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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에도 불밝힌 울산 정유단지

이재철 기자
입력 : 
2017-10-05 17:57:02
수정 : 
2017-10-05 18: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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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꺼지지않는 수출용광로 "한국경제도 활활 타올랐으면"
"공장 안에 있어도 요즘 세계 정유·화학 경기가 좋다는 걸 피부로 느껴요. 일감이 없어 휴직에 들어가는 업체들에 비하면 명절에 이렇게 일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죠."

한국의 산업수도로 불리는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 이곳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태화강을 경계로 남쪽에 자리잡은 SK이노베이션 울산콤플렉스(CLX)는 국내 최대 정유·화학단지다. 830만㎡ 땅에 자리잡은 SK이노베이션 100여개의 정유·화학 공정 가운데서도 자타공인 '심장부'는 바로 제1중질유분해공장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주현 선임대리는 "일찌감치 명절 연휴를 반납했다"며 "현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는 게 이제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하지만 그는 1995년 입사 후 단 한 번도 설·추석 명절에 가족·친지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일반 제조업체와 달리 정유·화학산업은 연중 내내 공장이 쉼없이 돌아가야 하는 '초민감' 장치산업이어서다. 이를 '운명'이라고 표현한 그의 말에는 23년차 베테랑 오퍼레이터가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삶의 고단함이 묻어 나왔다.

명절 당일이면 그와 생산1팀 동료들은 "울산 콤플렉스의 불이 꺼지면 한국 정유산업이 멈춰서는 것"이라며 서로를 다독이며 땀을 흘린다. 실제 울산 콤플렉스는 하루 최대 84만 배럴의 원유를 처리하며 연간 770만t의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정유·석유화학 산업의 전초기지다. 석유 제품은 물론 아로마틱·올레핀·합성수지 등 화학제품, 윤활기유·윤활유 등을 만들어내며 60% 이상을 해외로 수출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SK이노베이션과 소속 계열사인 SK에너지·SK종합화학·SK루브리컨츠 소속 직원 3000여명 모두가 대한민국의 수출역군이다.

그와 제1중질유분해공장 동료들은 최근 정유업계의 호황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해외 경쟁 정유업체들이 설비를 폐쇄하고 정기 보수에 들어가면서 한국 정유사들이 큰 수혜를 입고 있다. 여기에 정제마진까지 좋아져 '슈퍼사이클(장기호황)' 국면에 돌입했다. 지난 8월 미국 허리케인 '하비' 여파로 미국발 글로벌 공급 비상등까지 켜졌다. 경쟁사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보다 많은 제품을 수출하며 수익 극대화를 노리고 있는 셈이다.

한 대리는 "공장 안에 있지만 분해공정에서 디젤을 뽑아내는 양이 많아지고 산단 주변에 움직이는 유류 수송차량들이 크게 늘어 업계 호황을 몸으로 실감한다"며 "정유산업의 심장부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그는 젊었을 때만해도 자신이 울산 국가산단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자계산학을 공부하고 취업을 고민할 즈음 주변에서 "울산에 한국에서 제일 큰 기름공장이 있다던데 여기는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사지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해 23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가 몸담은 일터가 한국에서 가장 큰 '기름공장'이라는 게 뿌듯하다.

초민감 장치산업에서 일하는 그의 처지를 이해하듯, 명절을 앞두고 주변 친지와 지인들이 보내오는 문자 메시지도 한결같다. 명절에 사고 없이 그저 '안전'하게 일하라는 것. 그는 "23년 베테랑이지만 아직도 7명의 팀원 중 서열이 뒤에서 둘째"라고 귀띔했다. 극도로 민감한 정유설비를 제대로 익히려면 기본 매뉴얼을 습득하는데만 최소 5년이 소요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업계 호황에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만큼 바빠지자 직원들은 내년초 사측의 성과급에도 관심이 적잖다. 기본급의 100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며 직원들을 격려했던 사측의 행보가 내년 초에도 똑같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고 이곳 노조가 회사에 막무가내식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진 않는다. 오히려 SK이노베이션과 각 계열사 직원들은 한국의 노사관계에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꼽힌다. 이들은 최근 대기업 최초로 사측과 임금인상률을 물가에 연동시키로 합의해 주목을 받았다.

매년 임금 인상을 놓고 발생하는 극한 노사대립을 피하려 노조가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뿐만 아니다. 노조는 기본급의 1%를 떼어내 사회적 상생을 위해 기부금으로 쓰기로 했다. 직원들이 기본급의 1%를 자발적으로 내면 회사도 동일한 액수를 출연하는 매칭 그랜트(Matching Grant) 방식이다. 한 선임대리는 "솔직하게 우리 직종의 임금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조합원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1%를 어려운 분들을 위해 돕는다는데 모두 기꺼이 찬성했다"고 전했다. 더 놀라운 건 물가연동 아이디어를 낸 측이 회사가 아닌 노조였다는 점. 올해 1월 취임한 이정묵 SK이노베이션 노조위원장은 물가연동 방안을 노사관계 선진화의 출발점으로 보고 조합원들의 동의를 구했다. 생산3팀의 김진호 선임대리(45)는 "업황이 좋은 우리도 언제든지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노사관계부터 자발적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콤플렉스 내 SK에너지 수출부두에서 보이는 건너편 조선소 시설은 일감이 없어 한산한 모습이었다. 여기에는 스웨덴 말뫼에서 1달러를 주고 들여와 '말뫼의 눈물'이라 불리던 1600톤급 대형 크레인도 있다. 물론 이 거대한 크레인도 멈춘 상태다. 한 대리는 "우리 업종 뿐 아니라 한국 경제 전체가 이렇게 부침 없이 뜨겁게 타올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울산 =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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