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월 춘천·수도포병여단 권예진 하사 엄마

사과의 빨간색이 짙어가고,맛은 총총 결실을 만들어갈 즈음에는 가족사진을 다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거실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군복이 잘 어울리고,군복 입었을 때 가장 멋진 남편과 학생인 아들과 딸이 있다.그런데 지금은 군인이 남편에서 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옷만 걸려있는 딸의 방을 볼 때면 가슴이 흐뭇하기도 하지만,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오기도 한다.딸은 작년 여름 육군 부사관에 합격했다.그리고 입대를 앞두고 이틀 전 혼자 씩씩하게 미용실에 가서 아주 짧게 커트를 하고 왔다.“엄마 나 헤어 스타일 어때.괜찮지?나름 이쁜 것 같아”

딸을 입대시키는 엄마의 마음은 쿵하고 내려앉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훈련소 입소 날 집에서 네 시간을 달려 도착한 전북 익산의 부사관학교에서 “에이.엄마 빨리 가.아빠 다녀올게요.” 아주 쿨하게 양성교육대 건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그 모습을 본 나랑 남편은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사라져버린 딸의 모습에 당황도 했지만,울지 않고 입소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딸의 옷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32년 전 옛날 내가 여군훈련소 입대했을 때,입고 온 옷을 차곡차곡 개어서 집으로 보냈던 기억을 더듬으면서…혹시나 잘 지낸다는 편지라도 한통 있을까 기대하면서…날마다 우편물을 확인했지만 어떤 것도 오지 않았다.나중에 알았지만 딸이 입대 준비를 철저히 해서 소포로 보낼 물건이 없었다고 한다.잘 있냐고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고,그렇다고 딸을 군에 보낸 엄마가 나약하게 전화를 할 수도 없고…그냥 잘 있을 거란 믿음을 갖고 무사히 훈련 잘 견디어내라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 이주일 정도를 그렇게 밤이나,낮이나 딸 생각만 하며 지내다 보니 드디어 알 수 없는 서울 02번호가 찍힌 전화가 왔다.“엄마 나 짧게 통화해야 돼.뒤에 기다리는 사람 많아.나 잘 있고,자주 전화할게”,“아픈데 없니?밥은 잘 먹니?훈련이 힘들지는 않니?숙소는 괜찮니?”,“엄마 다 좋아.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끊어”

궁금한 것이 많은데 전화를 1분도 넘기지 못하고 끊는 딸이 야속하기도 하지만,씩씩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었다.애간장이 녹는 듯한 기다림이었는데 마음이 놓였다.이틀에 한 번씩 인터넷 편지를 쓰면서 위로 받다보니 추석이 되었고,딸은 처음으로 외박을 나왔다.얼굴은 많이 탔지만,건강해 보였다.갈비와 냉면이 무척 먹고 싶었다는 딸은 3인분의 갈비와 냉면을 먹고 얼굴이 편안해졌다.그리고는 훈련 중 어려웠던 일,힘들었던 일,동기들과 교관님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집에 오자 엄마가 해준 음식은 “정말 최고로 맛있다”면서 아침 7시부터 일어나 아침밥을 먹었다.낮 12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고 늦잠 자던 딸의 변화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루를 쉬고 다시 부사관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딸은 짜증내고,화를 내기 시작했다.기어이 춘천역까지 가는 십여 분 동안 말도 없이 묵비권을 행사했다.그렇게 힘든 모습으로 훈련을 받으러 갔다.

“엄마 화내서 죄송해요.차 뒷좌석에 봉투 있어요.맛있는 거 사드세요” 딸이 부대로 복귀하면서 보낸 문자를 보고는 안방에서 한참을 울었다.봉투에는 삼십만원이라는 큰돈이 들어있었다.아마도 훈련수당 받았던 것을 모아 두었나보다.얼마나 훈련이 힘들었으면,얼마나 부대에 돌아가기 싫었으면 그랬을까?내가 억지로 군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됐다.

어려서부터 별명이 ‘이쁜이’였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대학에서 음악,그 중에서도 플루트를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내신성적도 괜찮고,국립대는 갈 수 있는 성적을 유지하기에 마음 놓고 있었는데,참 어려운 숙제를 내 놓았다.

남편과 많이 고민하다가 플루트 전공은 하되 유학보낼 가정 형편은 안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더불어 대학 졸업 후 군악장교를 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했다.딸은 남은 고교 시절을 학교 밴드부를 하고,레슨을 받으면서 즐겁게 지냈다.늦게 전공을 준비하느라 하루에 6시간 이상의 연습을 참아내고,주말에는 하루 종일 연습으로 힘들게 입시 준비를 했다.

기울인 노력이 있어서인지 K대 음악전공으로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어느 누구보다도 즐거운 대학생활을 즐겼다.단과대 체육대회 선수로 열심히 운동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면서 대학생활을 알차게 잘 보냈다.화려한 졸업연주회를 끝으로 대학에서는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고 졸업했다.

하지만 졸업 후의 진로는 준비하지 않았던 것 같다.억지로 엄마와 아빠의 권유로 대학교 4학년 때 군악장교 시험에 도전하였다.1차는 쉽게 통과했지만,관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리고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시 군악장교 시험에 도전했다.다시 2차까지는 합격했지만 넓지 않은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두 번의 실패 후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봄이 되자 부사관 시험에 도전해보겠다고 했다.이번엔 군악이 아닌 일반병과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엄마는 상관없으니 “네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면 도전하라”고 말했다.백수 생활이 길어지자 정말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한국사능력시험 1급도 합격하고,토익 준비도 하고,매일 2시간 이상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는 모습도 보였다.봄에 시험을 보고 여름에 1차 합격 후,2차 신체검사,3차 체력 및 면접시험을 치르고,드디어 합격!백수생활 탈출과,준비기간의 터널이 힘들었는지,자신이 대견했는지 딸은 무척 좋아했다.

입대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아 추억을 남기고자 가족여행을 떠났다.동해에 가서 수영도 하고,회도 실컷 먹고,콘도에서 1박을 하면서,엄마의 여군훈련소 생활과 3년간의 군 생활,아빠의 30년 군 생활 동안의 어려움,보람있었던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눴다.입대 시 필요한 준비물도 알아서 척척 준비하면서 대견스러움을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부사관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나는 30년 전 부모님께서 농사 지으시면서 대학 학비 마련에 버거워하시는 모습과 병무청의 여군모집 포스터에 반해서 여군에 지원했고,3년 동안 복무했다.육군사관학교에서 여군하사로,남편은 헌병하사로 만나 결혼을 했다.아들·딸 낳아서 키우고,남편 군 생활 뒷바라지 하는 군인 아내로 산 삼십년은 쉽지 않았지만,보람 있었다.

늘 훈련과 부대일로 바쁜 남편 때문에,연년생 아들딸이 같이 아파서 한명은 업고,한명은 안고,울면서 병원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같이 떠올랐다.훈련하면 새벽에 나가고,밤늦게 들어오고,일주일씩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밤 9시에 한번,11시에 한번,야간자율학습 끝나는 두 아이를 데리러 다녀올 때의 피곤함과 힘들었던 시절이 스쳐지나간다.그래도 남편은 정말 군복이 잘 어울렸고,제일 멋있는 복장이었다.퇴근하고 현관에서 전투화를 벗는 모습을 보면,세상에서 가장 큰 일을 하고 퇴근한 모습의 훌륭한 가장이었다.

그래도 딸이 아빠의 뒤를 이어서 군인이 되었다고 하니,친구가 말하기를 “아빠를 많이 존경했나보다.그러니 뒤를 이어서 힘든 군인의 길을 가는 거야.결혼 성공했네.”

군인이 좋은 직업이라고 말했을 뿐,강요는 하지 않았는데 딸은 아빠,엄마의 뒤를 이어서 여군이 되었다.힘든 훈련소 생활을 잘 마치고 부대 배치를 받았다.철책에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서 걱정은 덜 되었지만 25년 동안 정말 편하게 부모 품에서 자라던 아이가 경직된 군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을까?업무를 잘 소화해 낼 수 있을까?힘든 훈련을 감당할 수 있을까?매일 매일을 걱정으로 보냈다.바쁘고 힘들다고 할까봐 전화도 마음놓고 할 수 없었고,군에 딸을 보낸 엄마의 마음은 걱정으로 꽉 차있었다.가끔씩 전화하면,같이 근무하는 선배가 깍듯이 대해주어 좋았고,병사들과 함께 작업하는데 잘해서 칭찬을 들었고,새벽 일찍 출근할 때도 있어서 피곤하지만 많이 배워가고 있고,잘 적응하니 엄마는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도리어 위로 하는 딸이다.군 생활 30년을 한 남편은 더 좌불안석이다.상관들한테 잘 해야 하는데,업무는 눈치껏 하고 있는지,선임이나 병사들과 마찰은 없는지 매일 알아보라고 눈치를 준다.딸이 힘들어할까봐 전화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딸에게 전혀 우리 부부가 걱정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엄마 나 은행에 나라사랑적금 들어가고 있어요.” 늘 자랑하고,전화로 조근조근 자기 생활을 알려주는 딸을 보면서 든든함이 느껴졌다.내가 딸은 정말 잘 키웠구나.이젠 어디 가서도 자랑스러운 여군하사라고 자랑해도 될 것 같았다.부대로 가서 근무한지 두어 달이 지났을 즈음 뜬금없이 전화해서는 “엄마,나 상 받아요.군단장 상”

“진짜, 어떻게?”,“설마”,“신입간부 시험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어요”,“어이 우리 권하사! 제법인데.훌륭하다 훌륭해.역시 엄마 딸,아빠 딸!”

이렇게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권하사가 되어있다.남편의 군복에 마음 설레고 행복하던 마음은,이제 권예진 하사 사랑하는 내 딸 군복 입은 모습에 설레고 행복하다.다음에 휴가 나오면 멋진 권하사는 군복 입고,아빠는 양복을 입고,가족사진을 찍어서 우리 집 거실에 걸어놓아야겠다.지금 계급은 하사지만 대한민국 군의 중추 역할을 하면서 20년,30년까지 쭉 어느 누구보다 더 훌륭한 군인의 자리를 지킬 것을 믿는다.“사랑한다.권하사”

[수상소감]군인으로,군인의 아내로,군인의 엄마로…힘들었던 마음의 보상

송계월
송계월

작년 봄 대추나무 한그루를 심었다.올해 봄 얼어 죽은 줄 알았는데, 늦게 잎이 피더니 보란 듯이 잘 자랐다.죽은듯하다 살아나서 대추가 열릴 것을 생각조차 못했다.그런데 며칠 전 딱 한 개의 대추가 달려있는 것을 발견했다.아주 크고 튼실한 대추였다.

군에 간지 일 년 남짓 된 딸이 생각났다.대추나무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군인이 되어가느라 얼마나 애쓰고 힘들였을까? 강원도민일보에서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딸을 군에 보내고 애태우고 힘들었던 마음에 보상해주는 선물이었다.추석을 딸과 함께 하지 못해 울적했던 마음에 큰 위로가 됐다.대추나무는 해를 거듭할수록 튼실한 열매를 더 많은 열매를 맺어줄 것이다.사랑하는 딸도 이십년간,아니 삼십여 년 이상을 군에서 대추나무처럼 많은 열매를 맺고 감사하는 일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군인으로,군인의 아내로,이제는 군인의 엄마로 살아가는 나에게 좋은 상을 주셔서 무척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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