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진종의 사례를 원용해 후궁 권양원을 세자빈 책봉

 

권씨 후궁시절 두 번째로 낳은 아이가 바로 경혜공주
세종 “이미 딸을 낳았으니 어찌 아들인들 못 낳을까”
딸 출산 전력이 세자빈에 오르는 영광의 배경이 되어
하지만 4년만에 아들(단종) 출산하고 하룻만에 숨져
수양대군이 권력 전면에 나서는 결정적 계기가 된 셈

 

 ※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단종 태어나던 날. 출처:KBS 역사저널 그날
단종 태어나던 날. 출처:KBS 역사저널 그날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1. 양원 권씨 

세종은 두 세자빈을 폐하고 세 번째 세자빈을 고르는 일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질투심이 많았던 휘빈 김씨, 행실이 바르지 못했던 순빈 봉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심성이 바른 세자빈을 고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세종은 한양과 지방에서 여러 규수를 골라 길흉을 점치고 덕을 살펴보았지만 마음에 흡족한 규수는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후궁이었다.

「세자빈을 두 번이나 폐하고 다시 세웠지마는, 어진 배필을 얻지 못하여 변고를 가져오게 했으니 실로 마음이 편치 못하다. 지금 비록 간택하더라도, 또한 어찌 심성이 어진 사람을 보증하겠는가. 내가 어제 갑자기 생각해 보니,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새로 얻는 것과 본래부터 궁중에 있으면서 부인의 도리에 삼가하고 공손한 사람을 뽑아 세우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후회가 없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18년 12월 28일 기사 중에서 이렇게 하여 호조참의(정3품) 권전(權專)의 딸인 권양원과 사헌지평(정5품) 홍심(洪深)의 딸인 홍승휘가 세자빈 후보로 올랐다. 세자는 권양원보다 홍승휘 쪽에 마음을 더 두고 있었지만 세종은 권양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미 딸을 낳았으니 어찌 아들인들 못 낳을까? 세종은 왕손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에 더 큰 비중을 둔 선택을 했다. 그러고 보면 그 딸이 어미를 세자빈으로 만들어 준 셈이다. 어미를 세자빈으로 만든 딸, 그 딸이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의 주인공이자 장차 공주가 될 경혜공주이다.

그러나 세종에게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후궁은 후궁일 뿐, 후궁이 빈이 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대부의 법도에 따르더라도 첩은 첩일 뿐 본처가 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세종은 송나라 진종의 사례를 원용했다. 진종은 후궁을 귀인으로 승격시킨 뒤 황후에 봉한 인물이었다. 이 사례에 따라 권양원을 세자빈으로 책봉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훗날 혹시라도 있을지도 모른 세자빈의 자격 시비를 염려하여 세종은 삼정승을 불러 동의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권양원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세자 향(훗날 문종)이 순빈 봉씨와 이혼한 지 5년 만에 새로 맞이한 세자빈. 그녀가 바로 권양원이었다.

2. 세자빈이 단종을 낳다

세자빈 권씨는 홍주목 합덕현에서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주 최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세자궁의 궁녀로 들어가 14살에 승휘(정5품)가 되고 세자 향(훗날 문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녀는 후궁이 된 지 2년 만에 딸을 낳았지만 곧 죽고 말았다. 세종에겐 첫 손녀여서 중전과 함께 몹시 슬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그녀는 또 딸을 낳았다. 그녀가 바로 경혜공주가 될 그 딸이었다. 경혜공주의 출생으로 권씨는 승휘(정5품)에서 양원(정3품)으로 품계가 오르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세자빈 봉씨는 양원 권씨의 연이은 출산에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급기야 임신했다고 거짓 소문을 내기에 이른다. 양원 권씨의 출산이 세자빈 봉씨가 악수를 두기 시작한 원인이 된 셈이다. 결국 봉씨가 쫓겨나고 양원 권씨가 세자빈이 되었다. 그녀의 나이 19살. 경혜공주도 어머니의 신분이 높아졌으니 품계가 현주에서 군주로 승격되었다.

권씨가 세자빈 자리에 오른 지 4년이 지나고 24살이 되던 여름 날, 세자빈은 세종이 그렇게 바라던 원손(훗날 단종)을 낳았다. 세종은 그날의 기쁨을 실록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세자 연령이 이미 서른이 거의 되도록 아직도 후사를 얻지 못하여 내가 근심하였는데, 이제야 적손(嫡孫)을 낳았다. 이것은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할 바이요,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일이다.」<세종실록> 세종23년 7월 23일> 기사 중에서


세종은 대전에서 만조백관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살인, 강도 등 중죄인을 제외한 모든 죄인을 풀어주라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어전에 놓여 있던 큰 촛대가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사고였다. 세종도 불길함을 느낀 탓일까? 세종이 재빨리 철거하도록 명했다고 실록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온 조정의 기쁨은 하루도 가지 않았다. 산후 후유증으로 세자빈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종은 자선당으로 달려가 친히 문병을 했다. 이 왕손을 얻기 위해 두 며느리를 내친 세종이었다. 세종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세자빈은 왕손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니 눈인들 제대로 감을 수 있었으랴. 홍위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세자빈에 오른 지 5년. 그녀의 나이 스물 넷. 그녀에게 주어진 삶은 거기까지였다. 온 나라의 슬픔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임금과 중전은 매우 슬퍼하여 수라를 폐하였고,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세종실록> 세종23년 7월 24일> 기사 중에서

세종은 세자빈에게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왕후보다는 격이 낮지만 공주보다는 한 등급 위로 격을 올려 장례를 치르도록 명을 내렸다. 즉 세자는 소대(흰 허리띠)를 30일 동안 하고, 임금과 중전은 소대를 5일 동안 하며, 조회는 5일 동안 정지하게 하여 세자빈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서둘러 새 궁을 지어 세자를 동궁에서 나가 살게 했다. 현재의 동궁은 두 명의 빈(嬪)을 생이별하고, 한 명을 사별한 매우 상서롭지 못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자빈 권씨가 살던 자선당과 세자의 처소인 비현각, 경혜공주가 자라고 단종이 태어나던 그 동궁은 그렇게 해서 주인을 잃고 말았다. 훗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움켜쥐던 그날, 정난공신들이 축하연을 벌이는 장소로 쓰이게 될 줄을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세종은 원손의 탄생을 신성시하기 위하여 전국에 명을 내려 원손(元孫)이란 이름을 가진 자는 개명토록 명하고 또한 앞으로 태어나는 자의 이름도 원손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발인은 9월 16일로 정해졌다. 현덕빈이 숨을 거둔 지 두 달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영구가 안산으로 출발했다. 호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이 영구차를 받들고 경복궁을 나서는데 도성 사람들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현덕빈의 무덤을 소릉(昭陵)이라 이름하고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덕을 기렸다.


「부드럽고 지혜로운 덕과 아름답고 고운 용모가 양궁(兩宮-세종과 소헌왕후)에게 사랑을 받아 세자빈에 책봉되셨고, 의식대로 빈(嬪)의 법도를 닦으시어 미덥게도 세자의 짝이 되셨도다. 원손이 탄생되어 울음소리 아름다우니, 종묘에 경사가 넘쳤고 기쁨이 천지에 가득하였는데,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이[年]마저 안 주셨는가? 자는 듯 세상을 떠나시매 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슬픈들 어이하리, 말씀이나 돌에 새기리라.」<세종실록> 세종23년 9월 21일 기사 중에서


그렇게 해서 현덕빈은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도성에서 멀고도 먼 곳, 바다가 멀리 보이는 안산 땅의 와리산 중턱에 묻혔다.

3. 만약에

역사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문종이 일찍 죽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왕비가 살아있었다면 단종을 지켜줄 배후세력이 되었을 터였다. 수양대군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덕왕후의 이른 죽음은 수양대군이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 셈이었다.

세종이 이루어 놓은 문민정치는 여기까지였다. 단종을 몰아낸 세조는 피의 정치로 권력을 유지했다. 만약에 현덕빈이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문종이 새 세자빈을 맞이했더라면, 만약에 문종이 3, 4년만 더 살아서 단종이 성인이 되었더라면…….

역사에서 가정법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여러 가정법을 설정해 보는 것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다음 이야기는 <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과 그 며느리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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