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권, 두 차례 올림픽(2000·2004) 출전 두 개 메달(금·동) 획득한 배드민턴 레전드

-“‘배드민턴 함께 하자’는 김동문의 제안이 내 인생을 바꿨죠”

-“1997년 전영오픈 우승하고 ‘우승의 맛’을 알았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후 잠시 방황한 시간이 있었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경기 당일까지 허리디스크로 고생 많았습니다”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하태권(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하태권(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천안]

“발가락을 꼬집는데 아무 느낌이 없어요. 감각이 사라진 겁니다.”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배드민턴(남자 복식) 금메달리스트 하태권의 회상이다.

하태권은 김동문과 ‘찰떡 호흡’을 자랑하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까지 허리디스크로 고생했을 만큼 과정은 힘겨웠다. 그만큼 값진 금메달이다.

하태권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게 당시가 처음은 아니다.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에선 동메달(남자 복식)을 목에 걸었다. 1999년 덴마크 코펜하겐 세계선수권,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두 차례 아시아선수권(1999·2002) 등에선 금메달을 목에건 한국 배드민턴의 레전드다.

엠스플뉴스가 1992년 12월 7일부터 2004년까지 한국 배드민턴을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한 하태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절친’ 김동문의 제안, 하태권의 인생을 바꾸다 -

올림픽 금메달을 합작한 하태권(사진 맨 왼쪽), 김동문(사진 맨 오른쪽)은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사진=엠스플뉴스)
올림픽 금메달을 합작한 하태권(사진 맨 왼쪽), 김동문(사진 맨 오른쪽)은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사진=엠스플뉴스)

지난해까지 요넥스 배드민턴단 감독직을 맡았습니다. 코로나19로 힘겨운 한해입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요넥스 배드민턴단 감독직을 내려놓으면서 전국 일주를 기획했어요. 동호회 분들을 만나 원포인트 레슨을 진행하고 강의도 하려고 했죠. 집도 천안아산역 쪽으로 이사했습니다. 여기가 딱 중간이거든. 코로나19로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불러주는 곳이 없어요(웃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세계인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버렸어요. 마스크 없인 외부 활동이 불가능한 시대가 왔죠. 운동할 때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죠. 배드민턴 선수, 코치, 감독으로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 중이에요(웃음).

앞으로도 배드민턴과 함께하는 것 아닙니까.

배운 게 배드민턴밖에 없어요. 잘할 수 있는 게 배드민턴뿐이죠(웃음). 지금도 라켓을 잡고 셔틀콕을 강하게 내리치면 짜릿합니다. 재밌어요. 코로나19가 극심해지기 전엔 동호인들과 경기하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감독님, 이전 같지 않네요’라고 해요.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금세 누그러집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배드민턴을 즐기죠.

배드민턴은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첫 인연은 어떻게 맺은 겁니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합작한 원광대학교 김동문 교수와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초등 3년에 짝꿍이었어요. (김)동문이가 ‘배드민턴이란 스포츠가 있는데 아주 재밌다’며 ‘함께 하자’고 제안했죠. 그게 배드민턴과 첫 인연이었어요.

초등 시절엔 야구, 축구 등 프로스포츠를 많이 즐기지 않습니까.

친구들과 뛰어노는 걸 좋아했어요. 방과 후 야구, 축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았죠. 동문이가 제안한 배드민턴에도 흥미가 있었어요. 배드민턴을 자주 접한 건 아니지만 친한 친구와 함께하면 재밌을 것 같았죠.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초등 2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과속하는 차에 치여 다리를 크게 다쳤죠. 12주 동안 병원에만 있었어요. 퇴원 후에도 집과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죠. 그때 다친 게 배드민턴부 입단 테스트에 영향을 미친 거예요. 코치님이 발을 절뚝이는 절 본 겁니다. ‘(하)태권이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을 들었죠.

초등 시절 함께 배드민턴을 했던 김동문(사진 왼쪽부터), 조진호, 하태권(사진=엠스플뉴스)
초등 시절 함께 배드민턴을 했던 김동문(사진 왼쪽부터), 조진호, 하태권(사진=엠스플뉴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시작이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배드민턴부에 들진 못했지만 크게 실망하지 않았어요. ‘다음에 또 도전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4학년 때 다시 배드민턴부를 찾아갔죠. 코치님에게 말했어요. “동문이랑 배드민턴이 꼭 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그랬더니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의아했어요(웃음).

1년 전과 달리 테스트도 없이 배드민턴부에 든 겁니까.

선수가 부족했던 거야(웃음). 코치님이 “열심히 해”란 말만 했어요. 그때부터 배드민턴 선수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1998년 박찬호에 이어 미국 프로야구(MLB) 보스턴 레드삭스에 진출한 조진호 아시죠? (조)진호도 처음엔 배드민턴을 했어요. 초등 5학년 때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야구로 전향했죠. 재미난 추억입니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즐겼습니다. 친구와 야구부로 함께 갈 생각은 안 했습니까.

배드민턴이 좋았어요(웃음).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닙니다. 친구들보다 더 연습해야 경기에 나설 수 있는 학생선수였죠. 하지만, 팀이 아주 잘했습니다. 소년체전 나가면 항상 우승하는 팀이었죠. 그런 팀에 있다는 게 좋았어요. 또 있습니다.

어떤?

제가 전라북도 전주 출신입니다. 배드민턴을 시작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서울, 부산, 대구 등을 배드민턴 때문에 가본 거죠. 63빌딩 처음 갔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 알아요? 학교에서 배드민턴을 제일 잘 친 건 아니지만 잘하는 친구들과 한 팀에 속해 전국을 여행한다는 게 아주 좋았습니다. 그 맛에 못 놓은 거죠(웃음).

운동부 생활이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운동은 할 만했어요. 몸이 힘든 건 참고 견디면 되니까. 문제는 운동부 특유의 문화였습니다. 매일 혼났어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체벌도 흔했죠. 내가 선택해서 시작한 배드민턴인 까닭에 꾹 참았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하고 있네요(웃음).

-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고교생 하태권, 태극마크를 달다 -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를 휩쓴 김동문(사진 왼쪽부터), 하태권(사진=엠스플뉴스)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를 휩쓴 김동문(사진 왼쪽부터), 하태권(사진=엠스플뉴스)

태극마크는 언제 처음 달았습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어요. 1992년 12월 7일입니다.

날짜를 정확히 기억합니다.

국가대표가 되면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좋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했습니다(웃음). 부모님이 엄청나게 좋아하셨죠. 당시 아버지께선 ‘국가대표 하태권, 세계로 훨훨 날아라’라고 종이에 적어두셨어요. 그걸 지금도 간직하고 계시죠. 개인적으론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보다 1997년 전영오픈에서 우승했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전영오픈이요?

영국 웸블리에서 개최되는 세계선수권 대회입니다. 1899년에 시작된 대회로 배드민턴 대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죠. 이 대회 복식조에 강경진 선배와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메이저 대회 우승을 맛본 거죠. 그때부터 세계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배드민턴이 재밌다’는 이유로 쭉 해왔어요. 그러던 중 세계가 인정하는 대회에서 우승해보니 ‘즐기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정상에 섰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이 기분을 자주 느껴보고 싶었죠.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죽어라 운동만 했습니다(웃음).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한국 배드민턴 전설로 불리는 하태권, 김동문 등 많은 선수가 단식이 아닌 복식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수 있는 단식 욕심은 없었습니까.

한국 선수들이 복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배드민턴은 손목 기능이 아주 좋아야 해요. 몸이 유연해야 하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선수들이 강세인 이유입니다. 유럽 선수들은 유연성이 조금 떨어지지만 힘이 남다르죠. 한국 선수들은 손목 기능, 유연성, 힘 등을 고루 갖춘 대신 특출난 게 없어요. 그런 점 때문에 복식이 유리한 겁니다.

한국 선수들에게 복식이 유리한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인의 강점은 성실성이에요. 배드민턴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식은 훈련이 성적을 보장해요. 고된 훈련을 반복할수록 세계 정상에 가까워지는 거죠.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선수들이 하루 5시간 훈련한다고 하면 한국은 7시간 이상을 합니다. 눈빛만 봐도 통하는 조직력으로 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거예요. 복식은 실수가 승부를 가르거든.

실수가 승부를 가른다?

누가 더 잘하느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승에 도전하는 복식팀들은 실력이 비슷해요. 실수를 적게 하는 팀이 마지막에 웃는 겁니다. 동문이와 저도 그렇게 세계 정상에 섰어요(웃음).

배드민턴 국가대표로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하태권(사진 왼쪽부터), 김동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배드민턴 국가대표로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하태권(사진 왼쪽부터), 김동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하태권의 복식 파트너가 처음부터 김동문 교수였던 건 아니었습니다.

첫 파트너는 유용성 선배였어요. 유용성 선배와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었죠. 1996년부턴 강경진 선배와 호흡을 맞췄고요. 동문이랑 파트너가 된 건 1999년부터입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쭉 함께했죠.

복식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선 코트 안팎에서의 호흡과 배려가 아주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선배들과 호흡을 맞출 땐 제가 모든 걸 맞췄죠(웃음). 불편하거나 안 맞는 건 없었어요. 경기에서 승리하는 데만 집중했죠. 동문이는 초등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입니다. 갈등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 일 거에요. 친구인 까닭에 더 많았죠. 하지만, 서로 배려를 많이 했어요. 우리가 다른 걸 인정하고 최상의 경기력을 내는 데만 힘을 쏟았죠. 사실 잘 나갈 땐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잘 나갈 땐 아무 문제가 없다?

모든 스포츠가 같을 겁니다. 성적이 좋으면 잡음이 없어요. 문제가 보이지 않죠. 준비한 만큼 성적이 안 나올 때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럴 때 내 파트너를 얼마만큼 신뢰하고 배려하느냐가 중요해요. 서로를 믿어야 어려운 시기를 금방 이겨낼 수 있거든. 동문이가 날 배려해주고 믿어준 까닭에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에 서지 않았나 싶어요. 고마운 친구지.

실제로 하태권-김동문은 최고의 호흡을 자랑했습니다.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전엔 9차례 국제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두려울 게 없었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직전까지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했어요. 올림픽 금메달을 확신했죠. 자만한 겁니다(웃음). 준결승까진 거침없이 올라갔는데 결승 무대를 밟는 데는 실패했어요. 지금도 그날의 경기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첫 세트에서 9-3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한 번의 실수 이후 순식간에 따라잡혔죠. 그리고 졌습니다. 몸이 굳어서 안 움직이더라고. 동문이에게 미안했죠.

금메달은 못 땄지만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동문이가 다 했어요(웃음). 전 결승 진출 실패 후 집중을 못 했어요. 요즘 친구들 말로 멘탈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여기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어떤?

동문이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 복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병역 혜택을 받은 상태였죠. 전 아니었어요. 여기서 패하면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무조건 따야 했습니다. 동문이랑 더 이상 호흡을 맞추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흔들린 거예요. 동문이가 제 몫까지 해주지 않았다면 다음 올림픽 출전을 장담하지 못했을 겁니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후 조금 방황했었죠” -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김동문(사진 왼쪽), 하태권(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김동문(사진 왼쪽), 하태권(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진 못했지만 값진 동메달을 땄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전까진 운동만 했습니다. 운동하고 잠자는 게 일과의 전부였죠.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건 이후 이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웃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늘었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올림픽 전엔 한 달에 한 번을 쉬었어요. 시드니를 다녀오고 나선 일주일에 한 번 친구를 만났죠(웃음). 긍정적으로 보면 여유가 생긴 겁니다.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볼 땐 해이해진 거고. 그런데 금세 제 자리로 돌아왔어요.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마음을 다잡았죠. 마지막일 수 있는 올림픽에선 꼭 정상에 서고 싶었어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준비는 수월했습니까.

예상 못한 부상이 올림픽 출전을 가로막을 뻔했어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그해 8월 13일 개막해 29일 막을 내렸습니다. 올림픽 개막을 4개월 앞두고 허리가 심하게 아팠어요. 디스크였죠. 6월까지 코트에 못 들어갔습니다. 발가락에 감각이 없을 정도였죠. 올림픽 출전권은 따놓은 상태에서 고민이 많았어요.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죠.

허리 디스크를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동문이가 “7월부턴 운동을 조금씩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어요. 더 기다리면 올림픽 출전이 어려웠던 거죠. 허리 상태가 좋아지진 않았어요. 올림픽 기간에도 발가락을 꼬집으면 감각이 없었습니다(웃음). 배드민턴 인생의 마지막 올림픽이잖아요. 꾹 참고 훈련에 집중했죠. 그리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허리 디스크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배드민턴을 하면 허리를 과하게 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게 쌓이고 쌓인 거죠. 개인적인 관리도 소홀히 했고요. 재밌는 건 올림픽을 앞두고 찾아온 위기가 또 있었다는 겁니다.

허리 디스크보다 더한 위기가 있었습니까.

동문이는 혼합복식을 병행했어요. 올림픽 대진표를 보고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복식 준결승과 혼합복식 결승전 일정이 겹친 거예요. 동문이가 혼합복식 결승에 오르면 남자복식을 포기해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당시 김동문-라경민(혼합복식) 조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 후보 1순위였죠. 그런데...

네?

김동문-라경민 조가 올림픽 8강에서 탈락하는 대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동문이가 남자 복식에만 집중하게 된 거죠. 문제는 동문이의 컨디션이었습니다. 4년 전 올림픽 때와 달리 동문이가 흔들린 거예요. 지금까지 쭉 동문이만 믿고 선수 생활을 해왔는데 ‘위기’다 싶었죠(웃음).

어떻게 됐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동문이는 천재예요. 저와 비교할 수 없는 선수입니다. 금세 제 컨디션을 찾고 경기에만 집중하더라고. 저 또한 동문이를 위해서라도 평소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죠. 부상은 잊고 한 경기 한 경기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올림픽 정상에 설 수 있었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에 선 김동문(사진 왼쪽부터), 하태권(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에 선 김동문(사진 왼쪽부터), 하태권(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올림픽 금메달은 모든 운동선수의 꿈입니다. 어땠습니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나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 서서 들었던 애국가를 잊지 못해요.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에서 듣는 애국가는 어떻게 다릅니까.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부터 울컥했습니다.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올림픽 결승전까지 하나하나 생각났어요. 세계 최고 자리에 올랐다는 기쁨, 언제 어디서나 응원을 아끼지 않은 가족들에 대한 감사함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죠. 이때의 감정을 말이나 글로 100% 표현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이겁니다.

뭡니까.

이제 ‘내 세상이다’ 싶었어요(웃음). 이 환상은 3개월 만에 깨졌죠. 동문이는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어요. 저도 세계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은퇴하려고 했지만 당시 대한배드민턴협회에서 만류했어요. “다 은퇴하면 후배 양성은 누가 하느냐”는 게 이유였죠. 국가대표 김중수 감독께선 흥미로운 제안도 했습니다.

하태권(사진 오른쪽)은 김동문을 만난 게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한다(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하태권(사진 오른쪽)은 김동문을 만난 게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한다(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흥미로운 제안이요?

“네가 해달라는 거 다해주겠다”는 겁니다. 올림픽이 막 끝났을 때에요. 인터뷰 요청이 끊이질 않았죠. 감독님이 “팀 신경 쓰지 말고 일정 소화하라”고 했어요. 자유는 딱 석 달 허용됐습니다(웃음).

3달이요?

2004년 10월 충청북도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마치고 ‘꿈같은 시간은 더 이상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웃음). 한 잡지사에서 전국체전을 마치고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평소처럼 감독님에게 말했죠. “인터뷰 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감독님이 딱 한 말씀 하시더라고.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어떤 말을 했습니까.

“또? 운동을 하려면 하고 말라면 말아”라고 하시는 거예요(웃음).

뭐라고 답했습니까.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데 “알겠습니다”라고 했죠. 바로 잡지사에 전화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인터뷰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죠. 이후 감독님 말만 따랐습니다(웃음). 그렇게 1년 더 선수 생활을 한 뒤 은퇴했어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후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었던 까닭에 설렁설렁 한 거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후의 선수 생활은 은퇴 후 삶을 기획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놀고 싶었어요(웃음). 또 어릴 때부터 어딘가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습니다.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기고 싶었죠.

즐겼습니까.

많이 돌아다녔습니다(웃음). 가족과 21박 22일로 미국 서부를 여행한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차를 빌려서 다녔습니다. 영어는 잘 못 하지만, 손짓·발짓으로 소통했죠. 세계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 그랜드캐니언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어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자 추억이죠.

은퇴 후 코치, 감독 생활을 했습니다. 지도자의 눈으로 평가하는 하태권은 어떤 선수입니까.

김동문, 유용성, 이동수. 저와 함께 태극마크를 달았던 선수입니다. 개인 실력만 보면 제가 가장 떨어져요. 겸손한 게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그런데도 두 차례 올림픽에 출전해 2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건 성실함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도 있었죠. 전 특출 난 선수는 확실히 아니었어요(웃음).

- “선수들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

은퇴 후 배드민턴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하태권(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은퇴 후 배드민턴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하태권(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부터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어요. 2015년 3월부터 지난해까진 요넥스 배드민턴단 감독을 역임했죠. 지도자를 하면서 느낍니다. ‘선수 때가 좋았구나(웃음)’라고.

선수 때가 좋았다?

감독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든 선수를 이해하고 챙겨야 하죠. 코치는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해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수 땐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 몸 관리만 잘하면 됐죠. 지도자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

처음엔 내 눈높이에서 선수들을 대했어요. 많이 후회합니다. 내가 선수 때 했던 걸 제자들도 당연히 할 줄 안다고 생각한 거에요. 선수들을 이해시키는 게 지도자의 역할인데... 이해를 못한 겁니다. 선수들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한 것도 아쉬워요. 선수들 앞에선 많이 웃질 않았던 것 같아. 그만두고 나니 아쉬운 게 하나둘 보이네요(웃음).

한국 배드민턴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제2의 삶에서 꼭 이루고 싶은 게 있습니까.

감독으로 복귀해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 행정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죠. 여러 가지 길을 두고 고민 중입니다. 전 배드민턴이 지금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배드민턴이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힘을 더하고 싶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고민하고 준비해야죠.

유튜브 활동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웃음). 처음엔 네일아트, 노래 따라부르기 이런 걸 해봤죠. 아무도 안 봐. 배드민턴 콘텐츠가 그나마 관심을 얻고 있어요. 안정된 삶보다 도전적인 게 좋습니다. 다양한 걸 경험하면서 성장을 이어가고 싶어요. 그래야 감독, 코치, 선수들을 이해하고 배드민턴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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