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울어버린 어머니 구순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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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1.08. 오후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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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와병으로 요양병원 신세, 침대 누운 채 집에서 축하파티
60대 자녀 재롱에도 웃음 없어 너무 늦어버린 장수잔치였나


여든을 훌쩍 넘긴 노부부가 정든 고향을 떠나 딸이 사는 수도권 신도시로 이사를 왔다. 자녀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익숙한 듯했지만 노년의 외로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들이 없는 데다 큰딸이 미국에 사는 까닭에 둘째 딸 집 옆에 거처를 정한 지 육칠년째다. 내 장인어른, 장모님 얘기다.

작년 봄 장인어른 구순(九旬)잔치를 했다. 잔치라기보다 조촐한 가족모임이라 해야겠다. 명색이 열 살 꺾어지는 나이인데 지나치기 아쉽고 해서 잔치 모양을 내 보기로 했다. 호텔도 좋고 레스토랑도 괜찮겠지만 그냥 딸이 사는 아파트에 출장 뷔페를 부르기로 했다. 한 살 아래 장모님의 온전치 못한 건강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일시 귀국한 큰딸과 사위, 손주들과 80대 후반 동생부부, 조카들까지 30명 넘게 모였으니 제법 시끌벅적했다. 목사인 큰딸의 감사기도, 둘째 딸의 감사패 증정, 막내딸의 감사편지 낭송, 각자 만든 축하 영상편지 시청, 손주들의 애교떨기, 어버이은혜 합창….

“우리 아버지 그리고 엄마, 불러도 불러도 너무나 좋은 이름입니다. 튼실한 버팀목이자 따뜻한 울타리입니다. 저희를 반듯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진심 사랑하셔서 감사합니다. 90星霜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저희 곁에 그냥 계신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못다 한 효도, 한참 더 하고 싶습니다. 두 분 건강한 백수 가꿔나가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패 글귀다. 우리한테는 나름 뜻 깊은 장수잔치였다.

장수는 누구나 바라는 바다. 다들 병석에서의 노년을 걱정하면서도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살길 꿈꾼다. 그래서 수연(壽宴), 곧 장수를 축하하는 행사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예부터 수연은 자식자랑, 돈자랑이라 했다. 잘난 자식이 있든지 가정 형편이 좋을 경우 가까운 친지는 물론 먼 동네 사람들까지 불러놓고 한바탕 잔치를 벌이곤 했다. 반대로 내세울 만한 자식이 없든지, 하객들에게 대접할 만한 여유가 안 될 경우 언감생심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인생 첫 수연인 60세 회갑연(回甲宴)은 천덕꾸러기 된 지 오래다. 수명이 워낙 길어져서다. 회갑이라며 친지 모아놓고 잔치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직 돈벌이 현장에 있거나 부모가 생존한 경우가 적지 않으니 잔칫상 받기가 쑥스럽기도 할 것이다. 단출하게 가족끼리 식사하거나 국내외 여행 다녀오는 게 대세다. 이쯤 되면 회갑을 아예 수연 목록에서 빼 버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70세 고희연(古稀宴)도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건강한 사람은 70세도 청춘이긴 매한가지다. 백수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65세에서 75세 사이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할 정도이니 고희가 장수 축하 받을 나이는 분명 아닐 성싶다. 80세 산수(傘壽)의 경우 평균기대수명에는 못 미치지만 요즘 장수잔치의 대세인 것 같다. 호텔 같은데 가면 산수연 현수막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졸수연(卒壽宴)이라고도 불리는 구순잔치는 대략 수연의 끝자락에 속한다. 88세 미수연(米壽宴) 다음이겠다. 요즘 말끝마다 100세 시대라지만 백수연(白壽宴)은 여전히 기대난망이다. 굳이 백세(百世)를 채우지 않고 1년 앞당겨 99세에 수연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00세가 아직은 하늘이 내려주는 나이라고들 하니 90대 진입만 해도 수명에 관한한 크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이애란이 ‘9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하지 말라 전해라’고 노래한 걸 보면 이쯤 살다 가면 그리 섭섭하지 않다는 뜻일 게다. 실제로 요즘 장례식장에선 90세가 조문 인사의 중요한 잣대가 된다. 고인의 나이를 물어봤다가 80대란 답이 나오면 “아이고 조금 더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섭섭하겠다”고 위로하지만 90세를 넘겼다고 하면 그런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의 90세 이상 인구는 17만2000명쯤 된다. 매년 1만6000명가량이 90대에 진입한다. 90세까지 산다는 게 축하할 일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만6000명 중 자녀나 요양시설 도움 없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노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극소수이지 싶다. 만수무강, 무병장수면 참 좋으련만 그게 어찌 사람 뜻대로 될 일인가.

내 어머니도 지난 주말 ‘영광스럽게도’ 90대 진입에 성공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와병중이시다. 하반신 거동이 전혀 안 돼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고 중증 치매까지 앓아 우리 집 근처 요양병원에 계신 지 2년이 넘었다. 이제 당신 나이도 못 맞히시고, 사랑했던 큰아들이 오래전 곁을 떠났다는 사실도 헛갈린다.

그래도 구순잔치는 해야지 싶었다. 이것저것 모든 게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미쳐서다. 영광의 90대 진입 깃발을 든 바로 그날, 장인어른 잔치를 했던 바로 그 자리에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그리고 손주들이 모였다. 비슷한 모양으로 잔치 흉내를 냈지만 좀처럼 흥이 나지 않은 것은 왜일까. 거실 침대에 누운, 잠깐 휠체어에 앉은 주인공에게서 함빡 웃음을 기대한 건 역시 불효자의 욕심이었나 보다.

어머니는 당신 18번인 찔레꽃과 섬마을처녀를 따라 불렀지만 시종 무표정에 모기소리였다. 60대 아들이 어린 시절 약장수 흉내를 재연하고, 환갑 넘긴 딸이 잊혀진 동화(童話)로 재롱을 피웠지만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셨다. 기념사진 찍으며 손주들이 온갖 애교를 떨고서야 겨우 희미한 웃음을 지으셨다. 결국 어버이은혜 합창은 눈물바다를 이루게 했다. 너무 늦어버린 장수잔치였다.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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