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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일[나치]의 경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toco**** 조회수 3,161 작성일2008.08.03

독일 나치가 어떻게 10년만에 유럽최강국으로 부상할 수있었나요?

 

1차대전 이후 전범국가로 전락해서 마르크는 휴짓조각이 되었고

 

거리에서 거지들과 굶어죽은 시체들이 널려있었다고 하던데요..

 

2차대전때 V2로켓 수만발제작과 600만 독일군 수백척의 유보트..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된거죠? 그리고 지금도 세계3위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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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e****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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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택을 원해서 쓰는 글은 아닙니다. 그보다 잘못된 지식이 가지는 오류를 시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가지 점을 포함하겠습니다. 첫째는 히틀러의 시대의 경제를 둘째는 질문자에 대한 답변입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는 분명 답변하신 분의 반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난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임을 전제드립니다.

 

제2차세계대전 전후 '보하르트 논쟁'이라고 해서 당시 히틀러정권의 경제적 성과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경제학계나 사학계에서는 어느정도 이야기가 정리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이와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교수님은 서울대학교에서 경제사(바이마르정권)를 가르치는 교수님입니다. 관련 논문이 많으신 편이니 혹여 관심이 있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맹점중에 하나는 경기적 변동이 있으며, 경기고점 뒤에는 후퇴기와 침체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부터 시작한 세계대공황은 당시 전후 경기회복과정에 있던 바이마르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독일의 국민총생산이나 1인당 국민소득 모두 이전에 비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독일경제상황이 결코 바이마르 정권에서 나타난 경제정책의 오류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외생적충격이라고 말하는 대공황 즉, 미국이라는 가장 큰 수출시장(독일에게)의 경직에서 나타난 충격입니다.

 

  <제시글>

* 대량실업 상태

* 산업의 침체

* 많은 손실을 입히는 노조의 파업행동

* 민간 투자가 1/6로 감소

* 농산물 가격의 붕괴

* 도산한 회사들의 수가 증가함

* 총 소득이 절반으로 감소

*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광물자원이 풍부한 땅을 몰수당하고, 50년이 걸려도 지불 할 수 없을만큼 증가하는 채무상환을 강요당함.

 

독일이 1930년대 초반에 가진 일련의 사태들은 분명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외환위기에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전쟁배상금이라고 불리는 채무상환금액은 최초 베르사유조약에서 나타난 배상액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독일에게 가장 관대한 채권국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채권자의 권리들을 많이 제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서도 채권국의 위치에 있었음) 미국의 노력덕분에 사실 독일의 전쟁배상금은 큰 폭으로 감소되었으며 바이마르 정권이 경제적 안정기반(대공황이전을 말함)을 자리잡아가면서 채무상환능력이 크게 제고됩니다.

 

좌우지간 히틀러정권등장무렵 독일경제상태가 매우 안좋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상태가 바이마르 정권의 경제정책의 오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견조하지 못한 대외경제환경의 변화로부터 외생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이히스 뱅크(독일 중앙은행)의 인베스트먼트 홀딩스의 가치를 올려, 결과적으로 통화공급을 지나치게 증가시키는 것을 피할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했다." - Hjalmar Schacht 박사, 히틀러의 재무장관

 

독일은 2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최초 경제개발계획을 책임졌던 실무자가 샤흐트 경제장관입니다. 당시 고전경제학의 핵심은 총공급커브를 움직임으로써 경제적 균형을 달성하고자 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가격이 신축적이라는 가정하에 사물을 바라보기때문입니다. 그러나 히틀러정권은 총수요커브를 움직이는 정책-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해 경기침체를 탈피하고자 했습니다.(이는 케인즈의 관점과 유사하지만 히틀러정권에서 일부러 그러한 정책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 이와관련된 사항은 추후다시 논하겠습니다. -

 

히틀러가 집권한 첫해 말에는 실업자들의 수가 6백만 명에서 3백 37만 4천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나머지 전 세계가 심한 경제적인 침체기인 경제 대공황을 겪는 동안에, 전례없는 2백 62만 7천 여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 되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 많은 실업자가 감소하였는데...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2가지 효과를 통해 얻어낸 결과입니다. 첫째는 이전 정권이었던 바이마르 정권의 경제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였기때문입니다. 이른바 정책시차가 발생한 것입니다. 둘째는 독일경제개선과정에서 히틀러정권은 재군비선언을 하게되는데, 재군비선언은 과거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현재 실업률통계에서 나타나는 맹점이기도 하지만 독일은 새로운 사단급 부대를 창설하면서 젊은 층을 군대로 흡수하게 되었고 이렇게 흡수된 군인들은 실업률통계에서 제외되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실업률은 당연히 낮아지게 됩니다.

또한 독일은 노동을 신성시하여 많은 정책사업들을 노동집약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우토반 건설인데 아우토반 건설을 자본집약적인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노동집약적인 사업으로 추진함으로써 상대적 비효율성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만 거시적인 펀더멘탈은 개선되는 효과를 나타나게 됩니다.

 

MEFO 채권은 라이히스뱅크(제국은행)에 제시하면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Schacht는 채권을 단기로 만들어 채권을 살 사람이 많도록 했다. 4%의 이자율을 지불했고, 이 수치는 당시 기준으로 괜찮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채권을 기꺼이 구입했고, 히틀러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일자리를 만들 수억마르크를 갖게 되었다. 이후 4년 동안 국민들은 120마르크 상당의 MEFO 채권을 구입했다.

 

독일이 정부의 빈약한 재정을 보완하고자 발행한 것이 메포채권인데 일반적인 국채가 장기채로 발행되는데 반하여 독일정부는 단기채로 발행하게 됩니다. 이자율이론에 따르면 단기채의 높은 이자율은 금리의 역전현상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는 현재의 정부신용이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단지 정부가 대 국민들에게 발행하는 국채의 신뢰성을 제고하는 목적이었다면 독일 중앙은행은 롤오버를 통해서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을텐데 제가볼때 이러한 정책에 대한 부담은 당해정권이 가지는 부담을 후손들에게 전가시키는 결과에 불과합니다. 즉, 현시점에서 상환의 위험은 덜하지만 정부의 조세수입을 통해 채권상환을 이루기때문에 이러한 조세부담은 후손들에게 전가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문제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 퍼퓰리즘의 행태일 뿐입니다. 

 

건전한 경제 계획

일자리 창출이 진행되면서, 정부의 수입도 몇가지 요인에 의해 같이 증가했다.

* 많은 실업자와 극빈자가 더이상 국가 기금 지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 새롭게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이 이제 자기 임금에서 세금을 냈다.

* 신용이 증가됨으로 인해 사기업이 과감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새 직원을 고용했다.

 

 

독일의 경제정책이 건전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히틀러정권의 경제정책은 매우 긴장도가 높은 재정정책을 펼쳤으며 우리가 이른바 구축효과라고 불리우는 이자율상승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히틀러정권이 강력한 통제를 통해서 이러한 압력을 누르고 있기는 했지만 이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기간동안에만 가능한 것이었고 이러한 일이 터진다면 이는 더 큰 침체를 가져오게 만들 수 있었던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나친 군비에 대한 재정지출은 민간영역을 위축시킨 것이 사실이며 지나친 군비정책으로 인한 원자재수요의 증대는 외환이 국외로 빠져나가는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나치정권은 철저한 외환통제정책을 어쩔 수 없이 펼치게 되는데 이는 독일 중앙은행의 수차례위기를 가져왔습니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하여 산업을 부활시키는 것에 기초를 둔 것이다. 10억을 투자한 것은 이후에 세금수입으로 손쉽게 국가로 회수될 것이었다. 독일은 곧 그 결과를 보게 되었으며, 그의 지도력에 대한 모든 반대는 경제적 기적 앞에서 녹아 사라져 버렸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또는 아우토반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들이 착수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정용 차량인 폭스바겐 또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혁신되었다.

 

  독일 공공사업의 2개 큰 축은 아우토반의 건설과 폴스바겐공장의 건설이었습니다. 채권을 통해서든 노동력동원을 통해서든 양 사업 모두는 국민들을 위한 정책은 아니었습니다. 폴스바겐공장 건설을 통한 국민차를 제공한다는 취지와는 달리 독일 국민들에게 차가 시판된 것은 아니었으며 공장에서 생산된 많은 차량들은 군수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아우토반역시 히틀러 정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접 이탈리아가 추진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고속화도로 계획을 도입한 것이며...아우토반 건설역시 히틀러정권 이전인 바이마르정권때부터 추진된 사업이었습니다. 단지 히틀러가 이를 선전용으로 잘 활용되었을뿐입니다. 실제 아우토반에 동원된 노동력통계를 보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큰 폭으로 감소되었고( 그 이유는 군수산업가동을 위해 노동력전환) 실제완공된 도로도 얼마되지 않는 길이였습니다.

 

 

두번째에 대한 답변으로 독일경제성장에 대해 이야기드리겠습니다. 군비투자를 통한 정부의 재정지출증대는 소득증대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비투자가 민간투자와는 달리 파급효과가 그리 크지 않기때문에 그리고 군수품 자체가 수출상품이 아니기때문에 독일 경제는 최초 성장하였으나 2차 경제계획이후에는 독일 경제가 가진 잠재성장능력은 한계에 도달하였습니다. 민간기업에 대한 투자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지나친 중앙정부의 통제는 기업의 효율성을 저해시켰으며 당시 미국에서 만연되었던 포터시스템도 독일 기업에게는 적용되지 못했습니다. 즉, 독일 기업들은 생산효율성의 증대라는 인센티브도 없이 비효율적인 생산공정을 유지하게 되었고 이는 전시독일경제에 큰 제약요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군대에서 민간영역을 통제함으로써 나타난 지나친 간섭과 각 군별로 할당되는 제품요소들은 독일 기업들에게 어떠한 결정권도 주지 못함으로써 대량생산보다 비효율적 기술만능주위에 빠지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빠른 경제성장과정(60-70년대초) 그리고 압도적인 군비우위에서 나타나듯이 독일경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며 수많은 군인과 차량을 생산해내기는 하였지만 독일의 성장률은 전쟁초기에 가까워질수록 낮아졌습니다. 현재의 독일경제와 나치정권의 경제정책을 연계시키는 것은 잘 맞지 않습니다. 나치정권의 경제정책과 전후 독일경제의 경제정책은 큰 차이를 가집니다. 적어도 성실과 근면이라는 인적요소의 공통점은 같을지라도 과연 국가의 부를 누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나누어주며 후손들에게 어떠한 이점을 유산으로 주는가라는 관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나치정권당시 그 많은 생산성들은 이전 정권에서 실질국민총생산이 잠재생산성 미만으로 떨어짐으로 나타나느 기저효과에 불과하여 그 생산성 그 자체도 비효율적으로 사용되었기때문에 더 많은 군대와 더 많은 차량을 가지고 있었을지언정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듦에따라 그 한계성에 노출되게 됩니다.

200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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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1차대전의 패전으로

 

기아와 혼돈과

패전으로 인한 자괴감과

사회적 불만 팽배를 비롯해,

 

백주 대낮에

좌익공산당과 우익정치단체간의

총격전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광기의 시대를 맞습니다

 

히틀러하면

통상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이고

유태인 학살등이 잔학행위의 대명사이지만

 

30년대 그가 집권했을 당시엔

히틀러와 나치는 유럽 각국의 긍정적 정치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패전으로 인한

과중한 전쟁 배상금 지불을 중지시키고,

 

아우토반등 고속도로망의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 건설을 활발히 진행시키는 한편,

 

매일같이 길거리와 광장에 메아리치던

정치단체들을 탄압또는 해체해

 

비능률과 사회적 혼돈을

일당독재로 안정적 획일화 시킴니다

 

"쌀이 공산주의다"라는 구호처럼

히틀러는 패전으로 궁핍한

독일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당시 6,000만 독일인들의 강력한 지도자로 서게되죠....

 

실제로 프랑스,영국뿐 아니라

유럽 여러나라에 나치를 모방한 정당들이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나름대로의 업적을

편협한 사고력과

정치적 술수 그리고 위험한 모험으로

2차대전이란 파멸의 낭떠러지로 독일을 몰아넣었다는 점이죠....

 

흥미로운건 통상 권력자들이

화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즐기는것과는 달리

히틀러는 거의 수도승과 같은 청빈한 생활을 즐겼고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출신임에도

독일 제 16 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자원 입대해

 

1차 대전에 참전해

3차례나 부상을 입으며

유태인 중대장이 적극 추서한

사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급 철십자훈장받게되는데

평생 그 훈장만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편집적인 정신병적 광기로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 국제관계를 모색했다면

오늘날 그에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졌을겁니다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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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로서의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의 3년동안, 국민총소득은 230억 마르크에서 110억 마르크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1932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178 마르크에서 627 마르크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취임했을 때 독일 국민의 90%가 빈민층이었다. - Leon Degrelle 장군

 

 

가치가 없는 독일 화폐

 

아돌프 히틀러가 파산상태의 국가를 인수하다.

 

히틀러가 1933년 취임했을 때, 독일은 가장 어두운 미래를 가진 유럽국가였는데, 아마도 세상의 어느나라도 독일보다 전망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은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기술적으로 파산한 나라였다. 그 이유는 많았고 또 다양했다.

 

* 대량실업 상태

* 산업의 침체

* 많은 손실을 입히는 노조의 파업행동

* 민간 투자가 1/6로 감소

* 농산물 가격의 붕괴

* 도산한 회사들의 수가 증가함

* 총 소득이 절반으로 감소

* 독일국민의 90%가 처참할 정도의 상황에 처함

*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광물자원이 풍부한 땅을 몰수당하고, 50년이 걸려도 지불 할 수 없을만큼 증가하는 채무상환을 강요당함.

* 소련의 자금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빈번한 파업행동이 무산되었지만 격렬한 쿠데타를 일으킴

 

독일통화가치를 설명하는 인플레이션 만화

 

아돌프 히틀러는 완전히 파산된 경제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독일 수상으로 취임하자마자 아돌프 히틀러는 가능한 빨리, 그리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경제파탄과 실업 및 범죄가 결합된 문제들을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는 라이히스 뱅크(독일 중앙은행) 총재 Hans Luther 박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Luther는 검소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남아있는 국가 자금 총액이 1억 5천만 마르크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도움이나 조언을 제공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Luther가 그 일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당 기관지 'Volkisher Beobachter(민족의 감시자)'를 경제적 파산으로부터 견조한 수익을 올리도록 만든 히틀러는 경제에 대해 예민하고 분별있는 능력을 발전시켜, 독일 경제에 대해 손댈 수 있는 것과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에 그는 Hjalmar Schacht 박사를 호출하여, 그에게 같은 요청을 했다. 영리한 그 두사람은 그렇게 만났으며, 그로 인해 'Mefo Bonds'라고 하는 역사적인 계획이 들어진 것이다.

 

 

"라이히스 뱅크(독일 중앙은행)의 인베스트먼트 홀딩스의 가치를 올려, 결과적으로 통화공급을 지나치게 증가시키는 것을 피할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했다." - Hjalmar Schacht 박사, 히틀러의 재무장관

 

 

수 천명의 실업자들이 베를린 거리를 행진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첫해 말에는 실업자들의 수가 6백만 명에서 3백 37만 4천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나머지 전 세계가 심한 경제적인 침체기인 경제 대공황을 겪는 동안에, 전례없는 2백 62만 7천 여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 되었다.

 

 

MEFO 채권은 라이히스뱅크(제국은행)에 제시하면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Schacht는 채권을 단기로 만들어 채권을 살 사람이 많도록 했다. 4%의 이자율을 지불했고, 이 수치는 당시 기준으로 괜찮은 것이었다. 어쨌든 양탄자 아래 숨겨둔 지폐는 이자가 없으니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채권을 기꺼이 구입했고, 히틀러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일자리를 만들 수억마르크를 갖게 되었다. 이후 4년 동안 국민들은 120마르크 상당의 MEFO 채권을 구입했다.

 

 

MEFO 채권

 

 

"국가는 경제시스템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경제시스템은 자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자본은 경제시스템의 머슴이고, 또 경제시스템은 국민의 머슴이다." - Adolf Hitler, 첫번째 독일국회 연설

 

 

Hjalmar Schacht 독일 재무 장관


건전한 경제 계획

 

일자리 창출이 진행되면서, 정부의 수입도 몇가지 요인에 의해 같이 증가했다.

* 많은 실업자와 극빈자가 더이상 국가 기금 지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 새롭게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이 이제 자기 임금에서 세금을 냈다.

* 신용이 증가됨으로 인해 사기업이 과감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새 직원을 고용했다.

 

"히틀러가 내 도움을 구걸하려고 낮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그를 돕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방법, 다른 수단을 찾았을 겁니다. 그는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 Hjalmar Schacht,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농장에서 노동자들과 만나 여론을 듣는 히틀러

 

"그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또 서로에게 존경받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지식인은 노동자를 존중해야 하며, 노동자도 지식인을 존중해야 한다. 누구도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Adolf Hitler, 1924년

 

 

노동은 고귀한 것이다.

 

독일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아돌프에 의해서 크게 향상되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공장과 농장을 순회했고, 그들의 여론을 직접 듣기 위해서 노동자들 및 서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런 경호원도 없이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럼에도 예기치 않은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그를 우상처럼 받들었다.

 

 

"1932년, 나치즘이 세력을 얻기 전에, 독일의 국민소득은 452억 라이히스마르크였으며.... 1937년에는 대량 680억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득에서의 증가에 대조적으로 반하여 일반적인 생활비 지수는 사실상 변하지 않고 있었다. 바꿔말하면, 국민소득이 거의 50% 증가하는 동안에 일반적인 생활비는 4%밖에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 Adolf Hitler

 

 

"편견을 제쳐두고, 약 5년만에 독일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경제적 부흥의 명백한 증거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방문자는 전에는 황폐되어 폐업상태에 있었으나 이제는 다시 문을 열고 새로 정비되어 정상적인 환경속에서 가동하고 있는 공장들을 보았다. 그는 취업노동자의 집단이 수십만명으로 증가했음을 알게되고, 무엇보다도 화물적재용 계단이 상품들과 함께 높이 쌓여 있음을 발견하고 또 네바퀴 또는 여섯바퀴가 달린 트레일러를 뒤에 단 수많은 화물수송차량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채 서있게 된다. 5년전에는 불경기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모든 징후와 전조들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업들이 다시 재생하고 있다는 순조로운 표시로 대체되었다. - Cesare Santoro

 

 

American Manifest Destiny

"이런 재정적이고 산업적인 놀라움은 외국채 없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기적에 관해서, 처칠은 찬사를 했다: "이러한 공적에 대해서 어떤 이외의 것이 고려되어질지 몰라도, 그것(공적)들은 확실히 전세계의 역사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 중 하나이다." - 

American Manifest Destiny(미국인들의 명백한 운명) Conrad Grieb(작가 이름). Examiner Books. N.Y.(출판사 이름) 

 

 

Sir Arnold Wilson, M.P

"독일의 보건 통계자료는 만족스럽습니다. 유아 사망률은 크게 감소되고 있으며 영국과 비교해서도 상당히 낮습니다. 결핵과 다른 질병들은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형사법원은 그렇게 할일이 적은 적이 없었고, 교도소는 그렇게 적은 수감자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독일 젊은이의 체능을 관찰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이전의 그 경우보다는 더 나은 옷을 입을지라도, 그들의 쾌활한 얼굴은 그들 내부에서 만들어진 심리적 개선을 증명합니다. 독일의 경제적인 환경(조건)과 재정비에 의해 행사된 영향으로 생성된 추상적인 개념은 견실하게 진행중입니다.  실업률도 크게 감소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체험이 언제나 핵심요소였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하여 산업을 부활시키는 것에 기초를 둔 것이다. 10억을 투자한 것은 이후에 세금수입으로 손쉽게 국가로 회수될 것이었다. 독일은 곧 그 결과를 보게 되었으며, 그의 지도력에 대한 모든 반대는 경제적 기적 앞에서 녹아 사라져 버렸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또는 아우토반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들이 착수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정용 차량인 폭스바겐 또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혁신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발명한 것을 기념하는 독일 우표

 

 

5년 후

 

5년동안의 국가 사회주의 산업 및 경제활동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종이 제조 50% 증가

* 디젤유 제조 66% 증가

* 석탄 생산량 68% 증가

* 연료용 유류 생산량 80% 증가

* 광유(석유) 생산량 90% 증가

* 인조견사 생산량 100% 증가

* 등유 생산량 110% 증가

* 철강 생산량 167% 증가

* 윤활유 생산량 190% 증가

 

히틀러가 폭스바겐의 모형을 생각해내서 실현에 옮기다.

  

"독일경제의 구제는 오직 독일국민의 노력과 그들이 습득한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해외의 국가들이 여기에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황금과 외국자본 없이도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금에 짓눌려있는 일부 다른나라들이 그들의 통화가치를 저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반면, 독일 마르크화의 배경에는 독일의 노동력이 버티고 서 있었다. 1938년 5월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지금 수백만명의 실업상태가 야기하고 있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에서 우리는 노동인력이 충분치 않다는 것 때문에 걱정하기 시작하고 있다." - Adolf Hitler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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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afe.naver.com/nazzis/2960 - 왜곡되거나 날조, 승전국에 의해 파묻힌 역사를 바로 알리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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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로서의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의 3년동안, 국민총소득은 230억 마르크에서 110억 마르크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1932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178 마르크에서 627 마르크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취임했을 때 독일 국민의 90%가 빈민층이었다. - Leon Degrelle

 

 

가치가 없는 독일 화폐

 

아돌프 히틀러가 파산상태의 국가를 인수하다.

 

히틀러가 1933년 취임했을 때, 독일은 가장 어두운 미래를 가진 유럽국가였는데, 아마도 세상의 어느나라도 독일보다 전망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은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기술적으로 파산한 나라였다. 그 이유는 많았고 또 다양했다.

 

* 대량실업 상태

* 산업의 침체

* 많은 손실을 입히는 노조의 파업행동

* 민간 투자가 1/6로 감소

* 농산물 가격의 붕괴

* 도산한 회사들의 수가 증가함

* 총 소득이 절반으로 감소

* 독일국민의 90%가 처참할 정도의 상황에 처함

*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광물자원이 풍부한 땅을 몰수당하고, 50년이 걸려도 지불 할 수 없을만큼 증가하는 채무상환을 강요당함.

* 소련의 자금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빈번한 파업행동이 무산되었지만 격렬한 쿠데타를 일으킴

 

독일통화가치를 설명하는 인플레이션 만화

 

아돌프 히틀러는 완전히 파산된 경제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독일 수상으로 취임하자마자 아돌프 히틀러는 가능한 빨리, 그리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경제파탄과 실업 및 범죄가 결합된 문제들을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는 라이히스 뱅크(독일 중앙은행) 총재 Hans Luther 박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Luther는 검소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남아있는 국가 자금 총액이 1억 5천만 마르크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도움이나 조언을 제공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Luther가 그 일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당 기관지 'Volkisher Beobachter(민족의 감시자)'를 경적 파산으로부터 견조한 수익을 올리도록 만든 히틀러는 경제에 대해 예민하고 분별있는 능력을 발전시켜, 독일 경제에 대해 손댈 수 있는 것과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에 그는 Hjalmar Schacht 박사를 호출하여, 그에게 같은 요청을 했다. 영리한 그 두사람은 그렇게 만났으며, 그로 인해 'Mefo Bonds'라고 하는 역사적인 계획이 들어진 것이다.

 

 

"라이히스 뱅크(독일 중앙은행)의 인베스트먼트 홀딩스의 가치를 올려, 결과적으로 통화공급을 지나치게 증가시키는 것을 피할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했다." - Hjalmar Schacht 박사, 히틀러의 재무장관

 

 

수 천명의 실업자들이 베를린 거리를 행진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첫해 말에는 실업자들의 수가 6백만 명에서 3백 37만 4천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나머지 전 세계가 심한 경제적인 침체기인 경제 대공황을 겪는 동안에, 전례없는 2백 62만 7천 여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 되었다.

 

 

MEFO 채권은 라이히스뱅크(제국은행)에 제시하면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Schacht는 채권을 단기로 만들어 채권을 살 사람이 많도록 했다. 4%의 이자율을 지불했고, 이 수치는 당시 기준으로 괜찮은 것이었다. 어쨌든 양탄자 아래 숨겨둔 지폐는 이자가 없으니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채권을 기꺼이 구입했고, 히틀러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일자리를 만들 수억마르크를 갖게 되었다. 이후 4년 동안 국민들은 120마르크 상당의 MEFO 채권을 구입했다.

 

 

MEFO 채권

 

 

"국가는 경제시스템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경제시스템은 자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자본은 경제시스템의 머슴이고, 또 경제시스템은 국민의 머슴이다." - Adolf Hitler, 첫번째 독일국회 연설

 

 

Hjalmar Schacht 독일 재무 장관


건전한 경제 계획

 

일자리 창출이 진행되면서, 정부의 수입도 몇가지 요인에 의해 같이 증가했다.

* 많은 실업자와 극빈자가 더이상 국가 기금 지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 새롭게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이 이제 자기 임금에서 세금을 냈다.

* 신용이 증가됨으로 인해 사기업이 과감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새 직원을 고용했다.

 

"히틀러가 내 도움을 구걸하려고 낮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그를 돕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방법, 다른 수단을 찾았을 겁니다. 그는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 Hjalmar Schacht,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농장에서 노동자들과 만나 여론을 듣는 히틀러

 

"그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또 서로에게 존경받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지식인은 노동자를 존중해야 하며, 노동자도 지식인을 존중해야 한다. 누구도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Adolf Hitler, 1924년

 

 

노동은 고귀한 것이다.

 

독일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아돌프에 의해서 크게 향상되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공장과 농장을 순회했고, 그들의 여론을 직접 듣기 위해서 노동자들 및 서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런 경호원도 없이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럼에도 예기치 않은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그를 우상처럼 받들었다.

 

 

"1932년, 나치즘이 세력을 얻기 전에, 독일의 국민소득은 452억 라이히스마르크였으며.... 1937년에는 대량 680억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득에서의 증가에 대조적으로 반하여 일반적인 생활비 지수는 사실상 변하지 않고 있었다. 바꿔말하면, 국민소득이 거의 50% 증가하는 동안에 일반적인 생활비는 4%밖에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 Adolf Hitler

 

 

"편견을 제쳐두고, 약 5년만에 독일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경제적 부흥의 명백한 증거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방문자는 전에는 황폐되어 폐업상태에 있었으나 이제는 다시 문을 열고 새로 정비되어 정상적인 환경속에서 가동하고 있는 공장들을 보았다. 그는 취업노동자의 집단이 수십만명으로 증가했음을 알게되고, 무엇보다도 화물적재용 계단이 상품들과 함께 높이 쌓여 있음을 발견하고 또 네바퀴 또는 여섯바퀴가 달린 트레일러를 뒤에 단 수많은 화물수송차량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채 서있게 된다. 5년전에는 불경기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모든 징후와 전조들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업들이 다시 재생하고 있다는 순조로운 표시로 대체되었다. - Cesare Santoro

 

 

American Manifest Destiny

"이런 재정적이고 산업적인 놀라움은 외국채 없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기적에 관해서, 처칠은 찬사를 했다: "이러한 공적에 대해서 어떤 이외의 것이 고려되어질지 몰라도, 그것(공적)들은 확실히 전세계의 역사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 중 하나이다." - 

American Manifest Destiny(미국인들의 명백한 운명) Conrad Grieb(작가 이름). Examiner Books. N.Y.(출판사 이름) 

 

 

Sir Arnold Wilson, M.P

"독일의 보건 통계자료는 만족스럽습니다. 유아 사망률은 크게 감소되고 있으며 영국과 비교해서도 상당히 낮습니다. 결핵과 다른 질병들은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형사법원은 그렇게 할일이 적은 적이 없었고, 교도소는 그렇게 적은 수감자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독일 젊은이의 체능을 관찰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이전의 그 경우보다는 더 나은 옷을 입을지라도, 그들의 쾌활한 얼굴은 그들 내부에서 만들어진 심리적 개선을 증명합니다. 독일의 경제적인 환경(조건)과 재정비에 의해 행사된 영향으로 생성된 추상적인 개념은 견실하게 진행중입니다.  실업률도 크게 감소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체험이 언제나 핵심요소였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하여 산업을 부활시키는 것에 기초를 둔 것이다. 10억을 투자한 것은 이후에 세금수입으로 손쉽게 국가로 회수될 것이었다. 독일은 곧 그 결과를 보게 되었으며, 그의 지도력에 대한 모든 반대는 경제적 기적 앞에서 녹아 사라져 버렸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또는 아우토반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들이 착수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정용 차량인 폭스바겐 또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혁신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발명한 것을 기념하는 독일 우표

 

 

5년 후

5년동안의 국가 사회주의 산업 및 경제활동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종이 제조 50% 증가

* 디젤유 제조 66% 증가

* 석탄 생산량 68% 증가

* 연료용 유류 생산량 80% 증가

* 광유(석유) 생산량 90% 증가

* 인조견사 생산량 100% 증가

* 등유 생산량 110% 증가

* 철강 생산량 167% 증가

* 윤활유 생산량 190% 증가

 

히틀러가 폭스바겐의 모형을 생각해내서 실현에 옮기다.

 

"독일경제의 구제는 오직 독일국민의 노력과 그들이 습득한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해외의 국가들이 여기에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황금과 외국자본 없이도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금에 짓눌려있는 일부 다른나라들이 그들의 통화가치를 저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반면, 독일 마르크화의 배경에는 독일의 노동력이 버티고 서 있었다. 1938년 5월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지금 수백만명의 실업상태가 야기하고 있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에서 우리는 노동인력이 충분치 않다는 것 때문에 걱정하기 시작하고 있다." - Adolf Hitler

 

200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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