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신종플루로 아픔 겪었지만 봉사·예술로 나누는 삶 깨달아"

입력
수정2020.03.13. 오후 7:08
기사원문
조상인 기자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은 배우 이광기]
감기인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불덩이
입원한 바로 다음 날 아들 떠나 보내
"아이 죽었대" 잔인한 수군댐에 절망
위로라고 건네는 말조차도 상처 돼
그렇게 한동안 세상과 담 쌓고 살아
내 품 안겨 우는 아이티 아이들 보며
나만 아픈 건 아니었구나 정신 번쩍
10년째 아이티 피해돕기 자선 경매
예술 저변확대 위해 유튜브도 시작
베풂으로 행복해지는 법 배워가는 중

[서울경제] 그냥 감기인 줄 알았다. 병원에서 지어준 대로 약을 먹였지만 상태는 더 나빠졌다. 어찌할 바를 모른 것은, 순식간에 몸이 불덩이가 돼 탈진한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온 아버지나 의료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저녁에 입원한 아이가 다음날 아침 절박한 심폐소생술 속에서 떠나가는 것을 부모는 맥없이 지켜봐야 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제법 키워놓은 아이였고 믿을 만한 큰 병원이었다. ‘신종플루 양성 판정’과 ‘타미플루를 처방받을 수 있다’는 문자메시지는 아이가 세상을 떠난 지 5시간 후에야 도착했다. 1차 간이검사에서 ‘음성’이 나왔으나 가래를 채취해 정밀 검사한 결과 뒤늦게 ‘양성’으로 확진돼 병원의 자동서비스로 통보됐다. 사인은 급성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에서 신종플루로 정정됐다.


고통과 재난 앞에서 흔히 사람들은 분노하고 원망하기 마련이다. ‘왜’ ‘하필’ ‘나에게’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배우 이광기(51·사진)다. 지난 2009년 11월8일. 10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그날, 그는 7세 아들 석규를 잃었다.

“제가 걸음이 좀 빨라요.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내가 지나간 후 ‘이광기 알지? 아들이 죽었대’라고 수군대는 소리를··· 걸음이 느려 늘 뒤에 따라오던 아내가 듣고는 했어요. 그래서 그 뒤로는 항상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같이 걸어요. 혼자 속상해 울 일 만들지 않으려고요.”

아역배우 출신으로 드라마와 영화·연극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봉사와 자선경매·대안마켓 발굴 등 다채롭게 활동하는 그를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스튜디오 끼’에서 만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진지라 마음 한켠에 늘 자리 잡고 있는 기자의 불안을 감지했나 보다. 이씨는 첫인사로 “2009년에는 사스가 있기는 했어도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나 대처가 미흡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잘 대응하고 개인위생도 철저하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2009년 봄 첫 국내 확진자가 나온 신종플루로 그해 75만명이 감염됐고 263명이 사망했다. 당시 이씨는 유명인 가족의 피해 사례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나라고 왜 안 힘들었겠습니까. 부모가 돌아가시는 것은 순리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은 순리가 아닌지라 미안하고 죄스러웠습니다. 위로라고 건네는 말조차 상처가 돼 가슴을 찔렀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싫었어요. 그렇게 세상과 담을 쌓을 뻔했습니다. 힘들어도 아내와 딸 앞에서 내가 흔들리면 안 되니까 늘 참다가, 어느 날 밤 복도식 아파트 밖으로 혼자 나가 펑펑 울었습니다. 차가운 밤 공기가 내 분노와 화기를 식혀주는 듯해 나도 모르게 창밖으로 몸의 반 이상을 내밀고 있더군요. 그날따라 반짝이는 별이 천사가 됐을 우리 석규로 보였어요. 하늘을 향해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돼 지켜주세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서야 창밖으로 떨어질 뻔한 몸을 가눌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뒷면에서 그는 희망을 발견했다. 상실의 빈자리를 봉사와 예술로 채웠다. 계기가 있었다.

“역대 최악의 지진이라고 할 ‘아이티 지진’이 2010년 1월에 일어났어요. 그런 대재앙을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접한 것은 아마 처음이었지 싶어요. 눈물과 핏물이 뒤섞여 흐르는 아이들을 TV로 보는 게 너무 괴로웠죠. 바로 그때 우리 석규의 생명보험금이 입금됐습니다. 아이는 없는데 죽음의 흔적 같은 돈이 통장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어요. ‘우리 석규가 마지막으로 친구들을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하자’고 결심했죠.”

봉사활동을 지속해 온 선배 배우 정애리의 주선으로 월드비전에 연락해 아이티 지진피해 아이들을 도와달라며 기부했다. 원래는 조용히 돕고 한동안 종교활동에 전념하려는 계획이었다. 월드비전이 기부 확산을 위해 이씨의 선행을 세상에 알렸고 아이티를 돕기 위한 방송사 특별 모금방송에 출연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이티 피해현장에 같이 가 달라는 전화를 받고 며칠 망설였습니다만 다른 사람을 돕는 내 모습이 씨앗이 되고 더 큰 후원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며 가기로 했습니다.”

2010년 2월에 여전히 땅이 으르렁댈 것만 같은 아이티에 발을 디딘 그의 목에는 석규 사진이 달린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위험지역이라 꺼린 탓에 출연진은 그만 빼고 모두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절망의 뒷편에는 희망이 웅크리고 있었다.

“세상에 아픈 게 나뿐이 아니었습니다. 나만 위로받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곳에 갔더니 내 아픔은 그저 점 하나에 불과했고 나보다 더 고통받는 사람도 많았어요. 굶고 아픈 아이들을 돌보느라 내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PD가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라고 해서 ‘너희가 부모를 잃었듯이 나는 너희 같은 내 아들을 하늘로 보냈다. 너희가 행복하게 살아야 해. 그래야 하늘나라의 부모님들도 우리 석규도 기뻐할 거야’라고 했죠. 그 수십명의 아이 중 한 녀석이 나를 빤히 보더라고요. 다가가 이름을 물으니 세손, 나이는 여덟 살이래요. 우리 석규와 같죠. 두 팔을 벌리니 녀석이 내 품에 안겨 엉엉 울더군요. 그 울음이 내 심장을 울리던 그 순간 내가 그곳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는 이미 싸늘하게 식었던 우리 석규와 몸집이 꼭 같은 그 아이의 뜨거운 체온에 감사했어요. 그날 밤, 처음으로 석규를 꿈에서 만났습니다.”


아이티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행복과 긍정의 에너지를 전파하는 사명감이 됐다. 지진으로 무너진 학교를 다시 세워 아이들이 꿈꿀 공간을 지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귀국하자마자 최울가·문형태·김인태 등 평소 알고 지내던 미술가들에게 제안했고 그해 5월 서울옥션에서 아이티 지진피해 돕기 첫 자선경매를 열었다. 2012년에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석규의 영어이름을 딴 첫 학교 ‘케빈스쿨’이 문을 열었다. 300명의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학교다. 현판에는 학교 설립에 도움 준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적었다. 자선경매는 10년째 꾸준히 이어졌고 지금까지 3개의 학교가 세워졌다.

봉사와 예술은 그의 삶에도 새 길을 펼쳐 보였다. 이씨는 2015년 특별경매를 계기로 경매사로 데뷔했다. 아이티의 아이들을 담아두고자 찍었던 사진은 그를 사진작가의 길로 이끌었고 어느덧 개인전도 열었다. 작가들과의 교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후원으로 이어졌고 지난해 가을부터는 현대미술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예능처럼 소개하는 유튜브 ‘광끼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19일에 개막한 아트페어 화랑미술제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최악의 상황이었어요. 걱정스럽더라고요. 촬영 나가는 길에 ‘LET’S FINISH NOW(이제 끝내자)’라고 문구를 적어서 현장 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검은 마스크를 가위로 잘라 벽에 걸고 그 벌어진 틈에 전염병 시대를 끝내자는 제안의 문구를 붙였죠. 많은 분이 사진을 찍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공유했어요. 마스크는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방어하지만 마스크 생활이 오래가면 불신과 분열의 심리적 바이러스가 될 수 있기에 안전한 동시에 행복한 세상이 돼야 한다고, 그런 바람과 희망을 담았죠.”

‘사회적 거리 두기’가 권장되고 격리와 분리가 안전의 한 방편이 돼버린 요즘 우리에게 이 사람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한 후에 우리가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게 과연 회복일까요.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봉사와 예술로 행복해지는 법을 발견했죠. 당신은 어떤가요.”
/파주=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성형주 기자

배우 이광기가 2일 경기도 파주시 스튜디오끼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파주=성형주기자

He is

△1969년 서울 △1985년 KBS ‘해 돋는 언덕’ 출연 △1998년 KBS ‘왕과 비’ △2000년 KBS ‘태조 왕건’ △2001년 KBS연기대상 신인상 △2001년 영화 ‘소름’ △2002년 SBS ‘야인시대’ △2003년 KBS ‘무인시대’ △2004년 뮤지컬 ‘Oops’ △2005년 서울종합예술학교 겸임교수 △2008년 KBS 라디오FM ‘이광기·김현숙의 네시엔’ △2009년 싱글음반 ‘웃자웃자’ △2010년~ 월드비전 홍보대사 △2011년 연극 ‘가시고기’ △2011년 제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조직위원회 △2012년~ 서울시 홍보대사 △2012년 JTBC ‘인수대비’ △2015년 KBS ‘징비록’ △2017년 사진 개인전 ‘막간(幕間)’ △2018년 파주 스튜디오끼 개관 △2019년 안산 국제거리극축제 예술감독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 프로필

그림 있는 곳, 우리 문화재 있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의미와 재미, 모두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