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범죄인 인도법은 죄가 없다

입력
기사원문
강혜란 기자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강혜란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한국은 중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지요. 홍콩 역시 한국·미국 등 여러 나라와 협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홍콩이 중국에 빌미를 주는 이번 법안은 절대 안 됩니다.”

캐나다에 사는 홍콩 출신 올리비아(가명)가 기자에게 e메일로 호소한 내용이다. 그는 홍콩 정부가 추진해온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송환법)의 완전 폐지를 지지하는 한국 내 연대시위를 널리 알려달라며 지난 주말 연락했다. 1970년대 초반 태생으로 80년대 캐나다로 건너갔다는 올리비아는 “이번 법안이 통과되면 중국에 대한 홍콩의 방화벽(firewall)이 사라지고 마음 놓고 방문할 수도 없다”고 한탄했다.

올리비아 말처럼 한국은 2002년 중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었다. 덕분에 신도 성폭행을 저지르고 중국에 도피 중이던 기독교복음선교회(JMS) 교주 정명석을 국내 송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범죄인 인도 조약은 중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나라로 도망친 피의자를 자국으로 끌고 와 처벌할 수 있게 돕는다. 한국은 1988년 ‘범죄인 인도법’을 제정한 뒤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 등 79개국(지난해 10월 기준)과 인도조약을 맺고 있다.

노트북을 열며 6/20
이번 송환법 사태의 발단이 된 찬퉁카이 사건은 홍콩 ‘범죄인 인도법’의 빈틈에서 발생했다. 속지주의를 택하는 홍콩은 대만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한 찬퉁카이를 단죄할 길이 없다. 대만은 관련 조약이 없어 홍콩에서 그를 데려올 수 없다. 한국이었다면 홍콩에 범죄인 인도 청구라도 해봤을 텐데 사각지대에 놓인 찬퉁카이는 이르면 오는 10월 출소할 판이다.

홍콩 역대 최대인 200만 시위 기세에 밀려 홍콩 정부는 문제의 법안을 서랍 안에 도로 넣었다. 엊그제 캐리 람 홍콩행정장관은 TV 회견을 통해 “국민 불안과 공포를 야기한 것”을 사과했다. ‘중국송환법’으로 불릴 정도로 시민들이 법의 오남용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법의 완전 폐지는 밝히지 않았다. 찬퉁카이 같은 사례가 더 나온다면 법안을 둘러싼 논란도 불가피하다.

“한국이 중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을 수 있는 건 한국 사법체계가 탄탄하고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홍콩은 그렇지 않다”고 올리비아는 지적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뉴질랜드 법원은 중국인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인의 중국 송환을 거부하면서 “중국에선 고문으로 얻은 자백이 증거로 쓰이는 등 공정한 재판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2047년까지 ‘일국양제(一國兩制)’가 보장된 홍콩은 중국에 대해 그렇게 ‘노(NO)’ 할 수 있는가. 시민들 물음에 홍콩 정부가 답할 차례다.

강혜란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네이버 메인에서 중앙일보를 받아보세요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