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요즘 트렌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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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글 양현진(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영화 '캡틴 마블' 포스터,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최근 업계 사람들이 모인 우연한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은 페미가 트렌드잖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술자리는 한층 뜨거워졌다. 하필 최근 화제를 모았던 여자대학교 그중에서도 여성부 기자 출신이라는 특이 사유로 고문에 가까운 젠더 이슈를 폭격 맞았던 나는 술잔을 몇 잔 비우고 나서야 간신히 한마디를 해냈다. “근데 그렇게 융통성 없고 재미없는 인권운동이었으면, 그게 트렌드가 됐겠어요? 요즘 세상에.”

  

페미니즘에 대한 원론적인 접근은 차치하고, 최근 사회문화 전반적으로 ‘여성’이 키워드인 건 맞는 것 같다. 지금의 페미니즘 트렌드(편의상 표기)는 사실 대중이 ‘여자’의 이야기에 열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즉, ‘여자’가 궁금하고 ‘여자 이야기’를 재밌어한다는 거. 그래야 돈이 되고, 그러니까 트렌드인 거지.

이전보다 분명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늘어났다. 2일 첫 방송된 SBS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강력1팀 팀장 차영진 캐릭터(김서형 분)를 위시로 미스터리 감성추적극을 선보인다. 장르의 명가 OCN 드라마 '본대로 말하라'에서는 시골 순경에서 광역수사대 형사로 고군분투하는 차수영(최수영)의 성장기가 스릴러 장르와 어우러져 호평받는 중이다.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진 라미란은 '걸캅스'에 이어 '정직한 후보'까지 연타로 단독 주연 코미디 영화를 성공시키며 여자 주인공으로서 의미 있는 선전을 기록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에 빛나는 화제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여성 프로듀서이자 영화인인 찬실이(강말금)가 건네는 독특한 형태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해외는 어떠한가. 비록 오스카의 확실한 선택은 받지 못했지만 '작은 아씨들' '결혼이야기' '밤쉘' 모두 오롯이 여자들의 시각이 담겨있는 여자 이야기다.

 

이 여자 이야기가 흥미로워진 지점은, 그게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로 구분된 젠더 이슈가 아닌 개인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면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삶과 취향, 욕망이 투영된 이야기 자체로써 대중의 관심을 유발한다는 뜻. 사실 사회 문제란 게 그렇다. 대단히 거창해 보이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결국 개인의 문제거든.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이른바 ‘페미니즘 트렌드’라 불리는 이 흐름은 결국 여자 이야기가 메인 스트림으로 떠올랐다는 방증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매력적인 화두가 되었다는 거지.




최근 글로벌 맥주 브랜드인 하이네켄이 내놓은 캠페인 광고는 이러한 트렌드를 잘 반영했다. 레스토랑에서 서버는 남자에겐 햄버거를 여자에겐 샐러드를 건넨다. 클럽이나 파티 등지에서도 남자에겐 맥주를, 여자에겐 칵테일을 서빙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틀린 짝짓기. 햄버거와 맥주를 주문한 건 여자였고, 샐러드와 칵테일을 원한 건 남자였다. 이 광고의 마지막 카피를 예상해보자. 아마 ‘여자도 하이네켄을 마신다’ 정도가 무리 없겠지만, 엔딩 카피는 ‘남자도 칵테일을 마신다(Men drink cocktails too)’였다. 여자의 시점을 말하되 이를 한 번 더 트위스트해 취향과 결부한 굉장히 영리한 화법. 이 엔딩 카피 때문에 이번 캠페인 광고가 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건 당연한 결과겠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더 많은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다. 더 다양한 여성의 삶과 취향, 특히 욕망이 수면 위로 드러나길 바란다. 최근 개봉한 갖가지 인간 군상의 돈 가방 쟁탈 레이스인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주인공 연희(전도연)를 응원하는 관객의 심리는 단순히 여자여서가 아니다. 연희가 가진 돈 가방을 향한 선연한 욕망이 누구보다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이어서다. 여자의 욕망을 터부시하던, 혹은 여자의 욕망이 반드시 남자에게 투영된 것이어야만 존재 가치가 있던 촌스러운 시대를 떠올리면 이 얼마나 섹시한 목표지향적 인물의 등장인지.

지난 연말, 거기서 거기인 방송국 시상식은 지루했다. 하지만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 트로피를 거머쥔 박나래가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이 상, 꼭 받고 싶었다” 하고 물기 젖은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낸 순간, 그리고 베스트 엔터테이너상을 수상한 장도연이 “(단상까지인)다섯 계단을 오르는데 13년이 걸렸다”고 가슴 뻐근한 고백을 토로한 순간, 이 뻔하디 뻔한 시상식이 빛을 발했다. 모르긴 해도 그 순간 브라운관 너머의 수많은 박나래와 장도연이 기립박수 치며 느꼈을 그 희열을 단 몇 글자에 담아내긴 어려울 거다.

이번 오스카 시상식에서 후보에 오르지 못한 여성 감독들의 이름이 새겨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나탈리 포트만은 또 어떠한가. 피켓을 들고 영화제를 보이콧하는 대신, 영화제가 잊은 그들의 이름을 드레스에 새겨 대중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만드는 것. 이 드레스 퍼포먼스는 그간 보아온 그 어떤 캠페인보다 함축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이토록 우아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줄 아는 여자들이 건네는 메시지는 묵직하고 강렬한 한 방이 있다.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서. 그 날 자리를 파하기 직전,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두꺼운 원서도 사보고 공부도 들입다 해봤지만, 페미니즘 별거 없어. '캡틴 마블' 보고 나더니 내 딸 꿈이 경찰관으로 바뀌었더라. 그거면 된 거 아냐?”




페미니즘이 진정 원하는 건, 여성 스스로 온전히 꿈꾸고 움직이는 시대일 거다. 하지만 링 위로 상대를 끌어들여 단지 이겨 먹으려는 공격 방식으로는 아무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심지어 나와 같은 라인에 서 있다고 믿었던 이들조차도. 그게 이 땅에 진짜 히어로가 되어준 '캡틴 마블'이 필요한 이유고, 더 많은 여자 이야기가 트렌드가 되어야 할 이유다.

양현진(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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