지 어언 14년, 그만큼의 공백을 메워 보다 ‘현대시문학사’에 걸맞은 책으로 손질하였다. 기존 원고를 다듬고 2000년대 문학사와, 한국문학에 대한 전망을 담은 부록을 추가하여 내용을 풍성히 하였다.
탈경계 시대의 한국 현대 시
어느 시대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현재진행 중인 2000년대의 시문학사를 기술하는 것은 까다로운 작업일 것이다. 이경수 교수는 ?탈경계 시대 현대시의 모색과 도전?에서 ‘탈경계’를 키워드로 2000년대 시문학사를 정리한다. 2000년대는 지난 세기를 지배해온 중심적인 가치, 담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시대이다. 시단 역시 탈국가, 탈장르, 탈서정을 표방한 시와 담론이 적극 생산되었다. 경계를 나누던 이전 시대의 가치와 담론과 달리, 전 지구적 차원에서 타자와의 공존이 문제가 되었고, 이는 시단의 윤리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세대 시인의 약진이다. 2000년대를 전후해 등장한, 일명 ‘미래파’ 시인들은 동일성을 추구하는 좁은 의미의 서정에 동의하지 않았고, 다성적인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시적 주체를 탄생시켰다. 예를 들어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여자이면서 남자인 ‘시코쿠’는 남성 대 여성으로 양분되는 젠더의 고정관념과 사회적 억압에 정면 도전하는 새로운 주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탈경계에 대한 사유는 200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경계를 횡단하는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국경’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식민지 시절을 경험한 한국 시는 ‘나라 세우기’라는 지상 과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부터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지구화 담론, 탈국가, 탈민족, 탈경계 담론이 전개되었고, 시단에서 국가와 민족이라는 사명에서 자유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한편 2000년대 시의 특징으로 정치적 상상력의 갱신을 들 수 있다. 촛불시위, 용산참사,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쌍용자동차 노조의 파업투쟁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시인들은 문학적 실천을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304 낭독회’, 생일시 쓰기 활동 등과 같은 사회참여적 문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후 시의 사회 참여는 페미니즘과 맞물려 참고문헌 없음 및 페이라이터 활동, 문단 내 성폭력 고발 등 일상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번져가고 있는 추세다.
윤리와 탈경계를 내세운 2000년대 시단은 이제 비로소 시의 윤리 감각을 제대로 시험받고 있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선보인 시가 주례사 비평, 미당 논쟁, 미투 운동 등 내부 문제에 있어서도 유연한 감각으로 기성의 관습과 제도를 뛰어넘어 진정한 시의 윤리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위기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시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후 한국 현대 시의 행방은?
부록에서는 앞으로의 현대 한국 시의 전망을 비추는 두 개의 글을 담고 있다. 먼저 권성훈 교수의 ?4차산업혁명과 한국 시의 미래는??에서는 4차산업혁명이 한국 현대 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했다.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던 문자 매체는 제3의 매체에 의해 다양하게 전달되며 또다른 작가, 독자 사이에서 재생산되면서 신세대 문학을 창출하고 있다. 그 예로 온라인에서 전문 창작인이 아닌 독자가 SNS에서 창작하여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일명 ‘SNS 작가’를 들 수 있다. 권성훈 교수는 이들이 작가면서 독자로서 활동한다는 점에서 ‘멀티 작가’라고 명명한다. 한편 기성 작가의 블로그나 카페 등의 웹(web)에서 다양한 시인, 독자들과 시로 소통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기도 했다. ‘문장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등의 웹진이 대표적인 예이다.
앞으로 도래한 4차 산업의 문학은 매체와 매체 간의 다양한 융합, 말하자면 문학의 이노베이션을 지향하는 통합된 예술 혁명이 될 것이다. 권성훈 교수는 디지털 문학의 발전이 아날로그 문학이 쇠퇴하는 과정이 아니라 디지털 매체와 상호작용을 통한 신개념의 문학행위와 창작활동의 개시를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위기론만 곱씹을 것이 아니라 시의 재도약을 꾀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독자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에서 이승하 교수는 독자의 위상이 급상승한 시대에 한국 현대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 미디어와 SNS의 발달로 인해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지고, 더 나아가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독자가 능동적 생산자는 물론이거니와 배급자, 문학평론가의 역할마저 겸하게 되었다. 시인이기도 한 이승하 교수는 독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생길 수 있는 폐해를 지적한다. 작가와 독자가 바로 연결되는 유통 구조에서 작가는 독자의 입맛에 맞춘 작품을 쓸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문학의 진지한 사유와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하 교수는 이러한 폐해를 경계하면서 문학의 본령을 지킬 것을 주문한다.
곧 3?1절 100주년이다.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퍼지던 시대, 육당 최남선, 김억, 현상윤 등의 선구자들이 새로운 시를 탐색하던 때도 그 즈음이었다. 그들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수백 명의 시인들이 한국 현대 시를 고민하고 짓고 깨부수며 지금에 이르렀다. ?한국 현대시문학사? 역시 그들처럼 기존의 책에서 멈추지 않고 진정한 ‘현대시문학사’를 위해 바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백여 년 전의 문학사와, 현재진행 중인 생생한 이야기와 앞으로의 전망까지 담은 ?한국 현대시문학사? 수정증보판은 한국 시문학사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최적의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