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할머니의 짝짝이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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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저자

나의 할머니는 아흔이 넘으셨다. 얼마 전 만나러 갔을 때, 휴대폰으로 사진 앱을 켜서 할머니와 함께 토끼 귀를 달고 사진을 찍었다. 요즘엔 이런 것도 되느냐고 신기해하셨다.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보시라고, 휴대폰 배경화면으로도 설정해 드렸다.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 손을 많이 탔다. 이제 60대가 된 나의 부모를 보면서, 그 무렵 할머니의 삶을 되돌아본다. 지금보다 젊고, 건강하며, 나의 부모와 닮은 얼굴을 하고 내게도 한 움큼 정도 물려준 습관이나 기질을 품은 여자.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서 사 남매를 키운 것은 그 나이대 여성들에게 특별하지 않은, 그저 보통의 삶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삶의 결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방식 속에서 삶은 재건축된다.

어렸던 내가 신발이나 양말을 짝짝이로 신으면 할머니는 쭈그리고 앉아서 왼발, 오른발을 만져가며 바로 신겨주었다. 몇 년 전 할머니 집에 있을 때, 추우니까 신으라고 할머니가 양말을 건넸다. 할머니가 개켜놓은 빨래 속에서 양말은 짝짝이였다. 할머니가 그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덜컥 실감 났다. 할머니가 알면 슬퍼할까 봐 말없이 양말을 받아 신었다. 그렇게 짝짝이 양말을 신고 할머니와 나는 잘 놀았다. 틀린 것을 바로잡아주려는 사랑과 덮어주고 싶은 마음은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의 나는 어떤 연령대를 통과할 때마다 나에게는 아득하게 멀었던, 그 시간을 산 사람들을 떠올린다. 지금 나는 막 결혼해서 연년생 딸을 업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집안일과 며느리 역할에 던져졌던 엄마의 나이에 이르렀다. 사진을 휴대폰으로 주고받을 만큼 바뀐 세상에서 30년 전의 엄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그래 봤자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상상력이 나의 세계를 확장한다. 내 몸 바깥을 넘어갈 수 없는 협소한 경험과 생각이 한껏 발돋움한다. 나는 그렇게 종종 타인이 되고, 우리는 서로가 된다.

[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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