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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칠순을 맞으신 둘째 사촌형님의 고희연(古稀宴) 행사를 23일 낮에 가졌다. 형님의 생신은 29일(음 4.11)인데 출가하여 청주에서 사는 딸과 서울에서 사는 아들의 사정에 맞추어 생신 전 일요일에 고희연을 갖게 된 것이다.

읍내 중국음식점에서 가진 이 고희연에는 형님의 딸 내외와 중학생 외손주들, 지난해 배필을 맞아 화촉을 밝힌 아들 내외를 비롯하여 친인척 30명 정도가 참석했다.

▲ 다 함께 축배를 들고
ⓒ 지요하
뜻 있는 행사인데 그냥 음식이나 먹고 끼리끼리 '지방방송'만 하다가 헤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50대 중후반의 나이를 무릅쓰고 일어서서 '사회'를 맡아 청년 같은 본새로 행사를 유쾌하고 재미있게 이끌었다.

자화자찬이 좀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맡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형수님이 내게 일찌감치 행사 계획을 알려 주시면서 행여 내가 다른 피치 못할 일로 몸을 빼기라도 할세라 "당숙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니 만사 제폐하고 꼭 참석해야 한다"고 굳이 다짐을 놓은 것도 다 뜻이 있는 일이었다.

하여간 참석자 골고루 짝을 짓거나 단독으로 노래를 부르도록 유도했고, 사이사이에 웃음을 유발해서 자리를 시종 즐겁게 했다.

나의 둘째 사촌형님 지우하(池雨夏)씨는 우리 고장에서 유명 인사에 속하는 분이다. 지극한 향토애로 오랫동안 고장 체육 발전의 일선에서 많은 일을 해왔다. 1960년대 태안면 시절부터 고장 체육회 일에 관여하여 70년대에는 태안읍 체육회장을 역임했고, 1989년 태안군의 복군(復郡) 이후에는 군체육회의 상임부회장으로 오래 헌신 봉사했다(형님이 오래 상임부회장 직함으로 머문 까닭은 고장의 체육회장직은 자치단체장이 말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군체육회 상임고문으로 여전히 일을 돕고 있지만 평생 동안 고장 체육발전에 헌신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고 별로 넉넉지 못한 살림에 사비 지출도 적잖이 감수해야 했다. 그런 공으로 꽤 늦은 감은 있지만 2002년에 8만 군민의 이름으로 수여하는 '태안군민대상(체육부문)'을 받으셨으니 어느 정도 위안은 되었을 법하다.

형님은 인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분이다. 한잔 드신 상태에서 옛 이야기를 할 때는 더러 눈물을 닦기도 한다. 세상사의 야릇한 곡절을 바르게 헤아리는 분별력과 혜안도 어느 정도 지니셔서 한때 충청도의 '신지역감정' 바람에 고장의 유지급들이 대부분 휩쓸릴 때도 끝내 중심을 잃지 않으신 분이다.

▲ 고희를 맞아 연회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지우하씨(태안군체육회 상임고문)
ⓒ 지요하
나는 내 고등학생 시절의 형님 모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모든 게 궁핍한 시절이었다. 간혹 길을 가다보면 당시 택시 영업을 하던 형님이 나를 발견하고 차를 세워 유리창을 내리고는 내게 200원, 300원씩 용돈을 주셨다. 사촌동생에게 가끔 용돈을 주시는 사촌형님의 존재란 사실 흔치 않을 터였다.

내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형님은 종종 맥주를 사들고 우리 집을 찾았다. 고질 신경통으로 생활 일선에서 후퇴하여 집안에서 무료하고 적적하게 또는 침울하게 사시는 내 아버님을 위안해 드리기 위해서였다. 마루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던 숙부와 조카의 모습은 내 뇌리에 아련하고도 그리운 영상으로 남아 있다.

형님은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더욱이 내가 '보증 빚'에 치어 생활의 난조를 겪을 때는 적이 안타까워하시며 내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셨다. 그런 분인지라 고희연을 갖는 자리에서도 내 아들 녀석과 조카 녀석에게, 즉 당신의 당질 아이들에게 용돈 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형님 내외분은 어제도 내 조카 녀석의 몇 년 전 얘기를 즐겁게 입에 올렸다. 3개 동으로 되어 있는 샘골 연립주택의 맨 앞 동에서 형님이 사실 때의 일이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맨 뒷동 저희 집 문이 잠겨 있자 가운데 동 우리 집에 왔고 우리 집 문도 잠겨 있자 형님 댁을 찾아가서 초인종을 눌렀다는 것이다. 완전히 남이 아니고 어떻게 되는 사이라는 것을 그 어린 것이 알고 우리 집에 와서 초인종을 눌렀다고, 너무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라고 형님은 또 그 얘기를 하며 파안대소를 했다.

12시부터 2시 30분까지 이어진 그 고희연 자리에서는 한가지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 셋째 사촌 형수님이 노래 대신 '시낭송'을 했는데 내 선친의 유작시를 암송으로 낭송한 일이다. 형수님은 작은 시아버님의 그 시가 깊이 가슴에 와 닿고 다시 읽을수록 더욱 심금을 울려서 마침내 외우게 되었다고 했다. 몇 년 전에 외웠다는데 기억을 떠올리는 시간이 조금씩 필요했지만 한군데도 틀리지 않고 끝까지 낭송을 하여 내게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주었다.

▲ 아버지께 축가를 불러 드리는 딸(중학교 음악교사) 내외
ⓒ 지요하
아들인 나도 외우지 못하는 아버님의 유작시를 사촌 형수님이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도 고마웠다. 그 시는 <나의 사세(辭世)/바람 뫼뿐이어라>는 아버님의 마지막 유작시였다. 아버님 별세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여 읽어보다가 왈칵 눈물을 쏟기도 했다. 1994년 '충청남도문예진흥기금'의 도움으로 선친의 유고시집을 펴냈는데 그 시를 표제시로 맨 앞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나의 선친(지동환님)의 그 유작시를 소개해볼까 한다.


바람 뫼뿐이어라
―나의 辭世


내 오래 잊었던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당신
온갖 번뇌와 방황 속에 자라온 내 작은 영혼이
기인 여행 끝에 돌아와 이제 당신 품에 안길 때
꽃은 웃고 산새 노래 불러 나를 맞이함은
돌아온 탕아를 맞는 늙은 어버이의 다숨일까
쌓인 낙엽 긁어모아 불태우고
남겨지지 못할 모든 애환이 연기 속에 사라져 갈 때
마지막 장송곡은 울려 퍼지고
무심한 흰 구름마저 하늘 저리 오가거늘
이제 여기 머무를 것은 오직
바람 뫼뿐이어라
바람 뫼뿐이어라.


지금 다시 이 시를 읽자니 또 눈물이 난다. 아버님이 병고의 자리에서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마음으로 지으신 시임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아버님의 이 유작시를, 지난해 이순(耳順)의 세월을 맞으신 셋째 사촌 형수님이 둘째 형님의 고희연 자리에서 암송했다. 그리하여 내 아버님도 둘째 조카의 고희연에 사뿐 참석하신 격이 되었다.

형수님의 시낭송이 끝나자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는 둘째 형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20년 세월 저 너머 우리 옛집 누추한 마루에서 숙부와 둘째 조카가 즐겁게 술잔을 나누고 있는 풍경이 아련히 비쳐오는 듯했다.

▲ 축가를 부르는 아들(회사원) 부부
ⓒ 지요하
형수님의 시낭송 다음에 나는 미리 두 권 준비해 온 천주교 성가집을 펴들고 528번 노래 <축하합니다>를 아내, 가운데 제수씨, 지난해 천주교 신자가 된 당질댁과 함께 힘차게 2절까지 불렀다.

지지난해 여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두 아이를 기르며 살고 있는 30대 중반의 당질댁은 그래도 하느님 신앙 안에서 열심히 활기차게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아버지와 한 자리에 앉아서 시아버지께 일일이 음식을 떠 드리는 등 잔신경을 많이 썼다.

축가 다음에 나는 단독으로 노래를 불렀다. 좀 전의 셋째 형수님의 내 선친 유작시 낭송에서 받은 좋은 자극 같은 것이 내 가슴에 담뿍 자리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테너 가까운 목소리로 가곡 <옛 동산에 올라>를 2절까지 불렀다. 내가 애창하는 가곡들 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듣는 내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면서 보니 모두 놀라거나 감동하며 내 노래에 열중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행사를 모두 마쳤을 때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흐뭇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2시간 30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는 말도 했고 오늘의 주인공이신 둘째 형님 내외와 여러 사람이 내게 감사를 표했다.

모두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 승합차 안에서 어머니는 내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했다. 내 노래에 대한 감동을 누누이 말했다. 제수씨와 아들 녀석도 나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희를 맞으신 둘째 사촌형님도, 그 고희연을 마련한 형님의 딸 내외와 아들 내외도, 내 선친의 유작시를 암송으로 낭송한 셋째 사촌 형수님도, 이승에 계시지 않으면서도 둘째 조카의 고희연에 사뿐 참석하신 내 아버님도, 그 외 모든 분들이 두루두루 고마워지는 한량없는 마음이었다.

비록 일년에 한 번 있는 우리 태안 성당의 야외미사(몽산포)에 가족 모두 생전 처음 참례를 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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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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