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표상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은 국가가 왜곡한 기억에 도전하는 것이며 현재진행형인 민주화운동으로서 기억투쟁의 의의를 갖는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를 향한 것이며, 또 동시대인이면서도 민주화운동의 밖에 있던 이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정당한 기억의 공동체를 확산해가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한 공동체가 확대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민주화운동의 역사 정리는 밖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주화운동 참여자의 자기학습 과정인 동시에 내적 성찰의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발간사」 중에서
현대사 전공자들의 공동연구로 진행된 한국 민주화운동사 총정리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돌베개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총정리하는 <한국민주화운동사>(전3권)의 1권을 출간한다. 1권은 제1공화국 이후 제3공화국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주요 사건으로는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에서부터 1970년의 전태일 분신, 1971년의 광주대단지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다. 유신 시기와 1987년 서울의 봄 이후의 상황을 정리한 2권과 3권은 오는 2010년까지 완간될 예정이다.
이 책은 편찬위원회(위원장 서중식)가 전체 목차와 중요도에 따른 분량, 해석의 범위 등을 논의해 정하고, 각 시기별.주제별 전공 연구자가 1차 집필을 진행한 후 2~3회 토론을 거쳐 수정하고, 어조를 통일하고, 최종적으로 자문위원들이 교차 검토를 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일종의 공동연구 성격을 띠는 것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최근 성과까지) 한데 모아 균형적인 서술, 보편적인 서술로 종합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이전까지 ‘민주화운동사’의 정리 작업이 산발적으로, 개별적으로, 부문별로 이루어져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공동연구’의 성격으로 총정리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민주화운동사의 연구를 더 활성화.본격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는 의지를 담은 작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 위원회’) 등 과거사 위원회들의 조사자료 등, 최근 발굴되거나 발표된 자료들까지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여러 1차 자료들을 교차분석하여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여러 측면에서 자료적?학술적 가치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 내용은 한국 현대사의 각 시대 상황에 비추어 민주화운동사의 주요 사건이나 맥락을 폭넓고 충실하게 기록하고, 그에 균형적인 해석과 평가를 보탠 것으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과 민주화과정에 대한 정보에 목마른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전문 연구를 활성화하는 기반을 강화하여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심화와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런 작업은 지금 한국 현대사를 두고 진행중인 기억의 전쟁에서 국가기구나 특권적 집단의 왜곡에 저항하고 공공의 해석, 공공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시대 상황의 포괄적 이해에 바탕을 둔 한국 현대 민주화운동의 범위 및 성격 규정
충분한 학술적 논의를 거쳐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종합적?객관적으로 총정리하는 일은 우선 역사학적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개념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을 전제로 한다. 이 책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등 이승만 정권 초기 독재에 대항하여 싸운 활동들을 포괄적으로 ‘민주화운동’의 범위에 포함시킬 뿐 아니라, 교련반대시위 등 학원자유화운동, 무허가주택 철거반대투쟁 등의 생존권 투쟁, 나아가 제주4?3사건 등 주민 집단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과거사청산운동, 또 사카린밀수규탄투쟁과 같은 부정부패?비리에 대한 비판과 항의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또 다양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 빈민운동 등 다양한 부문의 운동들을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을 뚜렷이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민주화운동으로서 공유하는 보편적 기준과 특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 1960년의 3?4월 시위와 4월혁명 전반을 구분하여 서술하고, 6.3시위와 한일협정반대투쟁 전반을 구분하여 서술하는 데에 상당히 공을 들인 점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민주화운동사의 주요 사건들을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시대 상황의 설명과 해석을 중시하는 이러한 서술 방식은 한국 민주화운동사를 종합하기 위한 틀이자 방법론으로, 그 강점은 참여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발휘된다. 이 책은 각 사건별?시기별로 참여주체들의 성향과 의식을 파악하고 심도 있게 분석함으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참여, 학생운동의 의의와 한계, 대안 정치세력의 빈약성 등의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다양하고 광범한 자료를 참조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해낸 한국 최초의 ‘민주화운동사’
국가기구, 강력한 정치세력 등의 억압에 대한 저항을 근간으로 하고, 최근 수십 년 사이 진행되어온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격상, 그 자료들은 참여자들의 공식적?비공식적인 증언이나 회고, 당시의 언론 보도 등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광범하고 치밀한 조사 자료들이 ‘진실.화해 위원회’ 등의 과거사 위원회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지만 이러한 다양한 범위의 1차 자료들을 정리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은 아직 현대사 학계에서 진행된 바 없다.
이 책은 기존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제시된 1차 자료들을 서로 교차분석하고 최근의 조사 자료들을 참고하여 최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실 자체를 정확히 기술하고자 했다. 또 다양한 현대사 전공자들 사이의 수차례 논의와 토론을 거치는 공동작업 방식을 통해 사실관계에 대한 해석과 설명에 있어서도 최대한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가령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진보당조봉암사건 결정 요지」에는 진보당사건에 대한 미국의 시각과 입장이 부정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공식 전문과 비공식 문서를 통해 제시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사실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최소한의 의견 표명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권의 내용 및 특징
『한국민주화운동사』 제2권은 3부로 나누어 서술된다. 1부에서는 유신체제 전기, 즉 1972년 유신헌법 선포로부터 1975년 긴급조치 9호 선포 이전까지의 시기에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2부에서는 유신체제 후기, 즉 1975년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부터 1979년 10·26정변, 즉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까지의 시기에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3부에서는 종교계, 언론?출판계, 지식인?문화계, 인권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각 부문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서술하였다.
부문별 운동사를 다룬 3부는 민주화운동의 주체가 더 다양해지고 운동의 조직력이 더 강화된 1970년대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당시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종교계의 활동을 전체 민주화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배치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3부의 1장이 주목할 만하다. 언론?출판계와 노동계처럼 역시 당시 좀더 본격화된 부문의 운동사 역시 간결하고도 객관적, 표준적인 서술로서 살펴볼 만하다. 가족이 제기하는 구속자, 정치범의 인권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인권운동’처럼 당시 의식적으로 전개된 부문운동이 아니더라도, 초기의 상황을 포괄적으로 짚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부 1장에서는 유신체제의 성립과 그 구조적 성격을 다루었다. 주요 내용은 유신체제 성립의 배경, 유신헌법의 성격, 유신체제하에서 시도된 사회적 동원체제(새마을운동과 사회문화적 통제시스템) 등이다. 2장은 유신 전기에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1972∼1973년의 시기와 1974∼1975년의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2부 1장에서는 긴급조치 9호의 출현 배경과 성격을 분석하고, 민방위훈련, 주민등록제도, 반상회와 같은 사회적 통제 및 동원 기제, 새마을운동과 새마을교육, 충효교육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동원기제를 다루었다. 2장에서는, 긴급조치 9호하에서 전개된 반독재민주화투쟁을 종합적으로 개관하였다. 3장에서는 유신체제의 붕괴를 초래한 부마항쟁에 대해 서술하였다.
1부와 2부에서 연대기 순으로 설명되는 유신체제기의 민주화운동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새마을운동, 민방위훈련, 주민등록제도, 반상회, 충효교육 등 국가의 억압기제에 대한 설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신체제기 그 자체의 특이성이기도 한데, 기존의 민주화운동사 서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관한 보다 엄밀한 분석은 이 시기 민주화운동의 조건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