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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과최명길,병자호란에대해

척화파,주화파으의경도알려주시고김상헌,최명길,병자호란에대해자세히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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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1.06.02 조회수 1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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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째 답변
스머프할배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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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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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7위, 흉부외과 12위, 정부기관 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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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는 당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에 후금(나중에 청나라)과 무조건 싸우자고 주장한 사람들이고, 주화파는 외교적으로 풀어가자는 실리파였습니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할 수 없으나 싸울 여력도 없이 객기를 부리다가 청나라에 전국이 유린되고 속국이 된점은 척화파의 잘못된 주장이라고 봅니다.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은 159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사가독서하였습니다.

1611년 승지로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정인홍을 탄액하였다가 좌천되었고, 1613년 사돈인 김제남이 사사되었을 때 연좌되어 연안부사에서 파직되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간으로 공서파의 전횡에 맞서 '간원팔점차자'의 글을 올려 이들을 비판하면서, 청서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주전론을 주장하다 청에 항복하자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다시 1639년 청나라의 출병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여 청나라에 압송되었습니다.

1645년에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귀국하였습니다.

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과 영돈령부사를 지냈습니다.

죽은 뒤 숭명절의파로 조야에 큰 정신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4114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최명길은 1605년(선조 38)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하였고, 같은해 증광문과에도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이후 공조좌랑에 재임하다가 1614년 물러났습니다.

북인의 전횡이 선조의 비인 인목대비 유폐에까지 이르자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이조참판에 오르고, 정사공신으로 완성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후금과의 강화를 주장하여 화의를 맺게 하였지만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후 예조와 이조 및 호조판서와 예문관과 홍문관 및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1936년 이조판서가 되어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1637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는 영의정에 올라, 대청과 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습니다.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을 통해 명과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드러나 청에 압송되었습니다.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나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6500

 

그러나 주화파이면서도 국가의 중심을 잡고 나라를 지키고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최명길이 더 나을지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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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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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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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2월 청의 두 사신 (용골대, 마부태)이 와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주전파, 주화파가 싸우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두 사신은 귀국한다. 그해 4월 조선이 청나라 황제에게 하례하지 않자, 선전포고. 결국 12월에 공격해오자. 14일에 남한산성으로 피신  그러나 결국 항복.

 

 

 최명길의 주장:명나라는 조선의 은인이다. 명을 배신하고, 청을 섬길 순 없다.

 김상헌: 최명길과 대립 임진왜란으로 전쟁을 또 저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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