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지상파 타고 공기처럼 퍼진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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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4.17. 오후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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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악의 없이도 전파되는 혐오

선거방송 중 여혐 혐의 발언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사과했지만 공인에 대해 부적절

김대호 전 미래통합당 후보 발언
‘노인 비하’ 막말 논란 불렀지만
이 논란이야말로 문제적인 대목
‘장애는 비장애보다 열등하다’는
사회에 만연한 장애혐오 드러내
문화방송(MBC) 화면 갈무리


선거의 축제적 성격을 강조한다는 맥락에서, 선거 개표방송은 갈수록 오락적인 성격이 짙어지고 있다. 매번 개표방송이 방영될 때면 각 방송사에서 공들여 준비한 컴퓨터그래픽 화면이나 애니메이션 등이 화제가 되고, 해당 클립이 소셜미디어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른 이유로 소셜미디어를 순회한 클립이 있었다. <문화방송>은 개표방송 중 초접전지역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자사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 <출발! 비디오 여행>의 인기 코너 ‘영화 대 영화’의 포맷을 빌려왔다. 그리고 야당 중진인 나경원과 여당에서 전략공천한 이수진 전 부장판사가 맞붙은 서울 동작을 지역구를 소개하며 내보낸 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판사 선후배 간의 대결, 서울 동작을의 결말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잠시 부연하자면,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는 과거 문화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띠동갑내기 과외하기> 촬영 중 배우 이태임과 가수 예원이 설전을 벌였을 때 예원이 이태임에게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황색 연예 저널리즘 매체들이 두 사람의 설전과 관련된 논란을 불필요하게 키우는 동안, 설전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저 문장은 다양한 형태로 패러디되어 온라인에 퍼져 나갔다. 혹자는 저 문장이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프레임을 공고히 하는 여성혐오적인 표현이라 지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위계질서가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명백히 결례인 언행을 일삼은 것에 대한 풍자일 뿐 여성혐오적 표현은 아니라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그 표현이 담고 있는 주된 함의가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분명 부장판사 출신의 정치인과 원내대표를 지낸 4선 의원 간의 대결을 수식하기에 적합한 표현은 아니었다. 공인들의 공적인 대결을 여성 간의 사적인 기싸움에 빗댄 건데, 비슷한 대결구도에서 남성 후보들이 이와 같은 패러디로 표현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이번 건은 분명 여성혐오적인 표현일 수밖에 없었다.

의도야 어떻든 사과하기까지

방영 직후부터 소셜미디어에서는 해당 장면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성토하는 목소리들이 들끓었다. 문화방송 게시판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지적하는 항의글이 빼곡하게 올라왔고, 결국 문화방송은 개표방송 도중 성장경 앵커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저희가 서울 동작을의 개표 상황을 전해드리는 과정에서 사용된 표현이 여성혐오성 표현이라는 일부 시청자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의도는 전혀 아니었습니다만, 세심하게 살피지 못해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점 사과드립니다.”

온라인에서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말은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축소하려는 전형적인 ‘나쁜 사과문’의 예라는 지적이 있었고, 여성혐오를 지적했더니 그저 ‘보신 분이 오해’한 거라 말하는 거냐는 분노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지적을 하니까 실시간으로 사과를 할 의향까지 보인 건 분명 예전과는 다른 고무적인 현상이라는 반응도 함께 나왔다. 사과문에 쓰기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는 말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의 눈과 귀가 몰리는 개표방송에서 대놓고 여성 후보를 무시해야지 하는 선명한 악의를 가지고 그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어쨌거나 지적을 받자마자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생방송 중에 사과한 것은 분명 일보 전진이라 할 수 있다. 실수의 인정과 사과가 빨랐던 만큼 부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선명한 악의 같은 것 하나 없이도 무의식중에 누군가를 차별하고 깎아내리는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적여’ 프레임은 유행어의 외피를 입은 채 유통되고, 그 유행어가 ‘재미 삼아’ 유통되는 동안 유행어에 숨겨진 편견 또한 함께 널리 퍼진다. 우리는 흔히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차별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차별은 이처럼 문화적 코드나 시대적 공감대 안에 제 모습을 감춘 채로 유통된다. 대부분의 차별주의자가 자신이 ‘부당한 차별’ 같은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차별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기처럼 퍼져서 만연한 차별은, 공기처럼 만연하기에 별다른 악의 없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따금씩 멈춰 서 자신의 말과 글을 뒤돌아보며 꼼꼼히 체크해보지 않는 한,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우리도 부지불식중에 차별과 혐오를 숨쉬듯이 전파하고 있을 수 있다. 선명한 악의를 지닌 이들이 많다고 믿는 쪽보다, 자신은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이들이 별다른 악의 없이 혐오를 전파하고 있는 걸 의심하는 쪽이 훨씬 더 무섭지 않나?

총선 과정에서 ‘노인 비하’라는 비판을 받고 제명된 김대호 전 미래통합당 후보의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는 발언에 대한 세간의 반응도 그렇다. 물론 김대호 전 후보는 해당 토론회에서 장애등급제가 폐지된 지 9개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장애를 이야기할 때 ‘1급, 2급, 3급’이라 말하며 장애 이슈에 대한 낮은 이해도를 보여줬고, 그 전날에도 3040세대를 싸잡아 “논리가 없고 무지하다”고 말하며 특정 세대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공당의 후보의 말이 지녀야 할 품격이나 제반 지식이라 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는 발언이 노인 비하라는 말은, 사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부지불식중에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기는 편견을 지니고 있음을 폭로한다.

보이는 차별과의 싸움은 차라리 쉽다

물론 김대호 전 후보의 발언을 지적한 사람들이 모두 장애인을 혐오하고 멸시하겠다는 악의를 지닌 이들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중에는 과거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문제로 지역주민들과 장애학생 부모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 개탄하면서 지역주민들을 비판한 이들도 있으리라. 그런 이들조차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노인 비하’라고 나선 것은, 여전히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 우등과 열등의 위계를 그려 두고 장애 이슈는 비장애인인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사안이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굳건한 무의식 때문은 아닐까? 장애 인구의 상당수는 후천적 장애인이고, 노화 과정을 거치면서 시력 저하나 청력 손실, 경도의 보행 장애나 인지 장애 등을 겪는 일은 매우 보편적인 일이다. 보편적인 복지 서비스를 넘어 전 사회가 배리어 프리(장애 여부와 무관하게 모두가 보편적으로 사용 가능한 사회 인프라)를 지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향신문> 정유진 정책사회부장은 ‘우리는 모두 잠재적 노인이고, 잠재적 장애인이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 문제를 명쾌하게 지적했다. “정신적 장애이든, 신체적 장애이든, 모든 장애의 스펙트럼을 길게 펼쳐놓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안의 어딘가에 위치하게 된다. 젊고 건강할 때는 끄트머리에 걸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병이나 사고 없이 무사히 노년기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그 위치는 스펙트럼의 중심부에 점점 가까워질 확률이 높다. (중략) 나이가 들면 장애인이 된다는 말이 ‘노인 비하’가 되는 것은 결국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얼마나 오염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정 정책사회부장의 말처럼, 김대호 전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 여부나 정치성향과는 무관하게 “장애인이 된다”는 말을 비하라 여기는 것이 사회에 만연한 장애혐오의 산물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의 정체가 내 눈앞에 보이니 전선을 짜기도 그만큼 용이하다. 그러나 사회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탓에 별다른 악의 없이도 쉽게 반복재생산되는 차별과 편견과 싸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조차 그와 같은 차별과 편견에서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리고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책무는 방송과 정치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무일 것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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