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연락 끊고 일상이 가벼워졌다

입력
수정2020.03.14. 오후 3:10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토요판] 이런 홀로
부모와 자식 관계의 묘함

생애주기 따라 그냥 부모 되는
아주 보통의 사람들 대부분
화냈다 다정했다 울었다 웃었다
다면적인 부모에 대한 기억

한동안 연락 끊고 찾아온 평화
너무 힘들 땐 도망가도 괜찮아
너 없이도 엄마·아빠는 잘 살아
그간 부모님에 대해서 쓰려 할 때마다 주저했다. 엄마와의 따스한 기억을 회고하다 보면 우리 엄마가 세상에 다시없을 다정한 엄마처럼만 보인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나의 모습만 가진 사람이 없듯이 가족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게티이미지뱅크


“내가 좀 더 컸더라면 그 순간 오빠를 찢어발겨 버렸을 테니까.” 한 미국인 작가는 오빠에게 폭행을 당한 날 일기장에 이렇게 쓴다. 그리고 다음날 일기장에 자기 기억을 고쳐서 다시 쓴다. “오빠가 나를 때린 것은 나의 오해이고 만약 내가 멈추라고 했으면 오빠도 폭행을 멈췄을 것”이라고.

미국인 역사학자 타라 웨스트오버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는 모르몬교 아버지의 뜻에 따라 16년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자랐다. 뒤늦게 교육을 받아 박사 학위를 딴 뒤 자신의 성장기를 쓴 책 <배움의 발견>(2020)에서 타라의 가족에 대한 설명은 분열적이다. 기억 속에 부모와 오빠는 다정했다가, 광폭했다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가, 연민하기를 반복한다. 아버지는 7남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강제 노동을 시켰고, 어머니 역시 아들이 딸을 폭행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이렇게 쓰면 그의 가족이 악인처럼 보이지만 이 책은 부모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고발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타라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설교 말씀에 대해서 쓰다가도 아버지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어머니 역시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딸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따뜻하게 안아주고 먼 대학 기숙사까지 차를 태워 데려다준다. 아버지는 대학에 가겠다는 딸에게 “너는 주님의 은총을 저버리고 인간의 지식을 천박하게 탐한다”고 저주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함께 식탁에 앉아 팬케이크를 먹는다.

부모에 대해 긍정했다 부정하는 이러한 기록에는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다정했다가 가혹했다가를 반복하고 자기보다 약한 존재인 자식에게 함부로 대했다가 뒤돌아서 후회하고 서툴게 다가가는 사람들. 감정의 동물인 인간이 부모가 되면 일어나는 보통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에 대해 이랬다저랬다 하는, 타라의 분열적인 기록을 이해한다. 우리 부모도 그러했기에.

한 사람 두 얼굴, ‘부모’

그간 부모님에 대해서 쓰려 할 때마다 주저했다. 엄마와의 따스한 기억을 회고하다 보면 우리 엄마가 세상에 다시없을 다정한 엄마처럼만 보인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엄마가 나에게 퍼부었던 막말 때문에 내가 받았던 상처를 기록하고 나면 우리 엄마가 못된 계모처럼만 보인다. 물론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우리 부모는 자기를 이겨내지 못해 자녀에게 막말을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부모라는 책임을 다하려고 자기 삶 안에서 발버둥을 치며 성실하게 산 아주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날 아침 나는 엄마에게 문제집을 사게 만원만 달라고 했다. 우리 부모는 자녀에게 정해진 용돈을 주지 않았다. 돈을 주는 것이 권력이었기에 나는 엄마의 기분 상태에 따라 조심스럽게 물어야 했다. 하필 그날은 기분이 안 좋았는지 엄마는 버럭 “돈 맡겨놨냐? 장사도 안 되는데 맨날 돈타령”이라며 화를 냈다. 나는 눈물 바람으로 학교에 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엄마는 갑자기 오만원을 건네주며 반찬으로 불고기를 해주었다.

이것은 또다른 날의 기억. 아빠는 그날도 술을 마시고 새벽에 귀가했고, 늘 그랬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딸년들이 지 애미 닮아서 애비를 무시한다”며 주정을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화를 내다가 아빠에게 뺨을 맞았다. 다음날 아침, 아빠는 일찍 일어나 여느 때처럼 도시락을 싸주고 나를 깨워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아빠는 매일 아침 나와 동생을 등굣길에 태워주었다. “왜 나를 무시하냐”며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우리 아빠였고, 아침마다 학교까지 차로 배웅을 하는 것도 우리 아빠였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만 보면 우리 부모가 무슨 조울증 환자 같지만 나는 많은 부모와 자식 관계가 그렇다고 믿는다. 일일드라마에 나오는 화목한 가족은 극소수다. 세상에는 “이런 부모가 되어야지” 계획하고 자식을 낳는 사람보다 “낳으면 다 크게 돼 있다”며 그냥 부모가 되는 사람이 더 많다. 남들이 하니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게 당연하니까 낳고 키우고. 정상이라 불리는 생애주기에 따라 부모가 되는 보통의 성인이 대다수다. 그들에게는 부모라는 역할 외에도 사회에서 역임해야 할 일이 있고 삶은 모두에게 고행이다.

그냥 부모가 된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들어 감정이 불안정해질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약한 존재인 자식에게 울분을 토하기도 한다. 만만하니까, 그럴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 부모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를 달랬다. 우리 부모와 나는 잘 맞지 않는 톱니바퀴야. 그래서 이렇게 삐걱대는 거야. 다행히 20대에 독립을 했고 따로 살면서 관계가 조금은 개선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엄마와 연락을 끊었다

지난 한달 동안 엄마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엄마와 일주일에 한번 정도 통화를 하는데,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가 하필 엄마의 기분이 저조했을 때였다. 장사는 되지 않고, 아빠 병원비는 밀려 있고, 가계 빚은 쌓여 있는데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아 고된 매일. 아침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홀로 장사를 하며 가정을 지탱하는 엄마는 자주 ‘무슨 팔자가 이러냐.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냐’며 한탄을 한다.

나라도 엄마와 같은 상황이면 우울증이 올 것 같지만 슬프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날도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에 손님은 없고, 아빠 병원비는 밀려 있던 차, 저 혼자 희희낙락 잘 사는 얄미운 딸이 전화를 한 것이다. 엄마는 갑자기 “니가 이기적이니까 동생들도 괴롭다”며 나쁜 사람 취급을 하며 나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동생들이 하지도 않은 말로 자매를 이간질하며 나를 ‘악역’으로 만든 것이다.

고된 삶의 이유를 어디서라도 찾고 싶은 사람은 남 탓 하는 게 습관이다. 엄마에게 그날 탓할 악당은 ‘나’였는데 더는 엄마의 억지를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왜 있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라며 전화를 끊고 소리 내 엉엉 울었다. 부모 눈치 볼 필요 없이 혼자 사는 내 집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우는 나. 엄마와 함께 살던 10대 때에는 억울하면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인 채 울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도망쳐왔는데, 다시 그때로? 나는 엄마와 연락을 끊었다. 엄마의 문자 첫 문장에는 욕설이 가득했다. 나는 흐린 눈으로 문자를 지웠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자 놀랍게도 삶에 평화가 찾아왔다. 듣기 싫은 말, 상처가 되는 말,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하는 부모의 억지에서 나를 분리시키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한결 가벼워졌다.

도망가도 괜찮아

부모는 나에 대해 반만 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는 ‘반’으로 나를 충분히 조종할 수 있다. 엄마랑 싸우면 죄책감이 일었다. ‘엄마가 저렇게 힘든데, 엄마 혼자 벌어서 대학 교육까지 시켜줬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이런 죄책감으로 싸움에서 져주곤 했다.

엄마와 화해를 했다. 물론 이번에도 먼저 전화를 걸고 집에 찾아가 엄마의 일을 도우며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은 나였다. 하지만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 엄마와 단절되어 있었던 그 한달의 평화 덕분에 알게 된 게 있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길러준 부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다. 나를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제 언제든 도망가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안함도 죄책감도 느낄 필요 없이, 도망가도 괜찮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네가 없어도 엄마, 아빠는 잘 살아. 그러니까 고통스러울 때, 언제든 도망가렴. 그래도 괜찮단다. 내 안의 작은 아이야.

늘그니

▶네이버에서 한겨레 구독하기
▶신문 구독신청▶삐딱한 뉴스 B딱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