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현실 가능한 ‘백 투 더 퓨처’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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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23. 오전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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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마흔다섯 번째 책은 ‘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기시미 이치로 지음 / 이환미 옮김 /부키)이다.

표지(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가 성공 혹은 실패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갈 용기 아들러 심리학’에 나오는 말이다. 아들러 심리학과 고대철학에 관해 연구해 온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신작 에세이 ‘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는 독특한 형식부터 눈길을 끈다. 열아홉 편의 한국영화 속 주인공들이 영화 밖으로 걸어 나와 철학자와 대화를 나눈다. 주인공들은 그 대화를 통해 삶의 방향을 찾아간다. 그들이 철학자 앞에 던져 놓는 삶의 고민들은 영화 주인공이라고 해서 특별하거나 대단하거나 그렇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갈등과 고민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우선 두 가지에 놀랐다. ‘내 인생도 고민거리가 참 많구나’ 하는 점과 ‘인생의 고민이라는 것이 이토록 쉽게 풀릴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던 점이 나머지 하나다. 자신의 지난 고통을 비겁 없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하나만으로도 가슴속 응어리가 쉽게 풀리기도 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계속 조금씩 더 많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내 과거의 기억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지난 일이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조금도 잊지 못한 일들이 있었고,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안에서 죽어 썩어가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게 보기 싫다며 거적 따위로 덮어놓고 방치한 듯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그곳으로부터 풍기는 악취가 어느 순간부터 나의 모든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외면에도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점을 깨닫게 했다.

제목처럼 이 책을 읽으면 정말 나쁜 기억을 지우개처럼 지울 수 있을까?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 책의 핵심은 간단하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므로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과거의 경험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나쁜 기억이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도, 좋은 기억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온갖 소동을 벌인다. 하지만 철학자의 ‘백 투 더 퓨처’는 달랐다. ‘현재의 내 이해’에 따라 나의 과거를 내가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훨씬 간결하고 깔끔하다. 무엇보다 이건 현실 가능한 ‘백 투 더 퓨처’였다.

인간의 삶에 전적인 것은 없다. 전적인 것은 종교적 영역이다.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신에게, 그리고 내세에 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에서 고통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규정할 뿐이다. 아직은 어린 내 아들의 뽀뽀는 엄마인 나에게 전적인 행복 같기도 하지만, 곧 성인으로 자라 내 곁을 떠나가는 상실의 운명을 상기시킨다는 면에서는 고통이 없지 않다. 이조차 전적이지 않은 것이다. 가장 황홀한 순간에 우리는 시간이 멈추길 바라지만, 멈춰진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지금풍경, 73x61㎝, Oil On Canvas, 2020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무렵의 젊은 나는 이미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도무지 앞날에 대한 계산은 안 되고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던 30대 초반의 어느 날 나는 문득 아프리카로 떠나기로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미지의 곳에서 내가 경험하게 될 고통과 두려움이 나를 온전히 깨워 주길 바랐다. 이 여정은 어리고 미숙했던 시절 내가 알지도 못하고 저지른 일 중에 가장 기특한 것이었다.

‘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를 읽고 나서 나는 귀여운 반역자처럼,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마구 떠올리고 있었다. 나의 아프리카 시절,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한참을 더 들어가 만났던 아주 작은 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이름조차 잊어버린 그 섬을 그리고 싶었다. 나의 오랜 기억속에서 그 섬은 가장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풍경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아프리카의 외딴 섬에서 나는 현실적으로 지독하게 고독했기 때문이다. 고통과 행복이 단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었던 내 기억을 그림으로 그려 끄집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시도였지만 동시에 아주 즐거운 도전이기도 했다.

앰비밸런스(Ambivalence), 즉 ‘양가성’이란 사랑과 증오, 복종과 반항, 쾌락과 고통, 금기와 욕망같이 서로 대립적인 감정 상태가 공존하는 심리적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를 읽는 동안 나는 인생에서 일어났던 양가성의 원리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앞으로 겪게 될 모든 경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부여하는 의미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나자 다시 내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www.jiso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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