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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랭보와의 스캔들이 있은 후 감옥에서 성찰의 시간을 보낸 베를렌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후 발표한 시집이다.
작가 | 폴 베를렌 (Paul Verlaine, 1844년 ~ 18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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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 1880년 |
장르 | 시 |
사조 | 상징주의 |
작품해설
1880년에 베를렌이 자비로 출판한 작품으로 1889년 수정을 거쳐 재발간되었다. 1873년에서 1880년 사이에 쓰인 시들을 모았다.
베를렌은 벨기에에서 랭보와 싸우다가 총상을 입힌 죄로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1873년∼1875년)에 쓴 시들을 따로 묶어내려 계획했고 그 제목은 『수인생활(Cellulairement)』로 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쓴 시들이 하도 분산적이어서 결국 베를렌은 이 계획을 포기하고 만다. 그것들을 서로 다른 시집에 싣기로 했고, 그중의 일부가 『예지』에 포함된 것이다.
베를렌은 감옥에 있는 동안 신비한 열정을 체험했고, 『예지』는 그 반향을 보여주고 있다. 베를렌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시집의 서문에서 이 책이 자신의 ‘공개적 신앙 고백’임을 밝힌다.
하지만 이 시집은 문단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그가 기대했던 가톨릭 당파로부터도 크게 환영 받지 못했다. 작품은 어떤 정신적인 원리를 향한 모색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정점은 종교적인 열정에 있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예지라는 제목은 종교 자체보다 윤리적 태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종교적인 열정은 2부 4번째 작품에서 번개처럼 몰아치지만 또한 이내 사라지고 만다.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몇몇 시들은 고백처럼 읽히기도 한다. ‘육체의 반항’이라는 대목은 베를렌의 과거 행적을, ‘사나운 친구’나 ‘천사의 종류’는 랭보를, ‘내 누이’는 아내 마틸드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과거들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지혜는 윤리적인 원리이자 동시에 미학적 원리이다. 전작 시집 『가사 없는 로망스들(Romances sans paroles)』(1874년)에서 보인 대담함과 달리 여기에서 베를렌은 전통적인 시 형식들을 다시 사용한다. 동원되는 이미지나 비유 역시 중세의 알레고리를 활용하는 등 전통적인 것들에 속한다.
다만 3부에 실린 몇몇 시들은 1874년 이전에 쓰인 것들로, 예전 베를렌의 면모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홀수 음절로 이루어진 기수각(奇數脚 vers impair) 시들이 미묘한 음악성을 과시하고,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내면의 무한한 공간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거기에서는 종교적인 목적의식 때문에 억눌렀던 다양한 목소리들의 매혹적인 향연이 다시 힘을 발휘한다.
작품요약
『예지』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각각은 24편, 9편, 2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시들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 않다.
1부의 시편들은 대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시인 자신의 과거가 주를 이루지만, 때로는 가톨릭 종교의 과거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이 개종을 하게 된 경로를 서술한다. 그 과정에는 유혹과 대결하여 벌인 투쟁들이 있었다. 첫 번째 시에서 시인은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가 훌륭한 기사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두 번째 시의 마지막 구절은 시적 화자에게 전해지는 명령으로 끝맺는다. “너, 현명해지라.”
2부는 주제적으로나 극적인 구성에서나 이 시집의 중심이자 정점이다. 첫 번째 시는 개종의 순간을 노래한다. 그리고 첫 세 시편들에서 시인은 신성한 인물형상들(하느님, 마리아)에게 말을 걸고, 네 번째 시에서 그에 대한 응답을 받는다. 무려 10개의 소네트로 이루어진 이 장시에서는 시인과 하느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시인을 사랑의 길로 이끈다. 그리고 신비한 체험이 절정에 이르며 개종이 이루어진다.
3부의 시편들은 시인이 현명함을 얻은 결과물이다. 그때부터 예지는 세계의 풍경을 노래하는 원리가 된다. 이 중 몇몇 시들은 이전에 쓰인 것이며, 예전 베를렌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속의 명문장
하늘은 지붕 위로
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
지붕 위에 잎사귀를
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서 종은
부드럽게 울리고,
나무 위에 새 한 마리
슬피 우짖네.
오 하느님, 삶은 저렇듯
단순하고 평온한 것을.
도시에서 들려오는
평화로운 웅성거림.
뭘 했는가? 여기 이렇게
끊임없이 울고 있는 너는.
말해 보렴, 뭘 했는가? 여기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서?
3부의 6번째 시 「하늘은 지붕 위로...」의 전문이다. 시인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좁은 하늘을 소재로 시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과거의 혼란스러운 삶을 반성하면서 사소한 존재들에서 삶의 희열을 발견한다. 다소 감상적인 면도 없진 않지만 소박한 삶에 대한 희구가 단순하고 압축적인 언어들을 통해 절절하게 표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