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호’ 세계적 명장…봉준호의 5대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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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주인공은 단연 한국 영화 ‘기생충’이었다. ‘기생충’은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에 이어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4관왕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지난해 5월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거머쥐며 시작된 ‘기생충’의 10개월 시상식 여정은 올해 아카데미 최다 수상 기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됐다.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은 세계 영화사에 남을 대기록을 썼다. 봉 감독은 ‘로컬’ 오스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한국 영화 101년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역사에 남을 작품이 탄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명장 반열에 올라선 봉준호 감독 리더십에 주목한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만의 디테일, 일류 배우부터 무명 배우까지 최고의 역량을 끌어내는 배려 등이 봉 감독을 나타내는 리더십으로 꼽힌다.



▶1. 다 계획이 있는 ‘봉테일’ 미학

▷꼼꼼한 스토리보드로 촬영 효율 극대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영화 ‘기생충’ 속 기택(송강호 분)의 명대사는 봉준호 감독을 위한 멘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말 그대로다. 그에게는 다 계획이 있다. 스토리는 물론 전체 촬영 구도와 일정, 그리고 비용까지. 봉 감독은 영화에 필요한 모든 로드맵을 완벽히 만든 후에야 촬영에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품이 놓인 위치 하나하나가 갖는 의미까지 헤아리는 꼼꼼함 덕에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철저한 사전 계획과 디테일이 주는 효용은 기업 경영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봉테일’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만의 ‘스토리보드’다. 스토리보드란 인물 위치나 소품 위치, 카메라 이동 방식 등을 담아내는 그림 대본이라고 보면 된다.

봉 감독은 배우·스태프를 막론하고 누구나 앞으로 어떤 장면을 찍을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꼼꼼하게 스토리보드를 그린다. 실제 영화 촬영 장면과 스토리보드를 비교해보면 다른 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완벽하게 짜인 스토리보드는 촬영 과정에서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봉 감독은 계획하지 않았던 장면을 추가 촬영하지 않는다. 이는 비용 최소화로 이어진다.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 촬영 장비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의도치 않은 촬영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 낭비로 직결된다.

‘캡틴 아메리카’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배우 크리스 에반스는 영화 ‘설국열차’에서 봉 감독과 호흡을 맞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는 사람처럼 촬영에 임했다. 혹시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길까 봐 여분의 장면을 찍어놓는 다른 감독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집을 짓기 위해 철물점에 가서 ‘못 한 포대를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53개의 못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스토리보드가 확실하면 연출 속 디테일도 보다 꼼꼼히 챙겨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디테일은 관객의 영화 몰입도를 높인다. ‘마더’에서는 석양을 배경으로 관광버스에서 춤추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원하는 각도로 석양이 지는 날짜를 계산했다. ‘설국열차’에서는 열차 각 칸의 이름과 설정을 세트로 만들고 총알이 오가는 거리까지 계산했다.

‘기생충’에 전 세계가 열광한 이유도 여기 있다. 영화 속 등장하는 각종 소품의 각도는 물론 박동익 사장(이선균 분)이 매경이코노미 ‘올해의 CEO’로 선정됐다는 설정까지 계산돼 있는 식이다.

분명한 로드맵이 주는 장점은 또 있다. 배우·스태프와 명확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빡빡한 촬영 일정 속에서도 봉 감독이 주 52시간 근무와 배우·스태프 식사시간을 정확하게 챙길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배우 송강호는 지난해 5월 프랑스 칸 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감독의 정교한 연출력에 놀랐다”며 “그중 가장 정교한 지점은 밥때를 칼같이 지켜줬다는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봉준호 감독은 앞으로 어떤 장면을 찍을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꼼꼼하게 스토리보드를 그린다. 실제 영화 장면과 스토리보드를 비교해보면 다른 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기생충 스토리보드와 영화 속 한 장면.


▶2. 덕장 봉준호 ‘배려의 리더십’

▷무명 배우·스태프 잊지 않고 늘 감사

“봉 감독은 적(敵)이 없어요. 큰 상을 받고 승승장구하는데도 누구 하나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평소에 무명 배우·스태프 할 것 없이 두루 잘 챙기기 때문이죠.”

영화 ‘옥자’에서 봉 감독과 함께 손발을 맞췄던 한 영화 관계자의 얘기다. 촬영장에서 그는 ‘배려’와 ‘협업’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화가 날 법한 상황에서도 언성 한 번 높인 적이 없다. 또 막내 스태프의 이름을 불러줄 정도로 모든 사람을 챙긴다. 카리스마로 현장을 장악하는 ‘용장’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사람들과 인간적인 대화와 소통을 통해 최상의 결과를 추구하는 ‘덕장’ 스타일이다. 배우 송강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경청한다.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며,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고 밝혔다.

봉 감독은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끈을 쉽게 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언제 어디서든 겸손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고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그에 따른 보상은 돌아오기 마련. 배우 송강호와의 첫 만남에서도 그의 ‘배려심’을 엿볼 수 있다. 봉 감독이 영화 ‘모텔 선인장’의 조감독을 맡던 시절, 무명의 배우 송강호가 오디션에 지원했다. 결과는 탈락. 하지만 봉 감독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송강호에게 삐삐 호출을 보냈다. “이번에는 기회가 없지만 다음에 꼭 같이하고 싶다”는 장문의 음성 녹음이었다. 봉 감독이 장편 데뷔작 흥행에 실패한 뒤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송강호가 흔쾌히 수락한 이유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로 이미 스타 배우로 떠오른 뒤였지만 고민은 없었다. 송강호는 음성 녹음을 들으며 “언젠가 출연 제의가 오면 시나리오도 읽지 않고, 바로 출연을 결심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봉 감독이 비단 송강호에게만 특별대우를 한 것은 아니다. ‘기생충’에서 활약한 배우 면면을 살펴보면 그가 평소 얼마나 무명 배우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잘 알 수 있다.

가정부 문광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과의 인연은 2009년 ‘마더’에서 시작됐다. 극 중 죽은 여고생의 장례식장에서 싸우는 유족 역할로 딱 한 장면 출연했다. 하지만 그 재능을 잊지 않은 봉 감독은 2017년 영화 ‘옥자’에서 옥자 목소리 연기를 그에게 부탁했다. 기우 역을 맡은 배우 최우식 역시 ‘옥자’에서 말단 직원으로 출연했을 뿐이지만 시나리오 검토 단계에서부터 그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장혜진, 박명훈을 발굴할 수 있던 것도 사람을 두루 챙기는 그의 평소 성향 덕이다.



▶3. 세계 홀린 ‘마이너리티 감수성’

▷사회적 약자에 주목…B급 감성 전면에

봉 감독은 영화 속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부유 계급보다는 하층민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영화를 통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소수에 공감하는 이 같은 ‘마이너리티 감수성’은 봉 감독 영화가 갖는 힘의 원천이다.

그간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온 영화의 면면을 살펴보면 마이너리티 감수성의 실체가 보다 명확해진다. 폭력적인 공권력의 모습을 비판한 ‘살인의 추억’, 정부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평범한 가족의 사투를 그린 ‘괴물’, 계급구조 고착과 역전의 과정을 나타낸 ‘설국열차’, 비인도적 도축업의 환경을 묘사하며 생명윤리에 대한 통렬한 성찰을 담아낸 ‘옥자’까지. 그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고민을 영화에 녹여내왔다.

계급과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은 ‘기생충’에서 정점을 찍는다. 반지하에 사는 하층민 기택 가족과 고급 저택에서 거주하는 박 사장 가족 사이 계급 갈등의 폭발 양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 양극화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기생충’은 세계 최고 권위의 아카데미 4관왕을 거머쥔 ‘명작’으로 인정받았다. 봉 감독의 ‘마이너리티’가 ‘메이저리티’로 탈바꿈한 순간이다.

그의 마이너리티 감수성은 영화 소재를 발굴할 때도 잘 드러난다. 영화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대부분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괴물’은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잠실대교를 기어올라가는 생명체를 본 기억에 주한미군이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한 사건을 버무렸다. ‘마더’는 대학교 1학년, 강원도 오대산에 놀러갔다 관광버스에서 아주머니들이 내리지 않고 춤을 추고 있던 모습을 기억에 담고 있다 만들었다. ‘기생충’도 과거 부잣집 자녀에게 수학 과외를 하던 기억을 떠올려 시나리오를 썼다.

▶4. 실패를 두려워 않는 실험정신

▷데뷔작부터 기생충까지 새 장르 개척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 작품을 아시는지. 2000년 선보인 ‘플란다스의 개’다. 현재의 봉 감독 명성으로 추측해보면 ‘플란다스의 개’도 대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답은 그 반대다. 강아지 납치범을 잡는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10만명 남짓한 관객이 관람하는 데 그쳤다.

“코미디와 공포, 미스터리가 어우러져 있는가 하면 판타지적인 요소가 눈에 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로 녹아들지 못한 채 소화불량 양상을 보인다.”

2000년 ‘플란다스의 개’를 소개한 한 영화 칼럼의 평가는 이랬다. 부정적인 반응이지만 봉 감독은 당시에 없던 장르를 끌어냈다. 제작자였던 차승재 동국대 영상대학원 교수는 “당시 블랙코미디라는 장르가 낯설어 성공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봉 감독이 밀어붙였다”고 평한다. 하지만 ‘플란다스의 개’를 본 몇 안 되는(?) 관객 중 봉 감독의 팬이 됐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독창적인 장르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봉 감독의 실험정신은 이어졌다. 2003년 ‘살인의 추억’은 범죄 영화다. 당시 범죄 영화는 범인을 잡는 ‘카타르시스’ 요소로 승부를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는 범인을 밝히지 않는 충격적인(?) 결말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40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설국열차’(2013년)는 전례 없는 글로벌 프로젝트였다. 주인공이 한국인 송강호였을 뿐 영어 대사가 주를 이룬 세계 시장을 겨냥한 영화였다. 2017년 ‘옥자’는 가상의 동물을 소재로 삼았고, 국내 최초로 전액 해외 자본(넷플릭스)으로 만들었다. 영화 소재뿐 아니라 제작·유통 방식에서도 새 도전에 나선 것이다. 코미디, 범죄, 스릴러, SF와 같이 다양한 장르에 대한 실험 역시 봉준호의 특징적인 면이다. ‘기생충’은 이 같은 봉 감독의 DNA가 한껏 녹아들어 전례 없는 명작으로 탄생했다.

▶5. 좌중을 압도하는 촌철살인 유머

▷상대방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꿔

“(각본을) 국가를 대표해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상은 한국이 받은 최초의 오스카 상.”

“상을 두 개 받고 이제 오늘의 내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해 편히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술을 마실 준비가 돼 있다.”

“아카데미에서 허락만 한다면 이 오스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5등분해서 경쟁자들인 마틴, 샘, 쿠엔틴 등과 나누고 싶다.”

오스카 시상식을 본 이들은 봉 감독의 소감에 여러 차례 미소 짓고, 박수를 쳤을 법하다. 그의 수상 소감은 감사 인사만 줄줄이 나열하는 재미없는(?) 멘트가 아니었다. 매번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꺼낼까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경쟁 감독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에게는 “내 영화를 늘 챙겨서 봐야 할 영화 리스트에 올려주시는 형님”이라 칭했다. 1963년생으로 봉 감독보다 6년 위인 그가 ‘형님’이라는 개념을 알고 좋아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멘트였다. 봉 감독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는 그를 디테일뿐 아니라 촌철살인의 대가로 기억한다. 자막 영화의 한계를 상징하는 단어로 ‘1인치의 장벽’이라는 용어를 꺼낸 게 대표적인 사례다.

촌철살인과 유머는 조직을 장악하는 핵심 요소다. 리더의 유머는 상대방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 특히 신뢰받는 리더의 유머는 ‘긍정심리자본’을 향상시켜 조직원 행복지수를 높인다. 영화와 같이 팀 단위 협업이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감독의 유머는 조직원의 열의를 끌어올리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명순영 기자 msy@mk.co.kr, 나건웅 기자 wasabi@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 2047호 (2020.02.26~2020.03.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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