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냉면 외교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때 이른 평양냉면 특수를 불러왔다. 냉면집 문앞이 부산해지는 것은 반팔셔츠 차림이 자연스러워질 무렵, 통상 5월 중순 이후다. 정상회담이 있었던 4월 27일부터 서울의 한다 하는 면옥마다 한여름 뺨칠 만큼 긴 줄을 서고 있다. 정상회담 만찬 메뉴가 알려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북측은 옥류관 제면기를 판문점 통일각까지 공수해 면을 뽑고 만찬장인 평화의집으로 날랐다. 만찬 도중 서울 냉면집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참석자들이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해외 언론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CNN은 회담 생방송 중 '냉면 외교(Noodle Diplomacy)'를 별도 꼭지로 내보냈다. 미국에서 요리사로 활동 중인 가수 출신 이지연 씨가 스튜디오에서 직접 만든 냉면을 앵커들이 시식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한 기자는 정상회담 직후 서울 소재 냉면 전문식당을 찾아간 사연을 가디언 웹사이트에 올렸다.

한국인들에게 국수는 경사스러운 음식이다. 길이가 길어 '장수(長壽)'를 상징하고 인연이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다. 함께 나눠 먹는 화합의 음식이기도 하다. 상징성으로 치면 남북 정상이 나눌 음식으로 평양냉면만 한 것을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2000년 제1차,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때도 옥류관 냉면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평양냉면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서민성을 부각시키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스위스산 에멘탈 치즈와 와규 스테이크를 좋아한다는 김정은이 평양냉면을 권하는 것을 보며 '김정은도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 황석영은 1989년 방북 기간 중 김일성으로부터 '언감자국수'를 대접받았다.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 한겨울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을 때 화전민이 땅에 묻어둔 언 감자를 갈아 녹말을 내고 이를 국수로 뽑은 것이 언감자국수다.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도 김일성과 이 국수를 나눠 먹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면을 좋아하는 식성은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일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모두 국수에는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김일성은 국수를 먹는 인민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을 텐데 그 아래로는 어떨지.

[노원명 논설위원]

▶뉴스 이상의 무궁무진한 프리미엄 읽을거리
▶아나운서가 직접 읽어주는 오늘의 주요 뉴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