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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장동민 교수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3-10 15:47

백석대학교 장동민 교수.(사진제공=백석대학교)

 관객 수와 영향력 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는 영화 ‘국제시장’, 그 첫 장면은 1950년 12월24일 흥남부두의 피난민 철수작전 중 배에 올라타는 장면이다. 아마 50대 이상은 되어야 이 노래를 아실 텐데,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소주 한 잔 걸치면 눈물을 흘리며 목 놓아 부르는 노래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현인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중) 흥남철수작전은 이 노래의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물밀듯 밀려오자 국군과 유엔군은 전선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로를 통한 후퇴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함경도에 남아 있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군함을 타고 해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흥남항을 통해 철수할 병력은 국군과 미군을 합쳐 10만 명이 훨씬 넘었고, 차량도 1만7000여대나 되었다. 이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우리 해군과 미국 해군은 투입 가능한 모든 함정을 흥남으로 보냈다. 그런데 흥남 항구에서 문제가 생겼다. 미군과 국군의 철수 소식을 듣고 10만 명이나 되는 피란민이 흥남 항구로 몰려온 것이다. 눈발이 흩날리는 체감온도 영하 40도의 한 겨울이었다.

 미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배에 태우기를 주저하였다. 군인과 물자를 수송하기도 배가 빠듯하고, 시간이 지연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고, 혹시 적의 스파이가 침투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흥남철수작전의 총사령관 미국 알몬드 장군을 설득했다. “미군이 피난민을 버리고 간다면 가야 한다면 국군이 피난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겠다.” 고 강하게 건의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군의 장비와 차량은 모두 버리고, LST(Landing Ship for Tank) 화물선에 피난민을 태우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 이 사람들을 모두 구출하도록 하라.” 

 또한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현봉학이라는 분도 잊을 수 없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배 위의 장군을 영어로 설득하던 한 젊은이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1944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대학에서 수련의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전쟁이 나자 미군 사령관 민사담당 고문관으로 참전하였다. 함흥과 흥남이 다시 공산당의 지배 아래 놓이면 기독교인을 포함한 주민들을 박해할 것은 불 보듯 뻔하였다. “나는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고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고 결심했다”라고 그의 자서전에 남겼다.

 고작 선원 몇 십 명이 생활 할 수 있는 배,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라는 화물선에 무려 1만 4천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태웠다. 그 배의 선장인 라루(Leonard LaRue)는 고민에 빠졌다. 바다에 기뢰들이 떠 있고, 기름을 실은 화물선이라 화재의 위험마저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 “저 사람들을 모두 너의 배에 태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항해를 시작하여 거제도까지 피난민을 이송해 주었다. 라루 선장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 뉴저지의 한 수도원에서 남은 평생을 수도사로 살았다. 그가 그 때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하나님의 손이 내 작은 배의 키 위에 있었다.” (God's own hand was at the helm of my little ship.)

 드디어 피난민을 실은 배가 출발하였다.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물도,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는 배, 눕기는 고사하고 앉을 자리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이 3일 동안 선 채로 항해해야 하였다. 놀랍게도 항해도중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미군이 이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첫 아이는 김치원(손양영), 둘째는 김치투... 김치파이브(이경필)까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났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배에 타고 있던 사람 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공산당이 기독교인들을 가장 싫어하였기 때문에, 다시 인공시대가 되면 죽을 것을 알고 목숨을 걸고 남하하려 한 것이다. 이들이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어떻게 이겼을까? 배 안에서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찬송을 부르며 견디었다. 그 배에는 내가 섬기던 교회의 한 아무개 권사님도 계셨고, 대한신학교와 백석신학대학원에서 제자들을 길러내신 최순직박사님도 함흥 출신 기독교인으로 기적적으로 혈혈단신 그 배에 타게 되었다. 물론 문재인대통령의 부모님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역사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기독교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가 하는 점이다. 통역관으로 참전한 현봉학은 자신을 미국에서 공부하게 한 이유가 이때를 위함이라 생각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알몬드 장군에게 호소하였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10만 명의 피난민을 철수시킨 알몬드 장군, 배의 키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7,600톤의 배에 무려 14,000명을 태운 라루 선장 등. 이들은 모두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최선을 결정을 내렸다. “한국 역사발전을 위하여 기독교가 한 일이 뭐가 있어?”라고 묻는 젊은이들에게 위의 이야기를 전파해 주시기 바란다.

 둘째, 미국이 우리를 위하여 한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 병력을 투입하여 전쟁에 참가하였고, 4만 명의 전사 및 실종자와 10만 명의 부상자를 낸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젊은 병사들이 이름도 생소한 이국땅에 와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 군사적, 물질적 영향 뿐 아니라, 미국의 인도주의와 정직성과 근면과 금욕의 기독교 정신이 우리 정신의 일부가 되었다. 후일 미국이 청교도정신을 상실하고 물질주의와 패권주의에 빠져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 역사에 끼친 선한 일까지 묻혀서는 안 된다. 

 셋째, 우리가 진 빚을 갚아야 한다. 전쟁의 와중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10만 명의 피난민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면, 이제 우리도 전쟁의 와중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탈북자와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정 자녀들에게 억울한 일을 하면 안 된다. 난민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다. 난민 때문에 져야 할 사회적 부담이 크고 자칫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구원할 전도의 기회도 될 수 있고, 또 그들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발전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경계심은 가지되 포비아(phobia)에 빠지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 신세였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두려움에서 비롯된 분노를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나도 미국에서 나그네로 살 때 큰아이를 낳았는데, 수만 달러 들어가는 병원비를 소셜워커의 도움을 받아 단돈 500달러만 낸 적이 있다. 그것도 50달러씩 10개월 분할로. 또 푸드스탬프와 분유, 기저귀 등을 받아서 키우기도 하였다. 그 빚을 갚기 위하여 필리핀 노동자와 중국 노동자를 위하여 선교회를 세워 우리 땅에 온 나그네들을 돕는 일을 하였고, 손가락 절단된 사람, 당뇨병 환자, 치질 걸린 사람, 살인 사건으로 고통당하는 외국인 가정들을 도왔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23:9)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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