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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마다 돌아오는 장국영...불안한 청춘의 아이콘

조성준 기자
입력 : 
2019-11-01 06:01:01
수정 : 
2019-11-01 07: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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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36] 장국영 (배우, 1956~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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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슬리 청' 장국영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8)는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며 절망 속에서도 꿋꿋이 삶을 재건하는 여성이다. 스칼렛 오하라 연인으로 나오는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는 자유분방하고, 마초적인 기운을 풀풀 풍기는 선 굵은 남자다.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은 이 영화 덕분에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로 거듭난다. 훗날 영화는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적 시선 때문에 구설에 오르지만, 여전히 세기의 명작으로 추앙받는다.

장국영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유독 좋아했다. 그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배우는 '세기의 미녀' 비비안 리도 '할리우드의 왕' 클라크 게이블도 아니었다. 그는 극 중에서 비비안 리의 첫사랑 상대로 나오는 배우 레슬리 하워드에게 푹 빠졌다. 영화 속에서 레슬리 하워드는 클라크 게이블과 달리 부드러운 매너를 갖춘 신사다. 장국영은 자신의 영어식 이름을 레슬리 청이라고 정한다. 레슬리 하워드에서 따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두 번째 이름을 얻은 그는 정말로 바람처럼 20년 넘게 아시아를 훨훨 떠돌았다. 장국영이라는 바람은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기운을 머금고 팬들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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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을 스타 배우로 거듭나게 한 영화 '천녀유혼'(1987). /사진 출처=다음 영화
◆ 홍콩의 아이돌 스타

장국영은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재단사가 아니었다. 말런 브랜도, 앨프리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거물의 옷을 직접 만들 만큼 성공한 홍콩의 사업가였다. 장국영은 부유한 집안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행복한 추억은 거의 없는 유년을 보냈다.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이혼했다. 사업으로 바쁜 아버지는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장국영은 바로 위 형제와도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장국영은 부모와 제대로 교감할 기회가 없었다.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학교에도 제대로 적응 못했다.

13세에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영국에서 섬유를 공부한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타향살이에서 장국영은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미래를 본다. 그가 10대를 보낸 1970년대 영국은 어땠나. 그 시절 영국 대중문화는 이단아들의 놀이터였다. 그 중심엔 데이비드 보위가 있었다. 모든 경계를 허물며 세상에 없던 퍼포먼스를 보여준 데이비드 보위는 장국영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장국영은 훗날 데이비드 보위를 벤치마킹한 파격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영어 이름을 레슬리 청으로 정한 것도 영국 유학 시절 때다. 그는 주말이면 친척이 운영하는 바닷가 식당에 가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우울했던 소년은 영국에서 청량한 기운을 충전하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1977년 장국영은 그저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이유로 방송국 가요제에 참가했다. 덜컥 2위에 입상한다. 수려한 외모 덕분에 장국영은 곧바로 스타가 된다. 비슷한 시기 데뷔한 알란 탐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장국영은 가수로서 막대한 인기를 얻는다. 당시 홍콩 인기 가수들처럼 장국영도 연기에 도전한다. 꽤 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대부분은 장국영의 수려한 외모만을 부각하는 그저 그런 작품이었다. 전환점은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1986)이었다. 뒷골목 거친 남자들의 암투를 다룬 이 영화에서 장국영은 홀로 청초한 빛을 내뿜었다. 맑은 소년의 눈동자를 하고서도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장국영은 강한 남자들이 대세였던 홍콩 느와르의 새로운 캐릭터가 된다. '영웅본색'에 이어 '천녀유혼'(1987)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아시아 전역에서 장국영은 가수와 배우로서 오늘날 한류스타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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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1986)의 한 장면. /사진 출처=다음 영화
◆ 왕가위 감독을 만나다

현재 홍콩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중국의 범죄인 송환법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공권력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그럴수록 시위대 규모는 더 커졌다. 홍콩 내 반중 기류는 거세지고 있고, 중국은 굳건하게 찍어 누르고 있다. 몇몇 홍콩 스타들은 경력이 송두리째 흔들릴 위험을 감수하며 소신 행동을 했다. '영웅본색'에서 장국영과 함께했던 주윤발이 대표적이다. 그는 검은 옷과 복면을 착용하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몇 년 전 홍콩 '우산혁명'에서는 양조위, 유덕화 등 한때 장국영의 동료였던 배우들이 홍콩 시민을 응원했다. 그들은 모두 중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만약 장국영이 살아있었더라면 그 역시 동료들처럼 홍콩을 위해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장국영은 사회 문제에 관해 직설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스타였다. 그래서 종종 언론의 먹잇감이 됐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톈안먼 사태를 두고 중국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중화권 폭력조직의 영화계 진출에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장국영 팬과 알란탐 팬이 주먹 다툼 하다 한쪽이 사망한 것이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에게 책임을 묻고 연예계에서 떠나라고 촉구한다. 염증을 느낀 장국영은 1989년 은퇴를 선언하고 캐나다로 떠난다. 휴식은 짧았다. 장국영은 금세 복귀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가수보다는 배우에 전념했다. '청량한 젊음'의 아이콘이었던 장국영은 단번에 '불안한 청춘'의 대변자가 된다. 장국영이 아이돌 스타에서 진지한 배우로 거듭난 건 왕가위 감독을 만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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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1990)의 한 장면. 이 영화로 장국영은 불안한 청춘의 아이콘이 된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 '발 없는 새' 아비정전

왕가위 감독과 장국영의 첫 작품은 '아비정전'(1990)이었다. 이 영화는 장국영이 거울 앞에서 자신에게 도취된 채 맘보춤을 추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장국영이 맡은 캐릭터 아비는 삼류인생을 사는 청춘이다. 그는 쉽게 사랑을 한다. 그리고 쉽게 사랑을 버린다. 허무함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아비에게 희망 따위는 없다. 아비에겐 엄마가 두 명이다. 아비는 친모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그는 친모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 의붓어머니를 미워한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비는 결핍을 채우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끝내 마음까진 주진 않는다. 버려질 것을 두려워해 먼저 떠난다. 아비는 끝내 친모의 주소를 얻는다. 엄마가 있는 필리핀으로 향한다. 엄마의 집에 도착했지만, 가정부는 아비에게 집에 아무도 없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아비는 집 안의 창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느낀다. 아비는 성난 걸음으로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엄마의 집을 떠난다. '단 한번만이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싫다면 나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라는 슬픈 다짐을 하면서.

아비는 종종 자신을 '발 없는 새'에 비유한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올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발 없는 새처럼 어디에도 정착 못 하고 떠도는 아비는 음습한 분위기로 가득했던 홍콩을 대변했다. 당시 홍콩은 중국으로의 반환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두 엄마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비처럼 홍콩의 청춘들도 꿉꿉한 공기를 마시며 불안한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비정전' 이후 장국영은 왕가위 감독과 두 편의 영화를 더 찍는다. 그는 '동사서독'(1994)에서 버림받은 무사로, '해피투게더'(1997)에서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로 나온다. 두 영화에서 장국영이 맡은 역할은 아비처럼 고독하고, 나른하고, 방황하고, 상처투성이인 인간이다. 1980년대 청춘스타였던 장국영은 90년대 들어 외로운 사람들의 초상이 됐다. 왕가위 영화가 국제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장국영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레스터 청이란 이름으로 명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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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의 한 장면. /사진 출처=다음 영화
◆ 만우절이 올 때마다

장국영이라는 영화의 러닝타임은 47년이었다. 그는 2003년 4월 1일 떠났다. 예고 없는 엔딩이었다. 그의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질 나쁜 만우절 거짓말로 여겼다. 장국영은 홍콩 고층 호텔에서 몸을 던졌다. 장국영의 죽음을 두고 추측이 난무했다. 우울증 때문에, 연인과의 애정 관계 때문에, 감독 데뷔가 무산됐기 때문에, 유작 '이도공간'(2002)을 촬영하며 극도로 예민해졌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자살이 아니라는 음모론까지 더해졌다. 그 어떤 이유가 됐든 장국영이 떠났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장국영의 노래, 영화와 함께 1980년대, 1990년대를 통과한 팬들은 자신의 청춘도 끝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장국영의 고독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비는 나와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다. 강한 척하면서도 여리고, 마음 가득 차오른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수로서 배우로서 최절정의 인기를 누린 스타이면서도 그는 종종 "나는 즐거운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장국영은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그의 우울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외로이 자란 소년 시절부터였을까. 홍콩이라는 화려한 불빛이 그에겐 독이었을까. 높이 오를수록 공허함은 더 깊어졌을까. 영원히 알 수 없다. 다만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던 연약한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볼 뿐이다.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은 장만옥에게 "내 시계를 1분만 같이 보자"라고 말한다. 시곗바늘이 2시 59분에서 3시로 향하는 순간 그는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1분 전에 우린 함께 있었어. 이 1분 때문에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거야"라는 대사를 뱉는다. 장국영이 떠난 후로도 4월 1일이 되면 사람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무료하고 피곤한 일상을 달랜다. 하지만 장국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만우절은 허허로운 날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장국영을 떠올리면서, 그를 좋아했던 시절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1분처럼 지나가 버린 청춘을 되돌아보면서, 이 모든 것이 짓궂은 농담 같다고 생각한다. 다음 해 4월 1일이 되면 또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영원히 장국영을 기억할 것이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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