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난민의 최전선’ 지켜온 의사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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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13. 오후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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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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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소금 눈물
ㆍ피에트로 바르톨로·리디아 틸로타 지음
ㆍ이세욱 옮김
ㆍ한뼘책방|260쪽|1만4000원

바르톨로가 부모를 잃고 홀로 구조된 9개월 아기 페이버를 안고 찍은 사진. 사연이 알려지자 입양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한 해 7000여명의 고아들이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바르톨로 페이스북


“나는 온갖 것을 조금씩 다 보았다. 여기, 람페두사에서.”

이탈리아 최남단,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불과 113㎞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섬 람페두사.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 징검다리와 같은 이 작은 섬은 전쟁이나 가난을 피해 모든 것을 걸고 떠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유럽의 관문’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2010년 말 시작된 ‘아랍의 봄’이 민주화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상황이 악화되면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을 찾는 난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람페두사는 ‘난민의 최전선’으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첫 방문지로 선택하기도 했다.

굶주림과 학대와 고문, 차가운 바다와의 사투 끝에 죽지 않고 살아서 람페두사에 다다른 난민들에게 피에트로 바르톨로(64)가 있었다는 점은 비극 속에 존재한 작은 행운이었다. 바르톨로는 람페두사에서 25년 동안 한결같이 난민들을 치료하고 도왔다. 그는 편견과 차별 없이 ‘동등한 인간’으로 그들을 대했다.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사람을 환대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한다. 이것이 바르톨로가 지킨 소박하지만 비타협적인 윤리였다.

아픈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험지로 달려간 의사들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준다. 바르톨로가 람페두사에서 난민들을 치료하며 겪은 일들을 써내려간 에세이 <소금 눈물>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의로운 의사의 영웅담에 그치지 않는다. 아프리카 난민들이 겪은 폭력의 참상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직한 삶에 대한 희망과 사랑 같은 이야기가 바르톨로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바르톨로는 이들의 몸을 치료하는 것만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마음의 고통도 함께 덜어주려 했다.

바르톨로와 난민들의 이야기는 잔프랑코 로시 감독에 의해 영화 <화염의 바다>로 만들어졌다. 영화 포스터의 일부.


바르톨로는 람페두사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그의 눈을 통해 전해지는 참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강간으로 임신한 소녀들, 좁은 보트 바닥에서 휘발유로 화학적 화상을 입어 피부가 온통 헐어버린 여인들, 폭력배에게 성기를 절단당한 청년, 저체온증으로 죽기 직전이 된 소년들…. 그중 가장 최악의 경우는 항상 녹색 자루 안에 있었다. 시신들은 녹색 자루에 담겨 방파제에 늘어졌다. 그 안에는 분만 후 탯줄도 미처 잘리지 않은 아기를 몸에 붙인 채 죽어 있는 여인들도 있다. 어느 배에선 좁은 지하칸에 갇힌 채 살기 위해 벽을 긁다 손톱이 빠지고 부러진 피투성이 아이들의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토록 많은 괴로움, 이토록 많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어느 시신에서든 기나긴 여행의 비극을 증언하는 표시들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는 람페두사에서 나고 자랐다. 가난한 어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어릴 적부터 배를 탔다. 어린 시절,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것을 아버지가 구해준 경험을 한 뒤로 “육신과 생명을 되돌려주는 바다가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람페두사 사람들에겐 “누가 바다에 빠졌다면, 그 사람이 누구이든 파도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용인될 수 없고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법칙이 있다. 그 ‘법칙’에 따라 바르톨로를 비롯한 람페두사 사람들은 바다에 빠진 난민들을 돕는다.

람페두사에도 ‘혐오’는 있었다. 바르톨로의 딸이 기생충에 감염되자 어떤 사람들은 “자업자득”이라고 말한다. 불안에 빠진 부모들은 수용 센터 근처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길 기피했다. 하지만 바르톨로는 말한다. “의사가 본분을 다하면 된다. 환자들을 제때 치료하여 전염을 피하면 된다. 환자의 국적이 무엇이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두려움에 좌우될 수 없다.”



바르톨로는 난민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했다. “그저 절대적인 가난이 문제”라며 “지옥에서 도망쳐 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동정조차 받지 못하고 강압에 따라 떠났던 땅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눈물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난민들 가운데 비싼 여행비 마련을 위해 한쪽 콩팥을 파는 장기매매 흔적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세계보건기구 발표에 따르면, 서양에서 이식하는 콩팥의 10%가 불법 적출된다”며 “배후에 의사들과 전문 기술자들과 생체 정보 분석가들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뛰어난 의사들이 그 혐오스러운 밀거래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한다.



람페두사는 유행성 감기만 돌아도 합병증으로 사람들이 죽을 만큼 의료시설이 열악했다. 뭍까지 배로 환자를 이송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바르톨로는 섬에 의료용 비행기를 도입하고, 이를 헬기로 대체하는 항공이송 서비스 체계를 마련했다. 바르톨로의 노력으로 람페두사 보건소는 22개 진료 분과를 갖춘 기관이 됐다. 바르톨로는 인도주의적 의료원과 이민센터를 설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밝힌다. 바르톨로는 지난해 유럽의회 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사회민주진보동맹이라는 교섭단체의 일원이 되어 시민적 자유와 정의와 국내문제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바르톨로의 이야기는 영화 <화염의 바다>로 만들어져 2016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장 메릴 스트리프는 “이것은 긴급한 영화, 예견적인 영화, 꼭 필요한 영화”라고 말했다. 2018년 500명이 넘는 예멘 난민이 제주를 찾았을 때, 한국은 ‘난민’이라는 새로운 질문과 마주했다.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가운데 환대와 도움도 있었다. <소금 눈물>은 지금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이야기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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