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명도 후덜덜한 '범죄단체' 재판, 제가 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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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법정 ②] 조폭보다 무서운 보이스피싱 범죄 "여러 사람 인생 망가뜨립니다"

[오마이뉴스 소중한 기자]

'당신의 재판'이 진행될 수도 있는 법정 안팎의 내밀한 모습을 '시끌법정'에서 보여드립니다. <편집자말>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 안내문에 적혀 있는 '범죄단체가입' 혐의 재판.
ⓒ 소중한

 
매일 아침 서울중앙지방법원 기자실에 도착하면, '오늘의 재판 안내' 게시판에 걸려 있는 두툼한 종이 뭉치들부터 살펴봅니다. 중요 재판인데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중요 재판은 아니더라도 눈길이 가는 재판은 없는지 찾아보는 거죠.
 
그렇게 재판목록을 뒤적이다 보면 '거참 ○○ 때문에 재판받는 사람이 이렇게 많나'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으로 지난 기사에서 다뤘던 음주운전이 있죠. 그런데 고개를 좀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 재판목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바로 '범죄단체 가입 등'입니다.
 
범죄단체 가입,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영화 <신세계>의 음습한 기운이 떠오른 건 왜일까요. 재판목록에 '범죄단체 가입 등'이 주르륵 나열돼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 조직폭력배가 이렇게도 많았던 걸까요.
 
두 달 전쯤, 그 무시무시한 재판을 보기 위해 한 법정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지, 아직 다른 재판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시간이 좀 지나 "2019고단XXXX, 피고인 △△△, □□□"라는 판사의 부름이 있었고, 구속 피고인이 드나드는 법정 내 문이 열렸습니다. '범죄단체 가입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두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얼굴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법정.
ⓒ 소중한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상상하고 계신가요. 법정 안에선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그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지만, 피고인 두 사람은 너무도 앳된, 우락부락하지도 왜소하지도 않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용이나 호랑이가 몸을 휘감고 있지도 않았고요.
 
최근 진행되는 범죄단체 가입 재판은 십중팔구 보이스피싱 범죄 사건입니다. 보이스피싱 범죄 자체는 사기에 해당하지만, 이 범죄가 날로 조직화하면서 범죄단체 가입 혐의로도 처벌이 가능해진 것이죠. 죄명에 범죄단체 가입 '등'이라고 적혀 있는 이유도 사기와 함께 묶여 재판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형법 114조입니다.
 
제114조(범죄단체 등의 조직) 사형, 무기 또는 장기 4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집단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그 구성원으로 활동한 사람은 그 목적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 다만, 형을 감경할 수 있다.
 
무시무시한 법 조항입니다. 누군가는 보이스피싱 범죄와 이 조항을 연결시키는 데 주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개그프로의 소재로 자주 사용될 만큼 보이스피싱 범죄는 별것 아닌 일로 치부돼 왔으니까요. 유튜브에 '보이스피싱'을 검색해보시면 지금도 '변호사에게 조롱당하는 보이스피싱범', '보이스피싱 웃음참기 레전드', '보이스피싱 사기꾼이 답답해서 도망갔음ㅋㅋㅋㅋ' 등의 동영상이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실제 보이스피싱 범죄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눌하지도 않고, 허술하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습니다. 형법 114조로 다뤄질 만한, 조폭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범죄입니다. 아래 표에 나와 있는 것처럼 2019년 한 해 보이스피싱 범죄 검거 건수는 4만 건에 육박하고, 검거 인원만 5만 명에 가깝습니다. 더 무서운 건 이 수치가 매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겁니다.
 
피해 액수 또한 놀랍습니다. 2015년 2040억 원이던 피해 액수는 2018년 4040억 원으로 3년 만에 약 2배나 늘었고, 2019년엔 급기야 6398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 경찰청

ⓒ 경찰청

 
거대한 조직

보이스피싱 범죄는 '기업형 조직범죄'입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총책을 정점에 두고 해외의 콜센터팀과 국내의 현금수거팀이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점조직(점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서로 연결되지 않은 조직)이기 때문에 한 명을 잡는다고 해서 범죄 행위가 중지되지도 않습니다. 피해자는 거대 기업의 먹잇감인 셈입니다. 자세한 걸 알고 싶다면 이 기사("조폭보다 훨씬 무섭다" 완전체 기업 대해부)를 읽어보세요.
 
지난 1월 들어갔던 법정에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형량을 줄이려는 의도로 총책 김○○을 증인으로 신청했습니다. 사기와 범죄단체 가입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인은 조직에서 자신의 역할이 미미했다는 말을 증인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재판 분위기가 영 이상했습니다. 구속 상태의 피고인이 법정에 들어서며 방청석의 지인을 향해 들릴 듯 말 듯 무슨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입 모양을 자세히 보니 '증인이 잘못 왔어요'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가 들어온 문 쪽에는 증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직 수갑을 벗지 못한 채 서 있었습니다. 피고인의 변호인이 입을 뗐습니다.
 
"아... 그게... (이 조직에) 김○○이 두 명 있습니다. 저희가 신청한 증인은 사장 또는 부사장으로 불리는 총책 김○○인데, 지금 출석한 사람은 동명이인입니다."
 
절차상 문제가 있었는지 총책이 안 오고 이름이 같은 말단이 증인으로 나온 상황. 아무튼 영문도 모른 채 법정에 왔던 말단 김○○은 법정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다시 구치소로 돌아갔습니다.
 
한 조직에 동명이인이 있을 만큼,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은 생각보다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2016년 적발된 한 조직은 조직원 수만 120여 명에 달했고 콜센터 수만 11개였습니다. 이 조직으로 인해 3000여 명이 54억 원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법조계에선 보이스피싱 범죄를 엄벌하는 분위기입니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대부분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겨지고, 재판에서도 거의 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판사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선고를 내리며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문구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보이스피싱 범행은 고도의 조직적·계획적 범행으로 사회적·경제적 피해가 크고 사회 전체 구성원의 신뢰 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선량한 다수의 생활에 불안감을 주는 중대범죄입니다. 죄질이 좋지 않아 엄히 처벌할 필요성이 인정됩니다."
 
누가 잡히나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이 지난2018년 6월 편취 금액을 송금한 뒤 은행을 나서고 있다.
ⓒ 광주 북부경찰서

 
다만 여러 법정을 다녀보니, 피고인 상당수가 조직에서 중책을 맡은 인물은 아닌 듯했습니다. 검거된 이들 중 상당수가 해외의 콜센터에서 전화를 돌리거나, 국내에서 돈을 걷던 이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정말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조직에 가담했다가, 관리자의 강요에 의해 혹은 수익의 달콤함에 취해 범죄의 수렁에 빠진 이들도 많아 보였습니다.
 
총책이 법정에 서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해외에 거주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도 쩔쩔매는 상황입니다(그래서 꼭 총책 김○○을 법정에서 보고 싶었는데, 그는 제대로 증인 신청이 이뤄진 다음 공판엔 감기에 걸렸다며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 코로나19!).
     
지난달 한 법정에선 불구속 상태의 피고인이 선고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방청석에 앉아 있던 그는 판사의 부름에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손에 쥔 편지를 미처 판사에게 전하지도 못한 채, 그는 판사가 읽어 내려가는 선고 내용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결과는 징역 1년 8개월. 그 자리에서 구속 절차가 진행됐고, 피고인은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법정 내 따로 나 있는 문으로 퇴장했습니다. 방청석에 있던 피고인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입에서 이따금 신음이 터져 나오자 경위는 법정 밖으로 어머니를 안내했습니다. 그제야 방청석 의자에 있던 아들의 겉옷을 발견했는지 어머니는 경위를 향해 "○○이 잠바 좀 건네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법정 밖으로 나온 어머니는 연신 "우리 ○○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랬어요"라며 경위에게 호소했습니다.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위는 그저 착잡한 표정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다 지친 어머니는 "우리 ○○이 어디 가서 보면 돼요?"라고 물었고, 그제야 경위는 "서울구치소 가시면 돼요"라고 입을 뗐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진짜 나쁜 건 수많은 범죄자를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이게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인지를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진짜 나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기며 수사망을 피해갑니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박경세 부산지검 강력부 검사를 만났었습니다. 그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전과는커녕 경찰서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범죄자로 만들고 (이들을 시켜) 전 국민을 상대로 피해를 입히고 있어요. 중대 범죄이자 최악질 범죄죠."
 
최근엔 보이스피싱 범죄 재판 경험이 있는 어느 판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범죄를 저지른 개개인을 떠올려보면 좀 딱할 순 있어요. 처음엔 정말 모른 채 가담한 사람도 많은 거 같고요. 근데 이건 엄격하게 다룰 수밖에 없어요. 발을 못 들이게 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뭣 모르고 통장을 건네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위한) 대포통장으로 사용돼요. 그럼 다 처벌받는 거예요. 전과자가 무수히 양산되는 거죠. 보이스피싱 그거, 여러 사람 인생 망가뜨립니다."
 
 청년 구직자를 대상으로 한 보이스피싱 범죄 연루 예방 홍보물.
ⓒ 금융감독원 보이스피싱 지킴이

 
누가 당하나

여담입니다만, 제가 이렇게 구구절절 말씀드렸는데도 '난 절대 안 걸려들어'라고 생각하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전에 보이스피싱 범죄 기사를 쓰면 '왜 당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식의 댓글이 꼭 달리더라고요.
 
하지만 취재 중 여러 피해자와 접촉해보니 보이스피싱 범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이 불문, 성별 불문, 학력 불문, 직업 불문이죠. 피해자들은 공통으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젊거나, 고학력이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신 분들이요.
 
"제가 이런 사기에 당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홀린 듯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3000만 원을 송금한 뒤더라고요. X 팔려서 어디에 이야기도 못 합니다."
 
25년차 현직 검찰 수사관이 쓴 <속임수의 심리학>에는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수많은 피해자를 만나면서 저자가 느낀 한 가지는 '속임수에 걸려드는 데는 나이도, 학력도, 직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똑똑한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얼마든지 당할 수 있다. 사기꾼은 피해자의 가장 약하고 민감한 심리를 건드려 한순간에 자빠트린다."

[시끌법정①] 음주운전 재판서 생긴 일 http://omn.kr/1msw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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