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규의 7전8기]화차(火車),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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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06. 오후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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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규 서울회생법원 부장판사


법원에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2003년 광주지방법원에서 개인파산업무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개인파산 또는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낭비벽이 심하고 경제관념이 없으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과연 개인파산이나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것이 단지 개인들의 무책임한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세키네 쇼코씨는 유달리 낭비벽이 심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어요. 그녀 신상에 일어난 일은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나나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신용카드와 신용대출로 파산상태에 이른 한 여자의 파멸과 금융권의 부조리를 고발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우리나라에서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다)에서, 작가는 '세키네 쇼코'가 개인파산을 신청하게 된 과정에 대해 누구나 파산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나아가 미야베 미유키는 상당히 고지식하고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 개인파산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고 묘사하고 있다.

오랜 기간 개인파산업무를 담당해온 경험으로는 미야베 미유키의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한 사람도 어느 순간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빚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경우가 있다. 소설 속 세키네 쇼코도 많은 빚을 지게 된 이유에 대해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는 파산상태에 이른 사람들을 화차에 올라탄 것에 비유한다. 화차는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 나르는 불수레다. 파산상태에 이른 개인이 불수레에 올라탄 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악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실무에서도 개인들은 개인파산보다 개인회생을 신청하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생계비를 빼고 나면 변제할 재원이 없어 개인회생을 신청할 수 없는 사람들도 생계비를 줄여가면서까지 개인회생을 고집한다. 그들에게 왜 개인파산신청을 하지 않고 개인회생을 신청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말한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변제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힘 닫는 데까지 변제를 해야한다고.

개인이 파산상태에 이른 것은 일정 부분 본인의 책임도 있다. 하지만 은행 등 금융기관을 비롯한 사회의 책임도 부인할 수 없다. 금융기관은 개인들의 신용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돈을 빌려주거나 신용카드를 사용하도록 했고, 고금리와 과도한 수수료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개인들은 화차에 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빚을 늘려간다. 금융기관은 빚이 지속적으로 늘어남에도 이를 방임함으로써 개인들이 화차에서 내릴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한다. 빚은 어느 순간 크레디트(credit), 즉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다. 빚을 많이 낸 사람은 신용이 좋은 사람으로 돼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사회는 개인들로 하여금 무분별한 소비에 빠지도록 온갖 정보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돈을 왕창 벌 수 있다. 주식을 해라. 집을 사라.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야 재미있다 등등. 개인들은 수집된 정보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과소비에 이르게 된다. 정보파산에 빠지는 것이다.

2019년 4분기 기준으로 가계부채는 1600조 원을 넘어섰다. 2019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0.4%로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가 우리 경제를 드리우고 있다. 성실하지만 불운하게 빚을 진 사람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법원이 도와줘야 한다. 개인의 빚이 단기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장기간에 걸쳐 쌓인 것으로 개인들에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면 구제해 줘야한다. 과도한 빚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결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이 곤란해지면 가족 나아가 사회문제로 이어진다. 미래의 자산인 아이들은 공정한 경쟁에서 멀어지고, 빚의 대물림은 계속된다. 앞을 봤더니 너무 막막하고 뒤를 봤더니 너무 멀리 와버린 사람들, 법원은 결코 이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 회생법원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대규 서울회생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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