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박쥐는 억울하다

나는 드라마 <칸나의 뜰>에서 인터페론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1978년에 방영된 드라마라 떠오르는 대목은 거의 없지만 인터페론이 항암제로 거론되었다는 사실만은 기억난다. 미생물인 대장균 유전자를 변형시켜 인슐린을 최초로 생산하고 이를 당뇨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한 때가 1982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마도 드라마에 등장한 인터페론은 동물 혹은 인간의 세포나 조직을 갈아서 얻었음이 분명하다. 항암제로 한 번 주사하기에도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인터페론은 척추동물의 면역계가 흔히 사용하는 단백질이다. 면역은 ‘나(self)’가 아닌 것들에 대한 반응이다. 바이러스가 침입해도 우리 면역계는 인터페론을 만든다. 나로부터 출발했지만 본디 성질을 잃은 암세포를 겨냥해 인터페론이 만들어지는 점도 수긍이 간다. 요즘 인간 집단에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면서 박쥐가 자주 말밥에 오른다. 박쥐가 여러 바이러스의 창고라는 점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박쥐 세포 안엔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가 평화롭게 살아간다. 메르스, 사스 및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그런 것들이다. 올초 미국의 미생물학자인 미스라 박사는 메르스가 겨울잠을 자는 박쥐 안에서 몇 달간 무사히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식의 공존은 인간 집단에선 볼 수 없다. 바이러스에 대응해 우리 면역계가 날뛰며 서슬 퍼런 진검승부를 벌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과 달리 박쥐는 무척 유연하게 바이러스를 상대한다. 박쥐 면역계는 바이러스에 대해 ‘길들이기’와 ‘방임하기’ 두 가지 전략을 쓴다. 잘 알려졌듯이 바이러스는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숙주가 필요하다. 유전자 복제 기구를 갖춘 생명체라면 모두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세균이나 박쥐 또는 인간의 세포 역시 바이러스가 공략할 목표가 된다. 숙주 세포 안에서 자신의 숫자를 늘린 바이러스는 세포를 뚫고 나와 새로운 숙주를 찾아 나서는 반면 숙주는 최선을 다해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아 피해를 최소화하려 한다. 바로 숙주 방어물질인 인터페론이 하는 일이다. 간섭한다(interfere)는 의미를 띤 인터페론은 박쥐에서 특히 맹위를 떨친다. 하지만 바이러스도 가만 있지는 않는다. 인터페론의 칼날에 대항할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것이다. 결국 박쥐 면역계의 공세를 피하게 된 돌연변이 바이러스만이 박쥐 세포 안에서 칩거하게 되었다. 이것이 박쥐의 바이러스 길들이기의 실체다.

올해 발표된 결과들이라 그 내막이 속속들이 밝혀지진 않았어도 어쨌든 자신의 복제를 포기한 바이러스는 박쥐 몸 안에서 한동안 안전한 보금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포유동물의 세포 안에 ‘위험한’ 존재를 감시하는 나노 경찰이 암약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포착하면 나노 크기의 단백질 경찰은 무리 지어 행동하면서 잇따라 면역반응을 촉진한다. 면역반응을 촉진한다는 의미를 담아 과학자들은 이들 단백질 무리에게 인플라마좀(inflammasome)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 인플라마좀이 ‘방임하기’의 주역이다. 전술했듯 인플라마좀 나노 경찰은 세포 안의 ‘위험한’ 존재를 감지하면 즉시 모여들어 면역반응을 촉진한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세포가 허용하는 양보다 많은 생체 물질도 위험 신호가 된다. 항산화제로 알려진 요산도 양이 과하면 인플라마좀에 포착되고 머잖아 통풍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박쥐 세포는 인플라마좀을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세포 안에 바이러스가 있어도 아무 일도 안 생긴다. 바이러스와 박쥐의 협상은 이렇게 완성된다. 그러나 이런 타협은 박쥐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즉시 파기된다. 먹이와 보금자리를 잃은 박쥐가 야생 동물시장의 더러운 철창에 갇히거나 병에 걸렸을 때다. 박쥐와 바이러스 모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바이러스는 증식을 개시하고 세를 키워 박쥐 세포를 탈출한다. 그중 일부는 인간의 들숨에 몸을 싣는다. 박쥐는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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