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직장 생활, 억울함과 성취의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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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은 1년만 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10년 이상의 장기전으로, 그래야 한 직장에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 긴 시간 동안 매번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는 없다. 무대 뒤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할 때도 있다. 그 시기를 잘 견뎌야 한다. 무대 감독은 우리 생각보다 시야가 깊고 넓다. 그는 무대 위만이 아니라 무대 뒤는 물론이고 객석까지 살피기 때문이다.

▶공정한 평가는 모두에게 중요하다

직장인에게 가장 보람되고 기쁜 순간은 나의 노력과 성과를 회사가, 상사가 알아 줄 때다. 물론 모든 직장인이 매번 누가 알라고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노력, 능력이 발휘되어 성과를 얻었을 때 회사가 승진, 연봉 인상 등으로 보상해 준다면 성취감은 물론이고 일을 하는 동력을 얻는다. 반면 죽도록 일만 하고 그 공은 다른 사람 차지가 되는 경우는 좌절하고 배신감마저 느끼는 순간이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의욕은 떨어지고 ‘내 미래’가 직장에서 보장될 수 있는지 근본적인 회의가 들기도 한다. 물론 지금처럼 투명한 시대는 부하와 동료의 공을 가로채는 얄미운 상사가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작든 크든 직장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은 부서별 인사 평가에서도 발생한다. S기업 박 부장은 매년 연말이면 고민에 휩싸인다. 부서원에 대한 인사 평가 때문이다. S기업의 인사 평가 시스템은 부서장을 제외하고 8명 안팎의 부서원 중에서 S등급 1명, A와 B등급 6명 그리고 C등급 1명을 필히 선별해야 한다. S등급으로 평가를 받으면 연말 보너스 300%에 승진이나 부서 이동에서도 가점을 받는다. A와 B등급은 기본 지급액인 100%를 보너스로 받는다. 큰 혜택도 없지만 치명적인 불이익도 없다. 문제는 C등급이다. 보너스는 50%로 줄고 특히 승진에 필요한 고과 점수는 ‘마이너스’를 받아 상당히 불리하다. 사실 박 부장 입장에서는 S등급에서 C등급까지를 명확히 구별할 기준점이 모호하다. 특히 박 부장의 부서는 수치로 성과가 드러나는 영업 부서가 아닌 영업 관리부라 그 차별성이 더 모호하다. 부서원들이 담당하는 현장 영업부의 실적이 오르면 당연히 그 영업부를 관리하는 담당자의 실적과 평가 점수가 오르고, 반대의 경우는 당연히 평가 점수가 낮아지는 수동적이고 연동적인 업무 특성을 띠기 때문이다. 해서 박 부장은 고육지책으로 부서에서 연차가 낮은 직원부터 매년 돌아가면서 C등급을 받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한 상태다. 이와는 반대로 S등급은 연차가 높은 고참순으로 받기로 한 것.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부서원 8명이 한 번씩 S등급이나 C등급을 받는 데는 8년의 시간이 필요한데, S기업은 매년 인사로 부서 이동이 있고 한 부서에서 장기 근무해도 4년 이상 넘기기가 쉽지 않은 순환 근무제를 실시하기 때문이다. 즉, 이 부서에서 S등급이나 C등급을 받고 부서를 이동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자 부서원들의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 대리의 경우다. 그는 올해 순서대로 C등급을 받았다. 속으로는 마땅치 않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사 평가를 받고 1달 후 부서 이동 인사 대상자가 되었다. 김 대리는 이 부서에서 4년을 근무했는데 A등급 1번, B등급 2번 그리고 C등급 1번을 받고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인사 평가에서 보통 이하의 점수를 받은 상황. 누구나 그렇듯 ‘나 아니면 이 부서가 유지가 안 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김 대리 입장에서 이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김 대리는 새로 옮긴 부서장에게 전 부서의 인사 평가 시스템을 설명하고 이를 인사부에도 알렸다.

박 부장은 김 대리의 처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년에 인사 이동 대상자가 될 수 있는 오 대리를 떠올렸다. 그 역시 S등급은 받지 못했고 A등급 1번, B등급 1번, C등급 1번을 받았다. 박 부장은 내년에는 오 대리에게 S등급을 주고 다른 부서로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S등급은 오 대리보다 고참인 김 과장 차례라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 대리는 김 대리보다 조직에 순응하는 스타일. 박 부장은 마음으로 오 대리의 조용한 성품에 기대어 연말 인사 평가에서 오 대리에게 B등급을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평가 시스템 이면에 숨은 가치 기준

여기서 질문이 있다. 만약 당신이 김 대리와 오 대리라면 과연 어떻게 할까. 또 누구의 태도가 옳은가? 100% 정답은 없다. 회사의 사풍과 인사 평가의 신뢰성 등등에서 처신은 달라질 것이다. 물론 김 대리의 처신이 지금 세태에 맞을 수 있다. 오 대리가 답답하고 수동적이고 진취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의 경우, 다음 해에 각기 다른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 같은 케이스가 모든 회사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S기업만의 독특한 분위기라는 전제가 있다.

S기업뿐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에서 인사 평가에 대한 직장인들의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다. 부서장 개인적인 선호도가 개입되고 더구나 수치나 확연한 결과물을 도출해 내지 못하는 업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가 평가해도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기준이 없다. 해서 S기업에서는 직원들의 인사 평가는 그야말로 ‘참고용’일 뿐 그 이상의 절대 자료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인사 평가 과정과 결과를 받아들이는 직장인의 태도에 회사와 상사는 더 주목했다.

김 대리의 어필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옮긴 부서의 부서장에게 알리는 선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정도가 좋았을 것이다. 이를 인사 부서까지 확대시킨 것에 대해 상사들은 ‘김 대리는 회사에서 항상 양지만 찾아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나. 회사 생활 1, 2년 할 것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억울하고 손해 보는 일을 당하면 가만있지 않을 성격이군’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비해 오 대리는 성실하고 깔끔한 일 처리에 비해 낮은 인사 평가를 받았지만 미련할 정도로 군말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부서장과 회사로 하여금 ‘미안함’을 갖게 했다. 오대리는 다음 해에 S등급을 받고 그가 그토록 가고 싶던 기획실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공을 뺏기고,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저 묵묵히 일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받는 것은 직장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고 정당한 처사다. 하지만 S기업 김 대리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이는 S기업의 인사 평가 시스템의 이면을 몰랐던 것이다. 만약 회사가 인사 평가에 전적으로 의거해 직원의 인사, 연봉, 고과를 100% 반영하는 시스템을 운영했다면 애초부터 박 부장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인사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이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직장인. 직원 500명 규모의 중소기업인 S기업은 결과보다 과정, 능력보다 충성심, 개인기보다 협동’을 중요시하는 기업이었다. 이는 대기업으로 성장세를 타는 기업의 현안인 경쟁 기업과 대기업의 스카우트에 의한 이직 등에서 ‘진짜 옥석’을 가리기 위한 S기업만의 독특한 사풍에 기인했다. 이 기준에 따라, 작은 일에도 ‘파르르한’ 김 대리보다는 ‘진득한’ 오 대리가 더 점수를 받은 것이다.

공을 세워도 몰라주고, 노력을 해도 다른 직원이 그 성과를 나눠 갖는다면 그 어떤 직장인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1년만 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10년 이상 장기전으로 해야 한 직장에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 긴 시간 동안 매번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는 없다. 무대 뒤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할 때도 있다. 그 시기를 잘 견뎌야 한다. 무대 감독은 우리 생각보다 시야가 깊고 넓다. 그는 무대 위만이 아니라 무대 뒤는 물론이고 객석까지 살피기 때문이다.

▶성실한 노력과 고개를 숙이는 겸양

여기 중국 당나라 시대의 명신 곽자의가 있다. 그는 당 현종부터, 숙종, 대종, 덕종까지 4명의 황제를 섬겼다. 난을 진압했고, 외침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것이 수도 없었다. 두 번이나 적에게 빼앗긴 수도 장안이 곽자의의 손에 의해 수복되었다. 그의 공으로 당 왕조가 150년간 더 지속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 대종은 곽자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고, 덕종은 그를 상부로 모셨다. 곽자의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 모두 벼슬에 올라 그의 가문은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곽자의는 84세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살아서는 당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죽어서는 그의 부귀영화가 부러운 백성들에 의해 신으로 모셔졌다.

곽자의가 인생 내내 꽃길만 걸은 건 아니다. 모함과 음모가 난무했다. 환관들은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모함을 씌웠고 곽자의 부친 묘를 파헤치는 수모를 안겼다. 황제 역시 곽자의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전란이 일어나면 그를 전쟁 한복판으로 보냈고 전쟁이 끝나면 이내 곽자의의 권한을 빼앗아 그를 일개 촌로로 만들었다.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곽자의는 항명을 하거나 불평불만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말 위에 올랐다.

당나라는 현종 무렵부터 쇠약해졌다. 이민족의 잦은 침입도 원인이지만 절도사 안녹산, 사사명이 일으킨 10년간의 반란이 결정적이었다. 전란으로 나라는 피폐하고 백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현종은 장안에서 변방인 서천으로 피난을 갔다. 황제의 자리를 이은 숙종은 반란을 진압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이때 공을 세운 이가 곽자의다. 그는 무과 출신으로는 독특하게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곽자의는 안사의 난을 비롯해 몇 번에 걸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최선두에서 충성을 다했다. 숙종이 곽자의에게 “이 나라가 비록 나의 나라지만 사실은 경이 다시 세운 것이 분명하오”라며 치하할 정도였다.

곽자의의 저택은 장안에서 궁궐 다음으로 컸다. 식솔만도 무려 3000명이 넘었고 집이 넓고 전각이 많아 곽자의가 어디에서 자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곽자의는 황제로부터 정원, 봉토 등 수없이 많은 하사품을 받았다. 황제는 그를 신임했고, 관리들은 그를 의지했으며, 백성들은 그를 존경했다. 한마디로 나라의 근간을 세운 공신이었다.

곽자의는 공이 높아지고 부가 쌓일수록 고개를 숙였다. 그의 정적들마저 곽자의의 진심을 알고 존경했다. 곽자의는 평생 ‘성실한 노력’과 ‘고개를 숙이는 겸양’을 실천했다. 그는 겸손하나 비굴하지 않았고, 담대했으나 거만하지 않았다. 또 상대의 적의를 해소하고 갈등을 푸는 데 적극적이었고, 비록 써도 뱉지 않고 삼켰으며, 억울해도 화를 내지 않았고, 적을 친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곽자의는 화주 출신으로 697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곽경지가 당나라 자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종3품 이상의 가문이었다. 곽자의는 무과로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주로 변방에서 이민족을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토번, 회흘, 강흔 등 변방 이민족의 공격 때 정면 대결보다는 인품으로 감화시키고 또한 이민족을 배려한 정책으로 큰 전쟁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곽자의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당나라 최대 위기였던 안사의 난 때다. 안사의 난은 절도사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

당 현종 시대, 양 귀비의 신임을 받는 양국충과 유주, 평로, 하동 절도사를 겸직하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안녹산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모반을 모의 중이라고 무고하고 그를 장안으로 소환했다. 755년 안녹산은 20만 대군을 무장시켜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안녹산의 군대는 단숨에 북경과 낙양을 점령했다. 양국충은 가서한을 대장으로 임명해 토벌군을 보냈지만 안녹산의 군대에 패배했다. 현종은 서쪽으로 피신했다.

756년 감숙성 영무에서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즉위했다. 숙종은 황족 광평왕 이후를 병마대원수로, 곽자의를 부원수로 안녹산 토벌을 명했다. 두 사람의 눈부신 활약으로 관군은 낙양과 장안을 수복했다. 이후 관군과 반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곽자의의 지휘로 서서히 관군이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그러자 반군 내부에서 균열이 시작되었다. 안녹산은 아들 안경서에게 암살당했고, 사사명은 안경서를 죽이고 반군의 우두머리로 나섰다. 하지만 그 역시 아들 조의에게 살해당했다. 조의가 토벌군에 패하면서 12년에 걸친 안사의 난은 비로소 진압되었다.

▶불평불만보다는 자신의 임무를 우선하라

숙종은 곽자의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곽자의가 오합지졸 병사들로 전쟁의 승기를 마련하자 숙종은 곽자의를 사도에 임명하고 대국공에 봉하며 식읍 1000호를 하사했다. 숙종이 사망하자 원수직을 맡았던 광평후 이후가 황제가 되었다. 바로 대종이다. 대종의 즉위에는 환관 세력이 큰 공을 세웠고 환관 우두머리 정원진이 실세로 등장했다. 그는 곽자의를 경계했다. 대종에게 참소해 전선에 있는 곽자의의 병권을 박탈하고 그를 숙종의 능을 관리하는 말직으로 내려 보냈다. 곽자의는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숙종의 능을 보살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대종은 스스로 부끄러웠다. 대종은 곽자의를 불러 “내가 부덕해 경의 공과 진심을 무시하고 의심했다. 이번 일은 나 역시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사과하며 곽자의를 부원수에 임명했다.

토번이 어느날 20만 대군을 일으켜 당나라로 쳐들어왔다. 군대는 무너지고 수도 장안까지 위험에 처했다. 대종은 피난을 떠났다. 대종은 곽자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에게 병권을 맡기고 토번을 막으라 명했다. 대종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곽자의였다. 곽자의는 자신을 따르던 부장들을 이끌고 한마디 불평 없이 군대를 재건하고 토번군을 막을 전략을 세웠다. 그 사이 토번 대장 위수가 장안을 함락했다. 대종은 하남 섬현으로 피난을 떠났다. 곽자의는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향했고 토번군은 한바탕 약탈을 한 후 철수했다. 이때 곽자의가 거느린 군대는 불과 4000명으로 토번군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병력이었다. 하지만 토번군은 곽자의의 명성을 익히 알고 철수를 한 것이다.

곽자의는 소수의 정예병으로 다수의 적을 이기는 전략에 능통했다. 그의 전략은 적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대종은 곽자의의 공을 높이 사 당태종이 설치한 역대 공신들의 업적을 기리는 능연각에 곽자의의 초상을 걸었고 아끼는 딸 승평 공주를 곽자의 아들 곽애와 혼인시켰다.

물론 곽자의에게 위기는 수시로 찾아왔다. 환관 태감 정원진과 어조은은 온갖 방법으로 곽자의를 괴롭혔다. 하루아침에 전쟁터 최전선에 있는 곽자의의 병권을 빼앗아 하급 관리로 내치는 것은 예사였다. 곽자의가 토번군을 막기 위해 전선에 있을 때 일이다. 어조은이 사람을 시켜 곽자의 아버지의 묘를 파헤쳤다. 이는 참을 수 없는 도발이고 모욕이었다. 토번을 물리치고 돌아온 곽자의에게 대종이 곽자의 아버지 파묘 사건을 위로했다. 곽자의는 울면서 말했다.

“제가 전쟁터를 오가면서 부하들이 여러 무덤들을 파헤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 부친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하늘의 뜻이고 인과응보라 생각합니다. 제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대종도, 어조은과 정원진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느날 어조은이 곽자의의 군대를 감사했다. 곽자의는 부하 몇 명만 거느리고 어조은을 찾았다. 곽자의의 부하들은 “어조은이 장군을 해할 수 있습니다. 무장 병력을 대동하시지요”라고 권유했지만 곽자의는 듣지 않았다. 가벼운 차림에 몇 명의 부하만을 수행시킨 곽자의를 보고 오히려 어조은이 당황했다. “장군, 어찌 부하 몇 명만 대동하고 올 생각을 하셨는지요?” “태감께서 군대의 물자를 점검하는 자리인데 왜 전투 병력을 몰고 오겠습니까?” 그러자 어조은이 감탄하며 말했다. “만일 곽 장군을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인품에 감탄하지 않았다면 어찌하려고 무장도 안 하고 올 수 있는가. 장군의 배포와 진심을 이제야 알겠다.” 악독하게 곽자의를 괴롭혔던 어조은조차 곽자의의 대범함에 감탄하고 더 이상 그를 모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곽자의는 조심하고 겸손하고 근신하고 자신을 숙이는 방법으로 이름과 공을 천하에 떨치고, 남의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그는 원한을 덕으로 갚고 싸우기보다 참고 기다리며 적을 굴복시킨 것이다. 사가들은 곽자의를 두고 “권력이 천하를 흔들었지만 조정에서 그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았고, 공이 천하를 덮었지만 군주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또 그의 부귀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끝에 다해도 군자들을 이를 죄라고 비난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대종이 죽고 덕종이 즉위했다. 덕종은 곽자의를 ‘상부尙父’라 부르고 태위, 중서령 등 최고 관직을 내리고 식읍 2000호를 하사했다. 하지만 덕종은 곽자의의 군 부원수 직책은 회수했다. 곽자의는 이에 따랐다. 781년, 곽자의는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덕종은 5일간 조회를 폐지하고 모든 대신을 조문하게 했다. 장례에 필요한 물품도 국고에서 제공했으며 숙종의 능 옆에 곽자의의 묘를 쓰는 것을 허락했다.

곽자의는 당나라를 멸망 직전에서 몇 번이나 구한 공신이었다. 하지만 그 공이 아무리 높아도 군주를 무시하거나 흔들지 않았다. 또 세력이 있으면서도 붕당을 만들지 않았고 그 세를 이용해 정적을 모함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를 잃고서도 군주나 정적을 원망하지 않았고 모함을 받으면서도 억울하다고 항변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항상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후배와 동료를 추천해 높은 관직에 오르게 하고 그들의 공을 빛나게 해 주었다.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곽자의는 당나라에서 이광필과 함께 양대 명장으로 존경 받았다. 훗날 곽자의는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때 주저하지 않고 이광필을 선택했다. 한때 이광필은 곽자의를 무능한 상관이라 평하고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다녔다. 이는 곽자의가 대장으로 부장 이광필을 부릴 때 이광필의 계책을 채택하지 않자 이광필이 서운한 마음을 가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곽자의는 이광필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그때 이광필이 내놓은 계책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이광필이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명성을 떨치면서 자만심에 빠질 수 있어 일부러 자중시킨 것이다. 나중에 이를 알고 이광필은 곽자의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인품 때문에 이민족도 곽자의를 ‘영공令公’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곽자의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다. 곽자의가 병에 걸렸을 때 대신 노기가 병문안을 왔다. 노기는 영리하고 유능했지만 용모가 추해 보는 사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곽자의는 노기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모든 집안 식구와 하녀들을 물리고 홀로 노기를 맞았다. 노기가 돌아간 후 가족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곽자의는 다음과 같이 답해다고 한다. “노기는 못생겼지만 속이 음흉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그를 보자마자 웃으면 그는 분명이 원한을 품을 것이다. 훗날 그가 권력을 잡으면 이를 마음속에 간직했다가 분명히 우리 집안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노기의 본모습을 알기에 이를 알고 방지한 것이다.”

이처럼 곽자의는 대범하면서도 대인 관계에 있어 상대를 배려하는 세심함을 잊지 않았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포토파크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49호 (20.10.1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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