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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대백과

FC 바르셀로나

피로 얼룩진 역사 위에서 아름다운 축구를 구현하다

“라커룸에는 오직 나와 선수들만이 들어올 수 있소.”
이 한마디로 FC 바르셀로나의 역사가 새로 작성되었다. 1988년 5월 5일이었다. 당시 FC 바르셀로나의 막강 권력자 호셉 누네스 회장은 감독 위의 감독이었다. 모든 권력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백만장자 누네스는 1978년부터 구단을 맡아서 우도 라텍, 테리 베너블스, 체사르 메노티 같은 감독들을 연신 쫓아냈다. 그리하여 팀이 급전직하, 추락했다. 선수들은 다른 팀 스카우터들의 눈에 띄려는 듯 공을 찼고, 오합지졸의 경기력 때문에 관중들은 축구의 성지 캄프 누를 점차 외면했다.

누네스 회장은 고심 끝에 새 감독을 찾았다. 자신의 경영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독, 요한 크루이프였다. 크루이프는 라커룸을 완전히 통제했다. 그제야 비로소 FC 바르셀로나의 라커룸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곳은 구단 수뇌부의 입김이 스며드는 곳이었고, 코치나 선수들 심지어 감독도 그 외압에 휘둘렸었다. 그러나 크루이프로 인하여 라커룸은 선수들의 휴식처가 되었고, 때로는 다정한 말로 때로는 신경질적인 폭언으로 서로 ‘우의’를 다지는 막사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감독과 선수들이 다가오는 결전에 대비하여 최후의 임무를 상기하는 지휘통제소가 되었다. 그리하여 요한 크루이프의 FC 바르셀로나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오늘날 FC 바르셀로나의 전설은 저 1988년 5월 5일을 분기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역사는 어떠했던가.

FC 바르셀로나 vs RCD 에스파뇰

아름다운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는 급변하는 사상과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고,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 왕당파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바르셀로나를 연고지로 하는 두 팀 FC 바르셀로나와 RCD 에스파뇰은 이곳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출처: (cc) Diliff at es.wikipedia.org>

FC 바르셀로나의 역사와 그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일종의 ‘연관 검색’을 해야 한다. 현재 스페인 1부 리그 프리메라리가(Primera Liga)에 속해 있는, 바르셀로나 연고 팀은 둘이다. 그 하나가 FC 바르셀로나이고 다른 하나는 RCD 에스파뇰이다. 에스파뇰 구단은 1900년에 창단되었다. 무려 11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팀으로, 10-11시즌 8위, 11-12시즌 14위, 그리고 12-13 시즌 현재 시점 11위로 중위권의 다크호스다.

그들의 홈구장은 코르네야 엘 프랏. 지난 2009년부터 사용했다. 한때 그들은 구단 재정이 취약해지면서 원래의 홈구장을 팔고, 10년 가까이 몬주익 올림픽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썼었다.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의 영광’을 구현했던 그 장소 말이다.

아무튼 이 구단은 1900년, 스페인의 유서 깊은 대학교인 카탈란 대학교(Catalan University)의 몇몇 학생들이 창설하였다. 그들은 왕당파에 저항하여 카탈루냐(Catalunya: 에스파냐 북동부에 위치한 자치 지방)만의 독자적인 정치적ㆍ문화적 행동에 나서려는 바르셀로나의 한복판에서 국왕 알폰소 7세를 따르는 축구 팀을 창설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이에 국왕은 1912년 구단 이름에 ‘레알(Real)’이라는 표현을 쓰도록 허락했다. 스페인에서 ‘레알(Real)’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레알? 정녕? 진정? 진짜?”의 뜻이 아니라 ‘왕립(Royal)’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왕실이 창설하고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명칭을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왕정의 구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저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는 1920년 알폰소 13세가 ‘레알’이라는 ‘영광’의 호칭을 하사했다.

스포츠 저널리스트 사이먼 쿠퍼에 따르면 이 ‘에스파뇰’이라는 이름은 마드리드를 정점으로 하는 스페인 중앙 무대에서 볼 때 거의 ‘외국’이나 다름 없는 바르셀로나 지역을 조롱하는 뜻을 갖고 있다. 처음에 그 말은 설립자 호안 감페르가 스위스 출신이라는 점을 조롱하는 것이었으나, 점점 바르셀로나 전체를, 다시 말해 카탈루냐 전체를 방외자 취급하는 용어가 되기도 했다.

1899년 10월 22일, 호안 감페르는 지역 신문에 축구 클럽을 만들자는 광고를 싣고 일정액을 출자하여 한 달쯤 지난 11월 29일에 여러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팀을 창단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외국 출신이었다. 오토 마이어, 존 파슨스, 윌리엄 파슨스 이런 이름을 가진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그 무렵에 창단된 아틀레틱 빌바오(Athletic Bilbao)같은 팀도 영국인들이 주도했는데, 이는 바르셀로나가 무역항이었고 빌바오가 영국인들이 대거 참여한 탄광 지대라는 점 때문이었다.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는 내륙의 마드리드와 달리 스페인 바깥에서 수많은 정치가, 급진 사상가, 도박꾼, 무역업자, 잡범, 예술가, 히피들 그리고 축구 감독과 선수들이 수세기에 걸쳐 돈과 명예와 안식을 찾아 기항한 역사를 갖고 있다. 내륙과 달리 항구에 위치한 이 도시는 급변하는 현대의 사상과 문화를 급속도로 받아들였고,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독재자 프랑코(Franco, 1892~1975)의 불법 권력 찬탈과 장기 집권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도시가 되었다.

지역주의 색채가 강한 바르셀로나에서 RCD 에스파뇰은 스페인 왕당파를 대변하는 듯한 팀이 되어버렸고, 왕궁이 있는 마드리드로부터 ‘소외되고 차별’ 받은 바르셀로나 지역 내에서 다시 ‘소외되고 차별’ 받은 스페인 사람들(카탈루냐 사람이 아닌) 일부가 선호하는 팀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RCD 에스파뇰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때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프랑코 독재 시기다. 이 시기에 독재자 프랑코의 사랑과 지원을 받는 레알 마드리드와 그에 맞섰던 바르셀로나의 상징 FC 바르셀로나 사이의 경기는 거의 전쟁과 흡사했다. 그 무렵 바르셀로나에서는 FC 바르셀로나가 골을 넣으면 함성과 함께 축포가 터졌다. 그런데 레알 마드리드가 골을 넣어도 한 쪽에서 함성과 축포가 터졌다. 바로 에스파뇰 서포터스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때 독재자 프랑코를 지지하는 파시스트 클럽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정황 증거들은 FC 바르셀로나의 역사적 위치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FC 바르셀로나 vs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의 엠블럼 변화사. 최초의 엠블럼은 바르셀로나 시의 문양을 기본으로 한 것으로 성 조지 십자가와 카탈루냐 국기가 함께 도안된 것이었다. 1939년에는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클럽의 이름이 바뀌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1974년 이후에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엠블렘과 이름으로 바뀌었다. <출처: FC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

어쩌면 RCD 에스파뇰에 연민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카탈루냐 독립운동의 중심지 바르셀로나. 하필이면 그 바르셀로나의 상징 FC 바르셀로나와 함께 연고지를 공유하는 ‘소수파’ 에스파뇰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스페인 전체를 양분하는 저 중앙 무대의 강력한 구단 레알 마드리드와 연관하여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맞대결을 일컬어 ‘엘 클라시코(El Clásico)’라고 부르지 않던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빅 매치에는 짧게는 70여년의 현대사가, 길게는 300여년의 근대사가 농축돼 있다.

14세기 후반,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여왕의 정략결혼으로 성립된 스페인은 곧장 영토 확장(또는 회복)에 나선다. 이베리아 반도 내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하고, 저 멀리 아메리카로 식민지 독점에 나선 스페인의 중심 도시가 오늘의 수도인 마드리드다. 한편 동부의 카탈루냐는 1137년에 아라곤 왕령이 됐으나 17세기와 18세기 두 차례에 걸쳐 격렬한 분리 독립운동을 벌였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일찌감치 발달한 철강, 운수, 항만 산업을 기반으로 왕정에 반대하는 민주 공화정을 추구해왔다. 그 중심 도시가 바르셀로나다.

두 도시, 곧 왕정 세력의 마드리드와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바르셀로나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은 1930년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일시적으로 공화정이 수립되고 그에 따라 카탈루냐가 잠시나마 자치 및 카탈루냐어를 공식 사용할 수 있게 됐으나, 왕당파와 토지 귀족 세력의 연대 및 이를 무력으로 뒷받침하는 프랑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1937년, 캔버스에 유채, 349.3×776.6 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소장<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바스크 지방의 수도인 게르니카가 나치에 의해 폭격당해 민간인 1,500여 명이 희생된 사건을 그린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이에 동부 카탈루냐의 중심 도시 바르셀로나와 북부 바스크의 중심 도시 빌바오 시민들이 거센 저항을 했고, 독재자 프랑코는 히틀러 공군의 힘을 빌려 자국민을 공습하기에 이르렀다.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는 바로 이때 히틀러와 프랑코가 바스크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학살한 사태를 깊이 추모한 작품이다.

FC 바르셀로나에는 이러한 피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저 북쪽의 다른 나라 맹주(독일의 히틀러)에게 부탁하여 자국 영토 내의 작은 마을(바스크 지역 게르니카)의 주민들에게 폭탄을 투하해 달라고 부탁하는 프랑코 독재 시절이었으니, 이에 저항한 바르셀로나 역시 갖은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6월 14일, FC 바르셀로나의 팬들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정권에 대해 저항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이에 독재자는 경기장을 폐쇄하는 조치를 단행, 창단 이후 어렵게 구단을 이끌어 온 호안 감페르는 회장 자리에서 쫒겨났다. 그는 1930년 7월 30일,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인하여 자살했다. 충격의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것은 1936년. 그로부터 일 년 후인 1937년 여름, 바르셀로나의 급진 사상과 그 세력을 대표하던 FC 바르셀로나의 회장 호셉 수뇰이 프랑코의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북중미 투어 중이던 선수단의 절반 가량은 현지에서 곧장 멕시코나 프랑스로 망명을 시도했다. 프랑코를 지지하는 파시스트들은 1938년 3월 16일, FC 바르셀로나의 구단 사무실에 폭탄을 던지는가 하면 주요 선수 및 구단 관계자들에게 협박 전화를 걸기도 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걸작 영화 <1900년>이 잘 보여주듯이 왕당파와 지주와 부패한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누려온 수 세기의 권력과 영광을 지키기 위해 파시스트를 ‘고용’했는데, 알고 보니 그 개가 주인마저 물어버리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었다.

독재자 프랑코는 마드리드의 주인, 곧 스페인의 왕가마저도 무시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최소한의 품위나 절제마저도 독재자는 거부했다. 한때 프랑코를 환영했던 마드리드 사람들도 30년 넘게 프랑코 밑에서 신음하며 살았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2011년 5월 28일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FC 바르셀로나의 팬이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포스터를 들고 있다. 프랑코의 독재 및 스페인 내전을 거치면서도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지방색을 견고히 지켰고, 이는 오늘날 엘 클라시코의 격렬함을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

독재자 프랑코는 카탈루냐어와 카탈루냐 국기 사용을 금지했고, 이에 따라 스페인어가 아닌 축구 클럽의 이름이 강제 개명되었으며 엠블럼도 모조리 바꾸도록 했다. 이에 FC 바르셀로나의 이름은 ‘CF 바르셀로나’로 바뀌었는데, 이는 ‘클럽 데 풋볼 바르셀로나(Club de Fútbol Barcelona)’를 줄인 것이다. 엠블럼에서도 전통의 카탈루냐 자치 국기가 삭제되었다. 1943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는 11-1로 대패한 적도 있다.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준결승전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가 3-0으로 이기자 프랑코 파시스트가 노골적으로 협박을 가하였고, 그 바람에 2차전의 결과가 11-1이 된 것이다.

그나마 1950년대는 FC 바르셀로나의 무대였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 전역에서 혼자 뛰었다. 여기에는 1957년 완공된 캄프 누 공사에 따른 재정적 압박도 큰 이유가 되었다. 새로운 선수를 영입할 자금이 바닥나 버린 것이다.

인구 700만명으로 스페인 전체(4700만명)의 7분의 1가량이지만,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카탈루냐는 지금도 자치 독립을 위해 다양한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06년 스페인 중앙 의회는 카탈루냐 자치 정부에 세수입 관할, 카탈루냐어의 공용어 인정, 독자적 사법권 보장 등 사실상 ‘주권국가’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야당인 대중당이 “헌법에 규정된 스페인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라며 헌법 소원을 냈고 그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지난해, 그러니까 스페인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하나가 되어 기쁨을 누린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스페인 안에 또 하나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고, 곧 바르셀로나에서는 110만 여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반대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것이 엘 클라시코가 열릴 때면 FC바르셀로나 팬들이 그들의 홈구장에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라는 거대한 현수막을 내거는 까닭이다. 또한 팀 수뇌부와 과거의 노장들이 큰 경기가 있을 때마다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에 모여 거장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의 음악을 들은 후 경기를 관전하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파블로 카잘스는 한평생 프랑코 독재에 저항했던 카탈루냐 출신의 위대한 음악가다. 이밖에도 스페인 내전 때 FC바르셀로나의 수뇰 회장이 프랑코 총통의 군대에 의해 살해당한 사실과 레알 마드리드의 열혈 팬인 프랑코 총통이 강제적으로 당대 최고 선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사건도 엘 클라시코의 격렬함을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이런 과거사에 대해 오늘날의 마드리드 시민들과 레알 팬들이 일일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FC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 1 – 크루이프와 그 아이들

1970년대 중반 이후 FC 바르셀로나는 ‘오늘날의 바르셀로나’가 되기 위하여 환골탈태의 과정을 겪었다. 그 첫째가 1974년 요한 크루이프의 영입이다. 상당한 액수를 제시한 레알 마드리드 대신 그는 FC 바르셀로나를 선택하였다. “프랑코가 지원하는 팀에서는 뛰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일성은 진심이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카탈루냐식으로 요르디(Jordi)라고 지었으며 딸은 카탈루냐 사람과 결혼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결정적으로 73-74 시즌의 우승을 이뤘다. 1960년 이후 13년 만의 리그 우승이었으며, 더욱이 레알 마드리드의 성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5-0의 쾌승까지 거두었다.

1978년에는 호셉 누네스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이후 디에고 마라도나, 베른트 슈스터, 게리 리네커 같은 선수들이 왔다가 갔고 우도 라텍, 체사르 메노티, 테리 베너블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같은 감독도 왔다가 갔다. 누네스 회장은 FC 바르셀로나의 재정을 안정화하였고 팀 리빌딩의 관건인 자금을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수많은 감독과 선수가 캄프 누를 들락거림으로써 고유한 색채는 사라지고 말았다.

1988년 5월 5일, 요한 크루이프가 “라커룸에는 나와 선수들만이 들어올 수 있소.”라고 선언한 이후, FC 바르셀로나는 달라졌다. 그와 그의 ‘아이들’은 90년대를 평정했다. 크루이프를 정점으로 하여 주제프 과르디올라, 호세 마리 바케로, 욘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게오르게 하지, 로날트 쿠만, 미샤엘 라우드럽,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같은 선수들이 불멸의 연대기를 작성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그들은 라 리가 우승, 1989년 UEFA컵 위너스컵 우승, 1992년 유러피언컵 우승 등을 포함하여 무려 11개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이 연재의 ‘요한 크루이프’ 편에서 다룬 바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FC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 2 – 과르디올라와 그 아이들

2011 피파 클럽 월드컵에서 우승한 FC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이 과르디올라 감독을 헹가래하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요한 크루이프 시절 확립한 유소년 교육 시스템을 통해 성장한 과르디올라, 이니에스타, 사비, 세스크 등의 선수들은 바르셀로나 전성기의 밑거름이 되었다. <출처: (cc) Christopher Johnson at en. Wikipedia.org>

미국 스탠퍼드대의 한스 굼브레히트 교수는 [매혹과 열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신체가 예기치 않게 공간에 등장하는 것, 재빨리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아름다운 형태를 띠는 것은 일종의 ‘에피파니’(epiphany: 진리의 순간적이고 예술적인 현현)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에피파니야말로 우리가 운동경기를 관전할 때 느끼는 환희의 원천이며 이것이 우리의 미적 반응의 수준을 결정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에 의해 현대문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른 ‘에피파니’를 스포츠에 적용한 굼브레히트의 위와 같은 말을 가장 극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팀이 바로 FC 바르셀로나다. ‘갑자기 아름다운 형태를 띠는’ 순간 말이다.

아스널의 감독인 벵거는 “메시가 일단 뛰기 시작하면, 그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엄청난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느 곳으로든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다.”라고 말했다.

바로 그 생생한 현장이 2011년 4월 6일 열린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이다. 비운의 적장은 다름 아닌 아스널의 벵거 감독. 그는 그의 말대로 ‘메시가 일단 뛰기 시작하면 그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결과는 FC 바르셀로나의 완승이었다. 그 경기에서 아스널은 단 한 차례도 슛을 날리지 못했다. 설마? 아스널이? 진실이다. 그들은 90분 내내 메시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하면서 단 한 번도 슛을 날리지 못하고 패했다. 경기 후 벵거 감독은 메시와 FC 바르셀로나에 대해 “흡사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을 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아스널의 벵거는 “메시가 일단 뛰기 시작하면, 그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엄청난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느 곳으로든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다.”고 말했다. <출처: (cc) Adrià García at en.wikipedia.org>

FC 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를 맞이한 챔스 준결승 1차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특히 두 번째 골! 후반 42분, 메시는 혼자서 40여 미터를 달렸다.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 다섯 명이 마치 스키장의 기문(Gate)처럼 흔들렸다. FC바르셀로나의 동료 대여섯 명은 동작을 멈추었다. 굳이 메시를 돕기 위해 달려갈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가 다섯 명의 수비수와 골키퍼를 무너뜨리는 진풍경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11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장소는 런던의 웸블리 구장! 퍼거슨 감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1-3으로 대패했다. ‘더블 트레블’의 전설 알렉스 퍼거슨의 목표는 우승이었으나 우승컵의 주인공은 FC 바르셀로나가 되었다. 모든 영광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몫이었다. 결승전을 치르기 전까지 12경기에서 단 4골만 허용했던 맨유는 이 결승전에서 3골이나 내줬다.

결승전에서 메시는 딱 세 번 슛을 날렸다. 세 차례 슛은 모두 유효 슈팅이었고, 그 중 하나가 결승골이 되었다. 당시 맨유의 골키퍼 판 데 사르는 “그런 상황에서 반대편으로 슛을 쏘는 버릇이 있어 철저히 대비했으나 메시는 반대 방향을 선택했다. 막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메시는 정말 빠르며 가속도가 붙었을 때 그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팀은 메시를 한순간도 제어할 수 없었다.”고 극찬했다. 그날 메시의 패스 성공률은 91%였다. 마라도나는 잉글랜드 일간지 <더 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평했다.

“그동안 새로운 마라도나가 등장했다는 얘기를 수십 번 들었으나 오직 메시만이 내 수준에 도달했다. 메시는 공을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상대를 압박한다. 전설의 반열에 오른 선수들은 누구도 감히 상상 못할 장면으로 그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메시가 바로 그런 선수다.”

메시를 막기 위해서는 “시간도 주지 말고 공간도 주지 말며 숨도 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분석했던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를 비롯한 현지의 언론들은 경기 직후 ‘브라보 바르사(옵서버)’, ‘오, 너무 쉽다(선데이 타임스)’ ‘메시아(뉴스 오브 더 월드)’ ‘메시의 매직이 맨유를 가라앉혔다(선데이 텔레그래프)’ 등의 기사를 뿌렸다. 완패 후 퍼거슨은 “바르셀로나는 내가 감독을 시작한 이래 만난 최고의 팀”이라고 존경을 표했다. 독설로 유명한 퍼거슨이지만 그의 명성이 독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 발언이기도 했다.

과르디올라는 패스 플레이를 통한 공격 정유율의 극대화로 팀을 정상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는 지휘봉을 잡은 세 시즌 동안 무려 10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명장의 자리에 올랐다. <출처: (cc) Якушкин Иван at en.wilipedia.org>

과르디올라는 감독을 맡은 지 세 시즌(만 4년) 만에 ‘전설의 명장’들이 평생 헌신해 이룩한 이력서보다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사실 그가 부임할 때 팀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은하영웅전설’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시대였다. 레이카르트 감독이 맡았던 06-07시즌에는 초반에 반짝 상승했다가 결국 무관으로 추락했다. 사무엘 에투와 메시는 부상에 시달렸다. 에투는 레이카르트 감독과 호나우지뉴를 자주 비판했고, 결국 세 사람 모두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07-08 시즌에 바르셀로나는 리그 3위에 그쳤고 레알 마드리드와 만난 ‘엘 클라시코’에서 1-4로 대패했다. 바로 다음 날, 호안 라포르타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은 레이카르트를 경질하고 38세의 과르디올라를 호명했다.

과르디올라는 공격 점유율의 극대화를 지상과제로 선택했다. 사람이 공보다 빠를 수 없다는 원칙, 곧 패스를 좌우명으로 삼되 공을 갖지 않은 선수 또한 부지런히 좌우 공간으로 움직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공보다 선수가 빨라지는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했다. 수비의 푸욜에서 미드필드의 메시, 이니에스타, 사비 그리고 공격의 비야까지 모두가 이 비범한 패스와 극단적인 공격 점유율의 축구를 실천했다.

그는 감독 부임 후 2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차지했고, 다시 그것을 들어 올리는 데 2년이 걸리지 않았다(참고로 퍼거슨은 9년이 걸렸다). 그는 지휘봉을 잡은 세 시즌 동안 무려 10개의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부임 첫해 스페인 축구 역사상 전대미문의 트레블(리그, 코파 델 레이, 챔스 우승)을 달성했고, 곧장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UEFA 수퍼컵, FIFA 클럽 월드컵까지 거머쥐며 한 해 동안 한 클럽 팀이 참가할 수 있는 최대 6개 대회에서 모조리 우승하는 축구 역사상 최초의 6관왕을 이뤘다.

2009년 부임 첫해에 사상 최연소 챔스 우승 감독이 된 과르디올라와 맞붙었던 알렉스 퍼거슨(맨유), 아르센 벵거(아스널), 주제 무리뉴(레알 마드리드) 등 금세기 최고 명장들은 패퇴한 군졸을 간신히 수습하여 흙먼지 자욱한 전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퍼거슨이나 무리뉴 같은 감독들이 언론을 향해 강력한 백태클과도 같은 독설을 구사할 때 과르디올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르셀로나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지 않는다. 여전히 AC밀란, 리버풀, 맨유,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브라질이 존재한다. 다만 보는 이들이 우리의 축구를 즐기길 바란다.”(챔스 직전 런던에서 가진 인터뷰) 이것은 지장의 계산된 여유라기보다는, 아직 노회한 언술을 펼치는 데 익숙지 않은 마흔 살의 진심일 것이다.

크루이프가 확립한 유소년 교육 시스템인 라 마시아(La Masia: 바르사 아카데미의 명칭)에서 과르디올라를 비롯해 이니에스타, 사비, 발데스, 피케, 세스크, 부스케츠, 페드로 등이 성장했으며, 그들이 바르셀로나의 영광을 재현했다.

아름다운 게임, “We Love Football”

웸블리 경기장에서 펼쳐진 2010-2011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리오넬 메시가 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 FC 바르셀로나는 2006년부터 5년간 유니세프와 협약을 맺어 유니폼 상의에 유니세프의 로고를 새겼고, 연간 수입의 0.7%를 기부했다.

물론 FC 바르셀로나 역시 역사의 ‘진공 상태’에서 공을 차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프로이고 그 구단 역시 프로 클럽이다. FC 바르셀로나의 특급 선수들은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고 있으며 ‘프로’의 성격 상 이곳에서 또 저곳으로 언제든지 옮겨갈 수 있다. 구단 역시 다른 클럽들에 비하여 비교적 ‘양호’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비수기 때는 전용기를 타고 막대한 수익을 찾아 지구 곳곳으로 ‘친선’으로 포장된 경기를 뛰고 있으며 때로는 우즈베키스탄의 기이한 클럽 ‘분요드코르’와 수상한 관계를 맺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바르셀로나를 일컬어 ‘아름다운 축구’’라고 주저 없이 표현하는 까닭은 최소한 그들의 스폰서십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 바르셀로나는 창립 때부터 2010년까지 유니폼에 스폰서 회사의 로고를 붙이는 것을 거부해왔다. 특히 2006년 7월 14일에 클럽은 천문학적 비용을 댈 용의가 있는 세기의 기업들 대신 유니세프와 5년 협약을 맺으면서 움직이는 광고판인 유니폼 상의에 유니세프의 로고를 새겼다. 그렇게 새기는 조건으로 바르셀로나는 오히려 클럽의 연간 수입의 0.7%(연간 평균 약 1900만달러)를 유니세프에 기부해왔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결단이다.

2010년, 바르셀로나는 창단 이후 최초로 터키항공으로부터 3년 동안 약 146억 원 규모의 후원을 받기로 했다. 터키항공은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원정에 필요한 보잉777 전용기를 지원하고, 그 동체에 바르셀로나 로고를 새겨넣고 상징색인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치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유니폼 상의의 그 신성하고도 아름다운 공간은 여전히 유니세프의 몫이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10-11 챔스 결승전이 펼쳐졌던 웸블리 경기장의 스탠드에 펼쳐진 아름다운 문구이다. FC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진정한 축구팬들은 ‘We Love Football’이라고 외쳤다.

국제축구연맹(FIFA) 행정부의 수뇌부가 각종 이권에 얽혀 재판정에 소환되거나 추문에 휩싸였던 시점이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도 온갖 스캔들(특히 카타르 월드컵 개최지와 관련된 스캔들)에 휘말려 차기 FIFA 회장 선거 자체를 포기한 상태였다. 온갖 추악한 스캔들의 진원지 제프 블래터 시대가 한번 더 연장되는 복잡한 축구 ‘정치’ 속에서 두 감독과 두 팀, 그리고 두 팀의 서포터스들은 “We Love Football”을 앞세웠고, 실로 그 경기는 그렇게 ‘아름다운 게임’이 되었다.

패장 퍼거슨은 종료 휘슬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일어나 과르디올라 감독의 손을 맞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잉글랜드의 저명한 축구 칼럼니스트 랍 휴스는 이 결승전을 두고 사뭇 들뜬 목소리로 “정의가 살아 숨 쉰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발행일

발행일 : 2013.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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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윤수 스포츠칼럼니스트

    1995년 문화비평지 계간 [리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스포츠와 문화 전반에 걸쳐 연구 비평 작업을 해왔다. 인문학 단체 [풀로엮은집]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kbsn스포츠, 마산mbc 등에서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 [축구장을 보호하라], [클래식, 시대를 듣다], [인공낙원 - 현대도시와 삶에 대한 성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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