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 하루 전, 우한 경유한 남편…이제 아이들을 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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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1.31. 오후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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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베이징 교민이 보내온 현지 상황

설날 우한 근처 시댁 갔다가 고립된 아이들 구출작전
“봉쇄 전 이미 아수라인데 뉴스에선 ‘코로나’ 단신 처리
다들 미쳤다고 생각…중국 정부는 2003년 사스 때 뭘 배운 걸까”
공항 경찰들이 열감지기에 걸린 사람을 에워싸고 이송하고 있다.


베이징=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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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초부터 ‘정체불명의 폐렴’ 소식 파다했지만…



설을 일주일여 앞둔 날, 전화가 왔다. 중국 후베이성 징먼에 사는 아이들 할머니다. 이맘때쯤 전화가 걸려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썩 반갑지는 않았다. 전화를 받은 작은아이는 스피커를 켜놓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뭐 하니? 바빠? 이번 설에는 할머니 집에 올 거지?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일 년이 넘게 너희들 방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번 설에는 꼭 올 거지? 너희들이 안 오면 우리가 베이징으로 갈 거야. 얘들아 너무 보고 싶다. (그 뒤로 흐느끼는 울음소리)”

1월 초부터 중국 인터넷에서 ‘정체불명의 폐렴’이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소식과 뭔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불안했다. 하지만 우한시 위생국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되는 소식을 보면, 발생 환자 수도 경미하고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파되지는 않는다’며 절대 ‘일없다’는 내용뿐이었다. 2003년 사스를 통해 ‘쓴맛’을 봤기 때문에, 설마 이번에도 순진한 인민들을 상대로 ‘후라이 까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설을 일주일 앞두고 귀성 열차표를 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기차표 판매 플랫폼 앱에 웃돈을 얹어서 ‘대기자’ 명단으로 올려봤지만 표를 구할 수 없었다. 속으로 안심했다. 19일이나 20일까지 표를 구할 수 없으면 ‘아싸’ 하고 한국에 가서 설과 방학을 보낼 생각이었다. 

17일 오후, 남편이 문자를 보냈다. “진짜 힘들게 침대칸 표를 구했다”고. 도저히 살 수 없던 표를 온갖 ‘꽌시’(인맥)를 다 동원해서 친구의 친구인 철도청에 근무하는 사람을 통해 구했노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19일 일요일,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후베이성 징먼으로 떠났다. 그곳은 23일 오전 10시, 전격적으로 ‘봉쇄령’이 떨어진 우한에서 차로 불과 두세 시간 거리다. 

기차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후베이 징먼에 있는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그날은 점심을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집 근처 공원과 야트막한 동네 산을 산책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아이들에 따르면) 공원과 산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이 없었고 누구도 ‘정체불명의 폐렴’을 말하지 않았다. 그날은 국가위생건강위원회(보건위)에서 공식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국가 을류 전염병으로 지정하고, 대처는 갑류 상황으로 한다’는 ‘공고 제1호’가 발표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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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칵 뒤집힌 그날, 시진핑 시찰 보도 20분 ‘코로나’는 2분


‘난리가 난 것’은 다음날부터다. 중국의 저명한 호흡기질병 전문가이자 2003년 사스 퇴치에 크게 기여한 중난산 원사가 중국 CCTV 인터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야생동물을 통해 전파됐을 가능성이 크고, 사람 간 전이로 확인된 사례가 나타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동안 일관되게 ‘일없다’고 강조하며, 심지어 1월19일 약 4만 명 정도가 참가한 ‘연회’까지 열었던 우한시 시장의 낯빛이 ‘일이 있는 것처럼’ 창백해졌다. 그러면서 하는 말. “다른 지역 분들은 우한으로 올 필요도 없고, 우한 사람들도 다른 곳이나 집 밖으로 가급적 나가지 마십시오.” 한순간에 우한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중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평소 안 보던 저녁 뉴스를 ‘일부러’ 봤다. 그날 7시 저녁 뉴스에는 시진핑 주석의 윈난 시찰 소식이 머리 뉴스로 나오더니 무려 20분 이상 방영되었다. 시 주석은 사람이 가득 모인 윈난성 곳곳의 기차역과 광장 등에서 설을 앞두고 고향으로 귀성하는 인민을 향해 ‘안정되고 아름다운 생활을 영유하기 바란다’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화면에 마스크를 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뉴스가 끝나갈 무렵 1~2분 정도 짤막한 단신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소식이 보도되었다.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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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거치는 경로 외엔 기차·비행기표 동나


마음이 급해졌다. 우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 있는 아이들을 빨리 베이징으로 데려와야 했다. 같은 고향으로 설 쇠러 갔던 큰집 조카와 다른 손자들은 정부 공식 발표가 난 바로 그날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사서 다음날 자기들끼리만 돌아와버렸다. “왜 우리 아이들은 같이 안 데리고 왔니? 너희가 인간들이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대판 싸웠다.

바로 시작된 아이들 구출 작전. 후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오는 모든 비행기표와 기차표는 이미 예매 불가다. 다 동났다. 모든 예약 사이트에 대기자로 올렸다. 없던 기차표를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해 구해왔던 남편에게 왜 이번에는 그 ‘신통한 인맥’을 동원할 수 없냐며 소리를 질렀다. 더 화가 난 건,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갔던 남편이 이틀 뒤 혼자 ‘우한을 통해’ 베이징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무려 ‘우한을 통해서’ 말이다. 

“미친 게 아니냐”고 했더니 “보도를 보니 아이들은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하고 남겨진 부모님이 너무 간절하게 손주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해서” 혼자만 돌아왔다는 것이다. 오직 우한을 거쳐서 오는 기차표와 비행기표만 남아 있어서 ‘할 수 없이’ 자기도 우한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우한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는 것. 막상 가보니 우한 기차역과 공항은 사람이 많았을 뿐 생각보다 너무나 평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편은 그날 우한 분위기를 보니 ‘별일 없을 것’이라고 했다. 우한 봉쇄 하루 전이었다. 

마트 식료품 사재기에 나선 베이징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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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SNS에선 ‘정치 재해’라는 의견이 쏟아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가능성 있는 수단은 비행기였다. 가장 가깝고 표가 많은 우한은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고, 남은 공항은 차로 서너 시간 거리인 이창뿐이다. 온종일 항공권 예매 웹사이트만 주시하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다행히 이창에서 베이징으로 오는 비즈니스석 표가 석 장 나왔다. 가격을 따질 겨를도 없이 바로 결제하고 예매했다. 그사이 무슨 변수라도 생길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하고 베이징 공항에서 얼굴을 봐야지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켜서 관련 소식을 검색해보니, 중국 인터넷 소셜네트워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포스팅으로 폭주하고 있었다. ‘나쁜 정부와 나쁜 정치’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고 ‘정부는 2003년 사스에서 대체 뭘 배웠냐’는 분노로 들끓었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사스와 마찬가지로 ‘정치 재해’라는 의견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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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우한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돌아왔다. 23일 밤 10시 넘어 이창을 출발한 비행기는 베이징수도공항에 12시 넘어 도착했다. 아이들이 출구로 나온 시각은 새벽 2시가 훨씬 넘어서다. 엄격한 검역으로 시간이 지체된 탓이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도중, 열감지기에 걸린 사람 한 명이 자루 같은 것으로 꽁꽁 싸여서 경찰들에 에워싸여 이송되고 있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사람이 발악하며 ‘날 왜 잡아가냐’고 소리 치며 울부짖는다. 순간 오싹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뉴스로만 보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다. 

후베이 이창공항에서 탑승 전까지만 해도 ‘생애 첫 비즈니스석을 탄’ 흥분으로 들떠 있던 아이들도, 착륙 뒤에는 잠시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재난영화에서나 보던 우주복 입은 검역관들이 들어와서 총처럼 생긴 하얀색 열감지기로 이마를 ‘빵’ 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더라는 것. 비행기 탑승 전에는 혹시 모를 재채기나 기침에 대비해서 인터넷으로 ‘기침 참는 법’을 찾아서 열심히 연습했다고 한다. 내가 일부러 ‘재채기만 해도 잡아간다’고 엄청난 과장을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돌아온 바로 다음날, 후베이 이창과 징먼 일대가 사실상 봉쇄되었다. 24일부터는 후베이 전역이 봉쇄되었고 마을과 마을 간 이동과 자가용 운전도 금지되었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이들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 갇힐 뻔했다. 후베이성뿐만 아니라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사실상 성과 성으로 통하는 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전국에서 우한과 후베이에서 온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설을 하루 앞둔 24일까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대해 입도 뻥긋 안 하던 시진핑 주석도 25일 드디어 ‘엄중한 시국’임을 선포했다. 비상 정치국상무위원회 회의가 소집되고 전염병 관리 특별 영도소조가 꾸려졌다. ‘설 연휴를 축복한다’고 방긋방긋 웃던 그들의 얼굴에서 일제히 웃음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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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살아서 꽃피는 봄날에 웃으며 만나요”


베이징에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사스 당시 공포를 잊지 못하는 베이징 사람들은 이번에는 ‘더 센 놈’이 온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인지, 설이 지나자마자 곳곳에서 사재기 현상이 벌어졌다. 덩달아 나도 근처 마트를 돌며 장기 비축 식량을 사재기하러 나섰다. 오후에 가면 마트 매대에는 ‘살 만한’ 물건과 야채 등 신선식품이 다 동나 있었다. 자주 가던 집 근처 마트에는 연휴임에도 사람들이 몰려서 계산대가 혼잡했다. 다들 ‘한 트럭씩’ 식재료를 사갔다. 베이징 거리에는 공포와 불안이 미세먼지처럼 공기 중에 둥둥 떠돌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집으로 꼭꼭 숨은 것이다. 

베이징 주재 한국 기업 주재원들 가족에게도 ‘철수 권고’가 내려졌고 다른 외국계 기업 직원들 가족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학교 담임선생님들도 비장한 어조로 모든 학부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아파트 주민위원회에서도 단체 메시지가 왔다. “주민 여러분! 우리 모두 살아서 꽃피는 봄날에 웃으며 만나요”라고. 조만간 베이징도 봉쇄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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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차별과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전국 곳곳에서는 춘절 여행을 떠난 우한과 후베이 사람들이 ‘공공의 적’이 되었다. 모든 호텔과 여관 등에서 후베이 사람은 ‘사절’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고, 전국 모든 지역에서 후베이성으로 통하는 도로와 길들이 봉쇄되었다. 총검으로 무장한 ‘전사들’이 후베이 번호판 차량과 사람들이 자신들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을 입구를 24시간 ‘철통수비’하는 모습이 전국 각지에서 연출되었다. 

후베이 전 지역이 봉쇄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우한과 후베이 지역 사람들이 이 엄동설한에 거리를 떠도는 유랑자가 되어 또다른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에서는 집으로 가지 못하는 후베이 사람들의 절규와 분노가 들끓었다. 상하이에 사는 중국인 지인은 웨이보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전쟁은 전염병과의 전쟁만이 아니다. 우리 내부의 또다른 차별과의 전쟁이다. 우리는 지금 ‘도덕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전염병이 종식되면 우한과 후베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포들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라고. 이 큰 대륙이 한순간에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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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감시 대상 우리집, 하루 세 번 전화가 온다


우한과 후베이 지역에서 잠시 머물다 온 ‘잠재적 감염원들’이 거주하는 우리 집은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세 번 전화가 온다. 어떤 날은 ‘업무가 폭주해서인지’ 오전에 한 번만 걸려올 때도 있다. 아파트 주민위원회와 차오양취 질병관리본부, 왕징가도 판공실(동주민센터 같은 곳) 등 세 곳의 ‘국가기관’에서 매일 우리 상태를 물어보고 외출 여부와 다른 사람 접촉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중국에 살면서 이렇게 많은 ‘국가기관’의 관심과 감시를 받아보긴 처음이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특히 10층에 사는 천 아줌마는 우리 집 동태를 감시하는 ‘일급 임무’를 맡았다. 그 아줌마는 우리 아파트 동대표이자 주민위원회 소속 공산당원으로, 평소에도 애국심과 봉사정신이 ‘쩌는’ 분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투철한 ‘충성심’을 발휘하고 계신다. 내가 잠시 마트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 1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온다.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나요?”

베이징 거리는 불안만 떠돌 뿐 사람들은 꼭꼭 숨었다.


이렇게 철두철미 쥐새끼 한 마리까지도 감시가 가능할 정도로 ‘놀라운’ 통제력과 조직을 가진 중국이 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초기에 통제를 못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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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걱정 마, 우리 한국 안 갈 테니까


비록 집이긴 하지만, ‘신선한 곳’(수용소)에 갇혀 있는 우리 가족은 하루 삼시세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오늘도 나는 삼 일째 정체불명 잡탕찌개를 한 솥 끓여서 세 끼를 한꺼번에 해결했다. 내일은 뭘 해 먹어야 하나. 도저히 이렇게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자가격리 기간 2주일이 지나면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갈까 생각하던 중에 마침 한국에 있는 엄마가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하는 말. 

“한국도 난리다. 중국 사람들 다 쫓아내고 오지도 말라고 청와대 청원까지 한단다. 너희들도 괜찮으면 그냥 거기 있는 게 어떠냐? 동네 사람들이 너희가 중국에서 왔다는 걸 다 알 텐데….”

우리 가족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공포의 바이러스 덩어리들이다. 꽃피는 봄날이 올 때까지 그냥 베이징에서 오순도순 삼시세끼 집밥 캠프나 해야겠다. 엄마! 걱정하지 마. 우리 한국에 안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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