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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헬무트 콜

[ Helmut Kohl ]

요약 독일의 정치가. 1969년 라인란트팔츠주지사, 1973년 기민당 총재를 거쳐 1982년 서독의 제6대 총리가 되어 통일 이후까지 총 16년간 재임하였다. 1990년 10월 동독과의 통일을 달성하였으며, 유럽 통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출생-사망 1930.4.3 ~ 2017.6.16
본명 헬무트 요제프 미하엘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국적 독일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바이마르공화국(현 독일) 루트비히스하펜암라인
주요수상 샤를마뉴상(1988, 미테랑과 공동 수상), 헨리 키신저상(2011)

1930년 4월 독일의 전신인 바이마르공화국루트비히스하펜암라인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헬무트 요제프 미하엘 콜(Helmut Josef Michael Kohl)이다. 보수적인 로마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며, 1950년 막스플랑크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1951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하여 1956년 졸업하였고, 1958년 동 대학에서 《팔츠의 정치 발전과 1945년 이후 정당 재건 Die politische Entwicklung in der Pfalz und das Wiedererstehen der Parteien nach 1945》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정치 활동

일찌기 정치에 관심을 두고 16세 때인 1946년 독일기독교민주동맹(기민당:CDU)에 입당하여 청년조직에서 활동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53년 기민당의 라인란트팔츠주위원이 되었고, 1954년 라인란트팔츠주의 청년조직 부위원장이 되어 1961년까지 활동하였다. 1959년 라인란트팔츠주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39세 때인 1969년에는 라인란트팔츠주지사에 당선되어 역대 최연소 주지사가 되었다. 1973년 기민당 총재로 선출된 뒤 1976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기민당과 자매 정당인 기독교사회연합(기사당:CSU)의 총리 후보로 출마하여 과반에 육박하는 48.6%를 득표하여 제1당이 되었으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사민당:SPD)이 자유민주당(자민당:FDP)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총리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서독 제6대 총리

1982년 9월 슈미트 총리의 불신임안이 가결된 뒤 10월에 기민당·기사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구성되어 서독의 제6대 총리에 취임하였으며, 1983년 3월 연방의회 선거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 총리에 재선되었다. 1984년 9월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베르됭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만나 양국 간의 오랜 앙금을 해소하고 화해하였으며, 양국 간의 우호 관계 조성은 훗날 유럽 통합의 초석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7년 1월 연방의회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3차 연임에 성공하였으며, 9월에 동독의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를 초청하여 동·서독의 협조 관계를 조성하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11월 28일 10단계 통일 방안을 발표하고 1990년 5월 동·서독 간 화폐경제 사회통합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8월 31일에는 통일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기 통일'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9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 전승 4개국(영국·프랑스·미국·소련)과 동·서독이 독일 통일에 합의하는 이른바 '2+4 조약'이 체결되고 10월 3일 동독이 공식적으로 소멸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분단되었던 독일의 재통일이 완료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콜은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독일의 통일을 앞당겼다.

통일 독일의 첫 총리

1990년 12월 연방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여 통일 독일의 첫 총리이자 4차 연임에 성공하였으며, 이듬해 앙겔라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등용하였다. 1994년 더 이상 총리직을 연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번복하고 유럽 통합의 완결을 명분으로 총리 후보로 출마하여 5차 연임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1998년까지 총 16년간 총리직에 재임하여 독일 역대 최장수 총리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급진적 통일과 동구권의 몰락이 경기 침체와 실업률 증가, 복지정책 후퇴로 이어지면서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1998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6차 연임에 도전하였으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에게 대패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직후 기민당 총재직에서도 물러난 뒤 연방 하원의원직을 유지하다가 2002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평가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 정상화를 도모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꾸준한 유화정책으로 동독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구 공산권이 몰락할 때 시기를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독일 통일의 아버지'라 불린다. 또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유럽 단일화폐의 법적 토대를 설정한 마스트리흐트조약 체결의 중심 역할을 함으로써 유럽연합(EU)의 출범에도 공헌하였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기민당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오점을 남겼지만, 20세기 세계 정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서 2017년 6월에 사망한 뒤 장례식은 유럽의회에서 첫 유럽장(葬)으로 엄수되었다. 1988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샤를마뉴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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