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 살핀 노동자의 밥상, 그들의 노동을 닮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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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27. 오후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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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열차 기관사의 밥상. 달걀프라이를 얹은 흰쌀밥에 어묵볶음, 콩나물무침, 얼갈이배추무침, 배추김치, 청포묵까지 다섯 가지 찬이 담겼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우리나라에서는 안부를 묻는 말에 유난히도 ‘밥’이라는 단어가 많이 따라다닙니다. 상대방의 안전을 걱정할 때는 ‘밥은 먹고 다니니’,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에게는 ‘언제 밥 한번 먹자’, 아플 때는 ‘밥 잘 챙겨 먹어’ 등 수많은 인사말이 있습니다. 밥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언어의 중심에 있고 우리 삶을 정의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사진기획팀 김명진입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석달 가까이 24시팀 기자들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기획연재 ‘2020 노동자의 밥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15회에 걸쳐 노동자 40여명의 밥을 살피면서 그들의 삶도 안녕한지 물었습니다.

‘밥’은 그들의 노동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79살 박영분(가명)씨는 작은 손수레를 끌고 한두시간 동네를 돌며 고물을 수집합니다. 자기 키보다 더 높이 쌓인 고물을 끌고 고물상에 가면 5천원 안 되는 돈을 손에 쥡니다. 이걸 서너차례 반복한 고된 노동의 대가는 하루 1만5천원 남짓. 한끼 7천~8천원 하는 점심을 사먹지 못하는 박씨의 식당은 서울 논현동 뒷골목입니다. 그는 고구마 상자로 간이 의자를 만들어 앉아서 카스텔라와 두유로 한끼를 때웁니다. 교회의 무료급식이나 편의점·슈퍼에서 주는 유통기한이 다 된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겁니다. 그는 주변에서 건네는 작은 손길에도 연신 감사하다고 합니다.

박영분씨가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골목길에서 폐지로 만든 의자에 앉아 슈퍼에서 얻은 카스텔라 빵과 두유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밥’은 시간입니다. 밥을 먹으려고 일한다고 하는데, 일을 하기 위해서 끼니를 때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새벽배송을 하는 쿠팡 노동자 조찬호씨는 밤 10시에 출근해 이튿날 아침 7시까지 일을 끝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 뛰면서 배송하는 그는 탄산음료로 밥을 대신합니다. 대리운전기사 김병운(가명)씨는 대리운전 앱으로 콜을 잡기 위해 휴대폰을 두개 가지고 다닙니다. 심야에 김씨는 24시간 분식집에서 ‘재빨리 해치울 수 있는’ 김밥과 라면을 시킵니다. 밥을 먹는 중에도 계속 휴대폰을 봐야 합니다. 두 사람의 밥인 탄산음료와 분식은 시간의 다른 이름입니다.

배송노동자 ‘쿠팡맨’ 조찬호씨가 지난해 12월17일 새벽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 한 아파트 단지에서 새벽배송을 하던 중 콜라를 마시고 있다. 밤 10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일하는 조씨는 시간 안에 배달을 마치기 위해 밥 대신 탄산음료로 당을 보충하면서 일한다.


‘밥’은 고된 일을 마친 노동자들을 연결하는 끈입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어촌계 해녀들은 바다에서 하루 4~5시간을 보냅니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속에 들어가고 나오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고된 노동을 마친 해녀들은 마을회관에서 고기국수와 김치로 같이 식사를 합니다. 하루의 위로 같은 밥입니다. 매일 새벽 4시 강남으로 가는 6411번 버스는 청소노동자들로 가득 찹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작은 장터가 벌어집니다. 매일 같은 버스를 타 서로 잘 아는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김을 거래합니다. 그렇게 거래된 김과 각자 준비한 반찬이 청소노동자의 아침과 점심 식탁에 오릅니다. 밥은 해녀들과 청소노동자들 서로를 강하게 연결하는 끈입니다.

물질을 마친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어촌계 해녀들이 2월20일 오후 하례리 바닷가에서 소라와 홍해삼이 든 망사리와 테왁을 들고나오고 있다.


‘밥’은 향수를 달래는 치료제입니다. 캄보디아 출신 농촌 이주노동자들은 차가운 컨테이너 숙소에서 지내면서 주 6일 이상 일합니다. 고된 노동을 위로하기에 고향의 음식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들은 향수병을 앓을 때 생선을 말려 만든 ‘뜨라이뚜어’를 컨테이너에서 요리해 먹습니다. 그리운 고국을 찾은 고려인들은 떠나온 고향이 생각나면 ‘잔치국수’를 먹습니다. 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듭니다. 뜨거운 육수 대신 차가운 육수를 사용합니다. 고명으로 돼지고기, 양배추, 토마토 등을 넣습니다. 여러나라 조리법이 뒤섞인 ‘짬뽕 잔치국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의 삶을 말해줍니다. 고국이 낯선 고려인들은 잔치국수에서 동질감과 위로를 동시에 얻습니다.

고려인 이타마라씨의 가족이 지난해 12월26일 저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집에서 우즈베키스탄 방식의 국수를 만들어 먹고 있다. 고려인들은 차가운 물에 간장, 식초, 설탕, 소금, 허브 같은 오크로프 등을 섞어 육수를 만든다. 양배추무침, 김치, 달걀, 오이무침, 가지볶음, 돼지고기볶음 등을 고명을 면 위에 올린 뒤 육수를 부어 먹는다.


‘밥’은 동반자입니다. 철도기관사 유흥문씨는 36년을 길 위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는 아침 9시께 수색역 구내식당에서 싸준 도시락을 들고 무궁화호에 오릅니다. 김치와 콩나물무침 등이 담긴 일회용 도시락과 플라스틱 국통입니다. 철로를 함께 달려온 도시락은 남은 길을 달릴 에너지를 공급해 줍니다. 태백의 광부 김대광씨도 도시락을 구내식당에 준비합니다. 검은 봉지에 담긴 도시락은 깊이 600m 막장까지 같이 내려갑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탄가루가 날리고 땀은 비 오듯이 흐르는 막장의 작업, 탄가루를 뒤집어쓴 김씨가 뜨는 흰밥은 검은 얼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도시락은 멀고 깊은 노동에 동행하는 벗입니다.

강원도 태백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광부 김대광씨가 2월25일 오후 탄광 휴게실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노동자의 밥은 각자의 노동환경에 맞춰져 있습니다. 밥은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다른 날을 살아낼 힘을 줍니다. 취재를 하면서, 꼬박꼬박 챙겨 먹는 노동자의 한끼는 오늘도 ‘안녕’하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밥은 먹었니?” 오늘 하루 일을 마친 당신께 전하는 인사입니다.



                                                               글·사진 김명진 사진기획팀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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