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살림살이를 자기 마음 안으로만 낱낱이 돌리세요

큰스님 …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얘기해 드릴까요? 우리가 꼭 공부는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부를 한 사람에 한해서 그래도 진실하게 내 안으로, 낱낱이 안으로 굴려서 안으로 돌리는 거, 이 생활하는 모든 거, 죽고 사는 거, 생사윤회를, 모든 거를 내 마음 안으로 돌리는 데에 묘미가 있는 거죠? 지금도 돌려놓으라고, 놓으라고 그러듯이 말이에요.

그렇게 해 가지고 가는 사람이 만약에 죽을 때는, 죽기 전에 자기 갈 자리를 자기가 다 마련해 놓고 가요. 이건 죽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죽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거기에 요점이 있어요. 공부를 그렇게 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몸을 벗을 때도 벗기 전에 자기가 자기를, 벌써 정자와 난자를 쫓아서 어디를 자기가 선택해요.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가 열 달 내내 길러요. 그래서 여기서 생명이 딱 끊어지면요, 사람뿐만 아니라 저런 다른 큰 생명이 된다든가 이래도 말이에요, 그걸 꼭 사람으로만 비유하지 마세요. 사람 이외의 정말 벗어난 선인들이 된다 하더라도 그걸 정망해서 다 해 놓고, 또 사람이 된다 하면 만 아홉 달이 되지만 이 만 아홉 달은 우리 지구에서 쓰는 거지 딴 데서는 만 아홉 달이라는 게 똑같이 쓰여지질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단 순간에,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목숨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그쪽으로 가고 이 옷은 벗어요. 또 사람으로 내가 화한다 할 때는 거기 배 속에 들어가서 아홉 달 내내 길러 가지고 내가 목숨이 한 찰나에 딱 떨어질 때 벌써 그리로 가요. 이건 벌써 미리 가 있어요. 여기는 사는 습만 있다 뿐이지 그리로 가서, 바로 자기가 길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선처해서 벌써 자기를 기르고 있어요. 그래 길잡이는 자기죠. 자기 이외에 길잡이가 없어요. 그걸 아셔야 돼요.

공부를 한 사람에 한해서 그래도 진실하게 안으로,
낱낱이 안으로 굴리고 안으로 돌리는 거,
이 생활하는 모든 거, 죽고 사는 거, 생사윤회를,
모든 거를 내 마음 안으로 돌리는 데 묘미가 있는 거죠.

또 공부를 안 한 사람에 한해서는 자기가 자기 개척을 못 하고 자기가 길을 모르고 컴컴하고 그러니까 죽어도 누가 인도할 사람이 없단 말이에요. 살던 자기의 습이 있어 가지고 눈이 캄캄하니까. 그래서 살던 습에 의해서 자기가 착을 두고 있는 데에 그냥 머물러 버리죠. 거기에 머물러져 버리니까 때에 따라서 그 영계는 집에서 뱅뱅뱅뱅 산 사람한테 도는 거죠. 자식과 부모 뭐, 누구를 막론하고 얘기예요. 집안의 친척은 다 알지 않습니까, 자기가? 죽기 전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길은 몰라도 그 길은 알거든. 그러니깐 그 습에 의해서 뱅뱅뱅뱅 돌아다니죠, 자기에게 잘해 준 사람 앞에 또는 자기 친구한테. 그래서 그 친구로 인해서 남의 논 등에 주저앉는 법도 있죠. 저희 집 식구들이 시원치 않고 그러면 친구한테로 가거든요. 이게 참, 문제가 여기에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한 사람에 한해서, 바깥으로만 만날 돌고 다니던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길을 자기가 인도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 타의에 의해서 내가 길을 인도받아야 할 텐데 그 은사도 똑바른 사람을 못 뒀다면 그마저도 또 없는 겁니다. 그러니 캄캄하고 그래서 결국은 개집이나 뭐, 새 둥우리나 무슨 족제비 소굴이나 돼지 소굴이나 소 외양간으로 뭐, 이런 데로 그냥 떨어지는 거죠. 또 자기가 마음이 착해서 참, 요행히 걸려서 간다면 그 사람이 어떤 차원을 가진 줄도 모르고 그냥 그런 데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건 십중팔구란 말입니다. 아니, 열 번에 한 사람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열 사람이라면 그 도리를 공부하지 못한 컴컴한 사람으로서는 사람 되기가 열 명 중에 두 명 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왜 우리에게 이득이 없느냐 하면, 인간에게도 이득이 없고 사회에도 이득이 없고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없고 세계적으로도 이익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알아, 세계를. 예전보다도요. 예전엔 그렇게 알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안방에 앉아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 알고 있는 자기가 벌써 계발이 된 겁니다, 본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식하기를, 예를 들어서 평상시에 ‘난 저게 좋다, 저게 좋다’ 이렇게는 그냥 우리가 보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잠재의식 속으로 가서 컴퓨터에, 자연 컴퓨터에 정해져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이 도리를 모르면 그렇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 박혀 있는 대로 길을 갈 것이고, 자기가 자유권을 갖고 자유자재한다면 그대로 자기 가고 싶은 대로 미리미리 그렇게 다 해서 자기가 한 찰나에 딸칵하면 그냥 옷만 벗는 거뿐이에요. 우리가 옷을 벗으려면 훌훌 그냥 벗죠. 그 순간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옮겨 놓는 거뿐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우리 공부 못 한 사람은 ‘길다, 짧다’ 이런 것이 있는데, ‘한 찰나다’ 이거야. 이쪽에서 한 찰나는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 저 집으로 들어가느냐의 문제, 즉 한 찰나는 한 찰난데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 저 집으로 들어가느냐야!

그러면 열 달이 걸리고 한 찰나가 걸리고 일 초가 걸리고 열흘이 걸렸다 또는 아홉 달이 걸렸다 이래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됐대도, 만약에 본래 이렇게 믿고 다니던 데에 아는 사람이 길잡이로 있다면 벌써 그것을 알게 돼 있어. 왜?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믿고 다녔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즉시 그것을 막아 줄 수 있는 거야, 즉시! 막아 줄 수도 있는가 하면 그것이 아홉 달이 됐다 하더라도 일 초로 축소한단 말이야, 이건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눈뜬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극히 어렵다. 하나 만나면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이 있는 것이죠.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그렇게 쉽습니까, 어디? 그러고도 또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 하나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고, 죽으면 뭐, 그냥….’ 그러는데 이런 물건으로다가 비유해 볼 때도 무쇠가 물건으로 나왔다가 망가지죠? 그러면 그거 시일이 많이 걸립니다. 무쇠 고물은 전부 한데 모아 놨다가 어느 회사에서 쓴다 하면 그게 쓰여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기간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공부를 하면 자유권을 가졌기 때문에 원소 자체가 무쇠가 아니죠, 금이니까. 항상 우리는 한 찰나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생산이 되려면 되고 그냥 금덩어리로 돼 있으려면 금덩어리로 돼 있고…. 금덩어리로 돼 있어도 아주 귀하게 있단 얘깁니다, 비유하자면. 그런데 무쇠는 쓰다가 아무리 저거 해도 무쇠 쪼가리로 그냥 어느 곳간에 가서 그냥 쟁여져 있죠. 그거하고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가 쓰던 반지라든가 목걸이라든가 또는 보석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쓰던 거라도 으레 보석함에다 넣어서 얼마나 중요하게 간직합니까? 그와 똑같은 겁니다.

그렇게 간직하고 있는가 하면, 무쇠는 무쇠 쪼가리로 그냥 나가 동그라져 있다가 그것이 인제 쓰여질 때, 어떠한 인연에 따라서 그것도 생산된단 말입니다. 생산이 되는데, 그것도 자기 차원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불 아궁이 뚜껑이 되느냐, 그래도 사람이 집안에서 소중하게 쓸 수 있는, 근기 있게 쓸 수 있는 그러한 물질이 될 수 있느냐? 또는 엔진이 될 수 있느냐? 이 보링 하는 데에도 그러한 문제로 딴 금속하고 섞여서 또 어떠한 물체가 되느냐? 이런 것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거기에 여러 가지로 섞이는 법도 있고, 무쇠는 무쇠대로 쓰이는 법도 있고 또는 우리 마음에 따라서 금이 될 수도 있고 은이 될 수도 있고 중석이 될 수도 있고, 이렇게 해서 씀씀이가 쓰이는 거죠. 보석이 된다면 더욱더, 지금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거죠. 지금 보석이 끼지 않고는 돌도 뚫지 못하고 또는 비행기도 움죽거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의 보석이 되라는 얘깁니다. 그럼으로써 어디에든지 쓰이게 되고, 또 보석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가져가려고 애를 쓰고, 크게 쓰이는 거기 때문에 누구든지 가져가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이건 잘못 갈 일이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보석이 땅바닥에 떨어졌어도 그것은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쓰이는 데에 가는 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꼭 이 공부는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의에서 구하면 절대로 그것은 세세생생에 해로운 것이 닥쳐온다는 얘깁니다. 왜냐? 그것이 습의 인과가 돼서 유전이 되거든요. 그러니깐 부모들 한번 잘못하는 까닭에,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하는 바람에 그만 자기가 씨를 뿌려 놓은 거까지도 그냥 몇 대손까지 내려가는 거죠, 뭐. 그러니 글쎄, 얼마나 그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그냥 그저 기도나 하러 다니고 이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식구가 다 금이 되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죠.

그런데 모두 우린 장사를 하기 땜에 못 오고, 바빠서 못 오고…, 그런단 말입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가게 문 잠가 놓고 왔다 갔는데도 하루 종일 파는 것보다 더 많이 팔았다고 합디다. 그러니까 마음먹기에 달렸지, 어째서 이 중요한…. 지금 제일 급한 게 뭐냐 하면 이 공부하는 게 제일 인간으로선 급하죠. 먹고사는 문제, 그것도 이차죠. 그렇다고 해서 굶고 벌지 말고 다니라는 건 아니거든요. 버는 거 벌면서도 쪼끔만 부지런하면 할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일상생활의 참선이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서 모른다면 죽어서 어떡할 겁니까? 그것도 우리가 설법을 해서 당겨 주니까 여러분이 ‘아!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미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에서 우리가 그렇게 그 길을 찾아가게끔 돼 있구나.’ 이런 걸 알기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설 수가 없는 거죠. 들어 보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은 그런 음식이 먹고 싶은 생각이 날 거는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해 보고 먹어 보고, 그래도 그러한 경험을 쌓고 맛을 보고 그랬기 때문에 ‘아! 그건 참 맛있더라. 그거 또 먹고 싶더라.’ 이런 생각이 나고 ‘아, 참! 그 천은 참 좋아.’ 이러기도 하고 ‘그 사람 참 좋기도 해.’ 또 ‘집을 요렇게 지으면 참 좋을 거야.’ 이러기도 하죠. 어떤 사람이 ‘어우, 우린 왜 이렇게 광대뼈가 나왔지? 이거 광대뼈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으면 출무상하고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없어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자기 죽을 때까지 기간이 바로 한 찰나의 기간밖엔 안 되는 겁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공부들을 하려고 애를 쓰고 눈을 까뒤집고 하지 않아도 공부한 분들이 여기 계시거든요. 그렇게 달라고 달라고 하고, 그렇게 남을 밀치고 그냥 막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오히려 쉽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이 마음 씀씀이에 얼마나….

그래서 내가 남의 일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실하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바로 나에게 주어지는 게 있는 거지, 그게 공덕이 돼서 주어지는 게 있지, 이것은 내가 갖겠다 하고 일을 하니까 항상 남도 이롭게 되지 않고 자기도 이롭게 되지 않습니다. 또 내가 저 좋은 일을 해야지, 요것을 ‘내가 줬지’ 하고 주면 요건 한계가 딱 붙어 있는 겁니다. 요 몇 원어치가 있어요, 몇 푼짜리. 그러면 몇 푼짜리를 생각하고 내가 요렇게 규정을 지어서 누구한테 좋은 일을 했다면 몇 푼짜리밖에 나한테 올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걸 무주상 보시로 했을 때는 이거보다 몇 곱쟁이가 올 수도 있는 거거든요.

이 도리를 여러분이 아셔서 이왕지사 우리가 욕심을 부리려면 욕심을 조그만 데다 두지 마세요. 어차피 욕심이 있걸랑은 그저 모르는 척하고 못난 척하고 그냥 아예 바닷물을 다 집어삼키는 겁니다. 쪼금 쪼금 뭐, 누구 주고 안 주고 간에 내가 다 집어삼킬 수가 있어야 남에게 마음대로 줄 수가 있죠. 이왕 도둑놈이 되려면 아예 그냥 우주 전체 대천세계를 몽땅 집어 자시지, 뭣 때문에 그 쪼끄만 거 도둑질을 해 가지고 붙잡혀 들어가서 10년 징역을 받고 20년 징역을 받고 평생 징역을 받습니까?

그럼 우리가 지금 인과응보를 받고 유전에 의해서 그렇게 고통을 받고 이러는 게 창살 없는 감옥이지 그게 감옥이 아닙니까? 창살만 없다 뿐이지, 여러분이 지금 감옥이지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이 공부 한 사람만이, 해 가는 사람만이 바로 자유롭고 그럴 겁니다. 아무리 창살 안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건 자유로울 겁니다. 돈이 없이 산다 하더라도 풍부한 대장부의 살림살이일 거고 말입니다.

여기뿐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어느 생물이 사는 데도 다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그마한 것으로부터 이렇게 인간까지 진화될 수 있고 창조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까지, 여기까지 올라올 수가 없는 거죠. 고정되게 있다면 그건 진리가 지속될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 사람은 사람대로 어디까지나 고집을 부리지 말라. 이게 어떠한 모자라는 일이라도, ‘아하, 저 사람은 참 몰라.’ 이러더라도, 또 ‘저 사람은 참 대인이야.’ 그러더라도 대인은 대인대로 넣고 소인은 소인대로 넣어라 이거야. ‘소인이다’ 하고 꼬집어서 업신여기지 말고 ‘대인이다’ 하고선 아주 높다랗게 보지도 말고 오직 나로만 봐라 이거야, 나! 얕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나한테 낱낱이 안으로 굴려라 이거야. 안으로 돌려! 내 마음 안으로 돌리기만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지금 농담으로 ‘왔다’죠.

그래서 전자의 부처님들도요, “책도 보지 마라. 앉아서 좌선한다고 해서 그게 다 되는 게 아니고,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니 전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모두가 참선이니라. 그것을 납득하고 깨쳐라. 그 자고 깨고 모든 살림살이를 네 마음 안으로만 낱낱이 돌린다면, 어디서 구하겠느냐. 딴 데서 찾을 게 뭐가 있겠느냐.”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거기에서 생산이 되면 바로 또 자기가 자라서 맘대로, 그 도구를 지혜롭게 길러 가지고서 그 지혜를 도구 삼아서 마음대로 자기가 응용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됐을 때에 비로소 남을 이익하게도 할 수 있는 거죠.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육신으로부터 남의 육신이 둘이 아니거든. 선지의 중생이 있고 또 악인의 중생이 있거든.

그러니 중생이다 부처다 둘이 아니게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자유권을 가졌을 때, 우리는 마음대로 죽는 것도 아니고 본래 이 도리는, 처음에는 ‘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사는구나.’ 이랬지마는 나중에 그 도리를 알고 보면 ‘아, 내가 본래 살아나온 것이 아니기에 죽을 것도 없구나. 아! 옮겨 놓을 뿐이로구나. 모습을 바꿔 놓을 뿐이로구나. 어차피 그럴 거라면 모습을 이걸로 저걸로 바꿔 놓는다, 없앤다 이럴 필요도 없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내가 된다면 구태여 내 몸을 가지고서 화해서 또 나올 필요도 없는 거죠.

그래서 살아서 모두가 내가 될 줄 알고 앉아서 그이를 나로 만들 줄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미국에서 “병이 났으니, 지금 죽게 됐으니, 머리가 돌았으니 이거 좀 고쳐 주시오.” 하고 전화를 했어도 내가 갈 줄을 알아야 어떻게 하지. 만약에 육신으로 간다 하면 못 가잖아? 그럼 내가 천 개도 되고 만 개도 되고 때에 따라서 일거리가 없으면 두 개도 되고 한 개도 되고 이럴 줄 알아야 되죠.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바깥으로만 찾는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고 물을 떠 놓고 빌고 온통 야단들을 하는 사람들은 이름을 불러서 보이지 않는 신들을 꽉 그냥 불러 놓고선 내보낼 줄을 모르는 거야, 불러 놓기만 하고는. 그러니 망할 수밖에. 하하하. 자기가 앉을 틈도 없이 갖다가 모셔다 놓는 거야. 신장이니 지장이니 무슨 뭐니 다 불러서는. 그런데 그런 사람들 앞에 진짜 지장이 옵니까? 전부 가짜지. 자기가 가짜기 때문에 가짜만 오는 거야. 거리 중천에 떠다니던 신들도 ‘내가 바로 서산 대사다. 지장보살이다.’ 이러고 온다고. 그거에 속는다고, 다! 그러면 모습만 그렇게 그려 놓고선 자기가 그렇게 찾아봤던들, 그 안에 그냥 욱시글득시글하는 거야.

그러니 진짜가 아니고 가짜니 자기도 가짜요, 그것도 가짜라는 얘기야. 자기가 가짜니까 그것도 가짜지. 가짜가 득시글득시글하다 보니까 가짜 짓만 할 수밖에. 그러니 집안에 뭐가 좋아요? 온통 망하고, 무당 집에는 무당이 꼭 나고, 박수 집에는 박수가 꼭 나고 이렇게 유전이 되게끔 만들어. 이게 뭔 짓들이야, 글쎄? 아니, 사람이 그렇게 그냥 남의 꼭지에 매달려서 다녀야만 돼? 그래?

나는 만날 설법이라는 게 이런 것만 하니 글쎄, 이걸 어떡하면 좋우, 또? 허허허…. 아니 글쎄, 부처님이 좋은 말씀 해 놓으신 거를, 그거를 차곡차곡 그냥 넘겨 가면서 얘길 해 드렸으면 참 좋을 텐데 나는 그렇게 하기 싫단 말이야. 또 난 못나서 그걸 차곡차곡 이렇게 넘기면서 얘기 못 한다고. 내 말이라야 이렇게 그냥 순순히 나가지, 남의 말은 또 그냥 어줍어서 말도 못 해. 그리고 그거는 벌써 한 다리가 지나서, 어저께가 벌써 과건데 아니, 어저께 방편을 쓴 거를 오늘 말을 하면 되겠소?

그러니 여러분이 내가 못났더라도, 말을 잘 못하더라도, 순서 없이 하더라도 배운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해서 차곡차곡 들어 줘요. 그렇게 해서 낱낱이 듣는 대로 자기 그 마음으로 그냥 돌리란 말이에요. 잊어버리면 어떻고 안 잊어버리면 어떻겠소. 듣는 순간순간 그냥 자기 마음으로 드는데. 말한 거야 잊어버려도 상관없거든. 벌써 듣는 순간 주인 자기는 알고 있거든요. ‘이게 무슨 뜻에서 이 말을 하는구나.’ 하는 게 벌써 직감적으로 오기 때문에 그건 뭐, 멋들어지게 자기가 활용하는 데에, 체험하는 데에 쓸 수 있는 그런 말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걸 듣고 안 해 본 거라면 모든 걸 또 해 보게도 되거든요. 그러니 이 모든 것이 길잡이의 이치예요.

그래서 그 도리를 그전에 나도 무척 애를 쓰고 배운 거거든. 내가 항상 그러죠. ‘야! 너, 이게 길이 아니니라.’ 그러는 거야. 아, 신작로를 두고 길이 아니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거냐 말이야. 난 그렇게 애를 쓰고 배웠다고요. ‘길이 아니라. 길이 아니라. 그럼 길이 어떤 건가?’ 내 스승은 내가 찾았지마는 내 스승한테 내가 배우는데 또 그런 문제가 나오는 거예요. 야, 이건 길이 아니고 저 아주 삐죽한 산 너머, 풀이 그냥 뭐, 나무가 그냥 빽빽하게 들어선 거길 길이라는 거라, 응? 대번에 그걸 말을 해 주면 내가 모르니까 그렇게 빙그르르 돌려서 얘기한 거라고, 내가 나한테! 똑똑히 들으세요. 내가 나한테 말입니다. 여러분이 안으로 낱낱이 돌리면 거기에서 참자기가 바로 길잡이가 되는 겁니다.

아, 그래서 그냥 낭떠러지로 떨어졌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아하! 저기 길만 길이 아니라 아, 그렇지. 체가 없다면 길이 길이냐?’ 이거야. ‘그러니 내가 발이 없어야 없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거지, 내가 발이 있는데 있는 길로만 찾아다니지 어째 없는 길을 갈 수 있겠느냐.’ 이걸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그거 생각하는 데에 얼마나 걸린 줄 아십니까?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얼마나 피를 흘렸기에 그 도리를 그때서야 알았겠습니까? 참, 지금처럼 나 같은 못난이라도 좀 있어서 이루종차 좀 일러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일러 줘서 아는 거는 아니 되거든, 또. 그러니까 자기 스승을 자기가 찾아 가지고 자기가 바로 자기 스승한테 배워야 돼. 길을 인도받아야 돼.

그러니 우리가 설법을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설법을 해도 진실로써, 남의 말, 죽은 말 하는 게 아니라 진실되게 생활에 지침이 되고 공부하는 데 지침이 될 수 있는 설법을 하니깐 망정이지, 만약에 다른 걸로 돌렸다간 여러분에게 죄 이익이 없이 하고 나는 나대로 귀신이 되고,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귀신을 만들게 되는 이치죠.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어떻게 이날까지 공부를 해 나왔는가. 지금 여기 와서 어떻게 공부를 하고 계신가. 전자에는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고 계시고, 또 어떻게 하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상황 상황이 하나하나가 이렇게 이렇게 되더라.’ 하는 거를 여러분이 때로는 점검을 하셔야 됩니다. 잘못 나가도 자기 생각에는 그게 잘 나가는 걸로 생각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4월 21일 일반법회 법문 중 일부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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