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예술가의 사회] `힘찬 소`를 그린 이 화가는 `힘없는 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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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가, 1916~1956)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 日서 유학
식민지 시대 일본인 여성과 결혼

해방 후 전쟁 겪으며 급격히 궁핍
결국 가족 일본에 보내며 생이별

아내·자식과 재회할 돈 마련 위해
필사적으로 그림에 매달렸지만…
끝내 그리움 파묻혀 홀로 눈감아


2018년 47억원에 낙찰된 `소`.
이중섭은 생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한국 대표 화가가 됐다. 이중섭이 그린 소 그림의 가치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재작년 경매에서는 47억원에 팔렸다. 그는 비극적인 삶으로도 유명하다. 궁핍함 속에서 41세에 행려병자로 생을 마쳤다. 아내·아이들과 생이별한 뒤 담뱃갑 은박지에 가족을 그리며 그리움을 달랜 일화는 슬픈 전설처럼 전해진다.

이중섭의 삶은 파란만장했고 결국 슬픔으로 끝났지만, 시작만큼은 풍족했다. 대지주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유년을 보냈다. 그의 형은 백화점을 운영할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이중섭은 식민지라는 엄혹한 시대에서도 미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스무 살 이중섭은 더 깊이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키가 훤칠하고 운동도 잘했던 이중섭은 일본 미술학교에서 인기 많은 학생이 됐다.

이중섭을 마음에 담은 여학생 중 한 명이 야마모토 마사코다. 이중섭 역시 그에게 끌렸다. 물론 고민도 있었다. 이중섭은 오산학교 출신이다. 독립운동가를 무더기로 배출한 그곳에서 이중섭도 민족의식을 체화했다. 그런 이중섭에게 일본인 여성과 교제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힘은 국경·민족·역사를 뛰어넘었다. 둘은 연인이 됐다. 태평양전쟁 포탄이 일본 본토를 할퀴던 1943년 이중섭은 어쩔 수 없이 귀국한다. 2년 후 야마모토 마사코도 혈혈단신으로 연인을 찾아 조선에 왔다. 둘은 원산에서 결혼했다. 이중섭은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만들어줬다. 남쪽에서 온 덕 많은 여자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원산에서 제주까지

원산에서 살림을 차린 그들은 아들 둘을 낳았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불쑥 먹구름이 드리웠다. 집안 가장 역할을 했던 이중섭의 형이 나쁜 자본가로 몰려 공산당에 조사를 받았다. 그 이후로 행방불명됐다. 소리 소문 없이 처형당했다는 불길한 소문도 돌았다. 1950년 한국전쟁까지 터졌다. 이중섭은 가족을 데리고 피란 행렬에 오르기로 했다. 어머니와 형수는 설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실종된 이중섭의 형을 기다린다며 집을 지켰다. 이중섭은 어머니에게 "금방 돌아올 테니 조심하시라"고 말한 뒤 집을 떠났다. 모자의 마지막 인사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북쪽은 갈 수 없는 땅이 됐다. 이중섭 가족은 원산에서 부산까지 내려와 피란촌에 도착했다. 그리고 더 따뜻한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제주도에 도착했다. 해안가에서 게나 조개를 잡아먹었다. 여전히 궁핍했지만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피란 여파로 이남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폐결핵이 심해져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일본에 있는 이남덕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까지 전해졌다. 1952년 이중섭은 아내와 자식을 잠시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그리워서 그리고 그렸다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이곳저곳을 떠돌던 이중섭은 그리움 때문에 몸서리쳤다. 결국 1953년 일본에 가기로 한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단절한 시기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본행 티켓을 구할 수 없었다. 이중섭은 선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배에 올랐다. 일본에서 일주일 체류할 기회를 얻었다. 가족과 짧은 행복을 만끽하고 다시 한국행 배에 올랐다. 이중섭은 가족에게 손을 흔들었다. 영원한 이별이 될 줄도 모르고.

이중섭 대표작 대부분은 그의 삶 끝자락에서 탄생했다. 가족과 생이별한 뒤 이중섭은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흰 소'(1954)는 이 기간에 완성됐다. 훗날 세상은 이중섭이 그린 하얀 소를 두고 여러 해석을 붙였다. 흰색은 백의민족을, 말라비틀어진 소의 외형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족을 상징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중섭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었다. 자신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든, 가족을 다시 한국에 데려오기 위해서든 돈이 필요했다. 이중섭은 야심 차게 전시회를 열었다. 그런대로 호평받았다. 하지만 그림 판매 수익은 변변치 않았다. 오산학교 후배가 큰돈을 벌게 해준다며 중개무역 사업을 제안했다.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할 꿈에 부풀어 선뜻 사업에 동참했다. 후배는 이중섭 등골만 빼먹고 도망쳤다. 사기 당한 이중섭에게 남은 건 빚뿐이었다. 가난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족을 볼 수 없으리란 불안감에 잡아먹혔다. 거식증으로 몸이 쇠약해졌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겼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1956년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지켜보는 사람 없이 눈을 감았다.

"아빠가 자전거 사줄게요"

김소월과 이중섭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오산학교 출신이다. 이중섭은 한참 선배인 천재 시인 김소월을 동경했다. 두 사람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도 비슷하다. '그리움'이란 정서를 김소월은 글로, 이중섭은 그림으로 남겼다. 그리움이 알알이 맺힌 김소월 시를 읊던 이중섭은 알았을까. 자신이 그 시의 화자처럼 그리움에 파묻혀 살다가 떠날 운명이라는 것을.

이중섭이 1954년 12월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분이다. "아빠가 가면 반드시 태현이하고 태성이한테 자전거를 한 대씩 사줄게요. 건강하게 사이좋게 아빠를 기다려주세요. 이번에 엄마가 편지 보낼 때 태현이도 같이 써야 해요.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건강히 안녕." 자식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소박한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이중섭은 죽고 나서야 유골로서 그리운 가족 품에 안겼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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