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광복된 조국으로 향하던 귀국선 뱃머리엔… 그리움과 희망이 파도처럼 일렁였네

입력 2020. 03. 13   16:32
업데이트 2020. 03. 1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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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귀국선’ -작사 손로원, 작곡 이재호, 노래 이인권


일제 패망 후 해외 각지서 귀국 물결
‘감격·들뜬 마음·희망’ 가사에 담아
노랫말 지은 당시 35세 손로원
대중음악계 불세출의 거장 꼽혀
1950~1960년 대표 작사가로 활동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자 일본 황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맞이한 우리 민족의 서글픈 환희, 광복 직후 해외 거주(징병·징용·근로정신대·종군위안부·망명·독립운동 등)자들이 무질서하게 고국으로 귀국했다. 이들은 무려 250만~300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귀국상황과 광복의 기쁨을 묘사한 노래가 <귀국선>이다.


1945년 8월 15일은 1876년 강화도조약부터 1945년 광복까지 70년 중에 민족혼의 햇살이 가장 밝게 비친 날이다. 그날은 음력으로 7월 8일, 수요일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10~1945년 해마다 2600여 명을 서대문형무소에 강제로 가두었고, 연인원 10만여 명이 수감되었다. 이들 중 10명 중 9명이 독립운동가였다. 해외 유랑객은 또 얼마였던가. 그들이 풀려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손로원과 이재호가 합작품으로 만들어서 이인권이 곡성탄가(哭聲歎歌)했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본 히로히토(1901~1989)는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항복을 방송으로 선언한다. 항복을 받은 상대방은 연합군사령관을 겸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태평양전쟁의 종결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식민지 34년 351일 만에 빛을 되찾았다. 우리 힘이 아닌 국제관계의 역학구조 속에서. 불행 중 다행, 내 땅을 내 땅이라고 부르고 내 이름을 우리말로 쓰고 부를 수 있는 서글픈 감격이었다.

이때부터 귀국의 물결이 일렁거린다. 중국의 상하이와 다롄,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의 시모노세키, 동남아시아 등등에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강제동원자·징집자·해외망명자·유학생·종군위안부 등등. 당시 조국을 그리며 눈물짓던 동포들, 그 누가 여기에서 예외일 수 있었겠는가. 출항지는 각각이었지만 귀항지는 부산항·인천항·원산항인들 예외였을까. 이 감격·서러움·희망이 교차되는 질곡의 근대사(1876~1945)와 현대사(1945~현재)의 시간 경계지대, 시대 서정을 손로원이 노랫말로 얽었다. 노랫말 1절은 그리던 조국에 돌아오는 동포들의 감격을, 2절은 들뜬 마음을, 3절은 새날에 대한 희망을 그렸다. 멜로디는 4분의 2박자 트로트 리듬. 노랫말은 손로원이 부산항 부두에서 귀국선의 모습을 직접 보고 만들었다. <귀국선>은 망망대해 일렁거리는 바다물결, 만경창파 위의 고국을 향한 배에 실었던 희망과 광복의 현실은 차갑고 따가운 현실과 맞물린다.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합의 38선, 남조선노동당 창당과 맞물린 좌우 이념 대립, 임시정부의 미온적 귀국, 찬탁과 반탁의 혼란, 남북한 각각 정부 수립,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등등.

이 노래는 신세영이 취입한 첫 음반이 실패한 이후 무대공연을 통해 알려졌다. 1945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에서 이인권이 1차 취입하고, 1951∼1952년 무렵 재취입하여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의 혼란한 상황과 기록물의 부재, 자료 존안의 불가항력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에 대한 세밀한 연구도 민족학적 입장에서 큰 의의를 갖는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당시 35세이던 손로원은 191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손희몽·불방각·손영감·나경숙·부부린·남북평 등의 예명을 사용했으며,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에서 대중가요계의 불세출의 작사거장이라 할 만하다. <물방아 도는 내력>, <봄날은 간다>, <잘 있거라 부산항> 등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단칸방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 놓고 이국정서가 가득한 노랫말을 만들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하여 부산항에 들어온 병원선에 타고 있는 간호사를 보고 선물을 하려고 노래를 지었다. 그의 성장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독학으로 대중가요 작사를 익힌 것으로 본다. 그는 미술로 대중예술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1930년대에 작사활동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귀국선>이 도화선이다. 그는 반야월과 함께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두주불사(斗酒不辭) 주종물문(酒種不問)의 애주가로 유명했으며, 1973년 향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광복 귀국선과 관련한 아픈 상흔,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은 어찌 되새겨야 하나. 1945년 8월 24일, 패망한 일본은 해군 우키시마호에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태우고 부산항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이 배는 그날 일본 마이즈로 앞바다를 항행하다가 원인 미상 폭발로 침몰한다. 일본 정부는 폭발원인을 미군의 기뢰로 지목하고 한국인 524명이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75년의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우리 근대사의 미궁(迷宮)이다.

유차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유차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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